소설리스트

날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23)화 (23/108)

23

똑똑.

노크 소리가 조용한 서재에 울려 퍼졌다.

리코리스의 눈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책을 읽고 있던 레이첼이 고개를 들어 서재 문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하녀 한 명이 서재 안으로 들어와 들고 있던 서신을 카트린에게 건네주었다.

카트린은 의아한 얼굴로 서신의 발신인을 확인하다가 이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 아가씨.”

“누군데 그래?”

서신을 보낼 사람이 있나 싶어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트린은 레이첼을 향해 공손히 들고 있던 서신을 넘겨주었다.

레이첼 역시 서신을 받아 들고 잠시 멈칫거렸다.

서신의 앞면에 황실을 상징하는 매의 얼굴 모양 인장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매 얼굴 인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국의 황제뿐이었다.

레터 나이프로 봉투를 뜯은 레이첼이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친애하는 레이첼 플러렛.

오늘 오찬에 그대를 초대하니, 이변이 없다면 참석하기를 바란다.

레이널드 P. 카르웬]

서신의 내용은 무척 짧았다. 하지만 레이첼은 달갑지 않은 내용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실 오찬 초대장.

은밀하게 진행되는 식사 초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첼은 이 편지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과 얽히는 일이 반복되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황제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레이첼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카트린을 돌아보았다.

“외출 준비 좀 해 줄래?”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레이첼은 카트린의 안내를 따라 외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황성에 도착한 레이첼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오찬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종은 익숙하게 문을 두드린 후 그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레이첼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안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레이첼이 앉으려는 자리로 다가와 시종을 대신해 의자를 빼 주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첼이 앉는 타이밍에 맞추어 의자를 넣어 준 라이언이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오늘도 뵈니 반갑군요.”

라이언이 보기 좋게 웃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황태자 전하.”

비교적 딱딱한 레이첼의 말투에 라이언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친구인데 조금 더 살갑게 대해 주시면 안 됩니까?”

“살갑게요?”

“예. 지난번에 헤스테인 공자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죠.”

라이언의 말로 인해 마탑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레이첼이 설핏 미소를 띠었다가 지웠다.

“에드워드와는 어려서부터 알던 사이라 그렇게 편하게 대할 수 있었던 거니까요. 게다가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그럼 나도 영애를 도와주면 그에게 했던 것처럼 살갑게 대해 줄 겁니까?”

“네?”

라이언은 서운함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조금 부러웠습니다. 왜 진작 영애와 더 빨리 만나지 않았는지 말이죠.”

“그야 저는 아카데미를 다녔잖아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실에서 개별적으로 제왕학 등을 배우시니.”

“그런 정석적인 것 말고요.”

라이언이 레이첼의 말허리를 잘라 냈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이름, 도 괜찮고 말이죠.”

“이름이요?”

늘 차분하던 레이첼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라이언이 귀엽다는 듯 소리를 죽여 웃었다.

“예. 저는 계속 영애를 레이디 플러렛이나 플러렛 영애로 부르고 있죠. 영애는 내게 황태자 전하라 부르고 있고요.”

“네, 그렇습니다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라이언의 제안에 레이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친근한 사이에서나 용인되는 일을 황태자인 라이언이 제안하고 있었다.

황태자인 라이언이 이렇게 제안할 정도라면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친분이 있는지는 레이첼로서는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싫습니까?”

라이언이 시무룩한 말투로 레이첼에게 물었다.

레이첼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싫다기보다는 그래도 되는 건지 의아해서요.”

“뭐 어떻습니까? 우리 어차피 친구 하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라이언은 제법 천연덕스러웠다.

레이첼은 원래 라이언이 이런 성격이었나 싶어 잠시 놀라다가 입을 달싹였다.

“정말 그렇게 불러도 괜찮으신가요?”

레이첼이 확인차 라이언에게 묻자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제안한 거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환영이죠.”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레이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레이첼.”

라이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첼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고는 입가를 빙글거리며 웃었다.

“레이첼도 한번 해 보시죠.”

“……라이언. 이렇게 하면 될까요?”

“예.”

레이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게 만족스러운지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시종의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레이첼과 라이언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반겼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간단히 고개를 숙여 예를 다한 라이언과 달리 레이첼은 황제를 향해 예법을 갖추어 인사했다.

“이런,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하는 자리를 내가 방해한 것은 아닌가?”

황제의 질문에 레이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니 다행이군. 그래, 앉지.”

황제가 레이첼을 향해 흐뭇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황제의 허락이 있자 레이첼과 라이언이 자리에 앉았다. 황제 역시도 상석에 자리했다.

“그럼 식사 준비해 주게.”

“예, 폐하.”

시종에게 음식을 가져오라 이르자 곧 시종과 시녀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주방장 베른델 남작이 이번 요리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주방장의 설명이 끝나고 난 후에야 제대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는 입맛에 맞나?”

황제가 불쑥 레이첼을 향해 물었다.

“예,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레이첼의 대답에 흡족하게 웃음 황제가 포도주로 입을 축였다.

“내가 오늘 그대를 오찬에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그대에게 황실 마법사가 되는 것은 어떤지 제안하기 위함이네.”

“……황실 마법사 말인가요?”

“그래.”

레이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손을 멈추었다.

그러는 사이 황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듣자 하니 그대가 마탑주 후보 자리를 거절했다고 들었네.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만.”

“그럼 황실로 오는 건 어떻겠나? 마탑이 마법사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는 건 잘 알고 있네. 마법사를 향한 지원도 아낌이 없는 걸로 알고 있고. 하지만 황실 소속 마법사가 된다면 황실 측에서도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줄 수 있다네. 어떤가?”

황제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무언가 목적을 갖고 오찬에 부른 거라고 생각한 건 맞았지만,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기에 레이첼은 선뜻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마탑이 존재하는 한 황실 소속 마법사는 마탑보다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마법 인재들 모두 황실에 소속되는 것보다는 마탑에 소속되기를 더 원하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마탑주 후보인 에드워드 헤스테인과 맞먹는 힘을 가졌으리라 짐작되는 레이첼을 황실로 영입하여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폐하, 전…….”

“중요한 마법 아티팩트가 마탑에 모이는 건 사실이지만, 또 일부는 이곳 황성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레이첼.”

레이첼이 머뭇거리며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려 하자 라이언이 그녀의 말허리를 끊고 끼어들었다.

레이첼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라이언은 레이첼의 말을 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말을 끊은 건 미안합니다, 레이첼. 하지만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레이첼은 지금, 찾고 있는 물건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건 맞아요.”

레이첼이 시인하자 라이언이 잘되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레이첼 정도의 실력자라면 레이첼이 찾고 있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마탑에서 누락할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마탑에는 그대와 친분이 있는 헤스테인 공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쪽 정보도 얻을 수 있고, 황실 소속 마법사가 된다면 황실로 모여드는 마법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겠죠.”

라이언의 말은 일리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정보가 들어올 구멍을 뚫어 놓는 게 레이첼에게는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황제 폐하께서 양해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이어서 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뭐지?”

“기간은 1년으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후에도 레이첼이 원한다면 기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요. 그게 레이첼에게도 부담스럽지 않고, 좋지 않겠습니까?”

라이언의 제안에 황제가 생각하는 듯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을 것 같군.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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