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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마친 테르반과 레이첼이 비올라의 곁으로 돌아왔다. 레이첼은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포도주 한 잔을 집어 들었다.
혀에 무겁게 감기는 보디감과 적당한 산미가 일품이었다.
레이첼은 비올라에게 이어지는 축하 행렬을 확인하며 조용히 입을 축였다.
테르반도 조용히 레이첼의 곁을 지켜 주었다.
문득문득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게도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테르반은 춤을 춘 이후로 부쩍 말이 없어졌다.
레이첼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테르반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답을 하는 게 조금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누지 않던 상황에서는 곤란할 것도 없었으니 레이첼은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 비올라. 생일 축하해. 이건 네가 부탁한 선물이야.”
무도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에드워드가 다시 비올라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작은 선물 상자를 비올라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오빠!”
비올라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을 보아하니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는 선물인 듯했다.
에드워드는 비올라가 기뻐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레이첼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레이첼, 아까 보니 테르반과 함께 춤추던 것 같던데.”
“맞아요. 테르반이 춤을 권해서 한 번 췄어요.”
에드워드의 질문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테르반의 시선이 절로 두 사람에게 옮겨 갔다.
“혹시 괜찮다면 나와도 춤추지 않을래?”
에드워드가 레이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잠시 고개를 들어 에드워드의 눈을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레이첼을 올곧게 향하고 있었다.
“싫으면 편히 거절해. 괜찮으니까.”
에드워드는 레이첼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듯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레이첼은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손을 포갰다.
“아니에요. 어려운 것도 아닌걸요.”
레이첼이 긍정을 표하자 에드워드가 더욱 짙게 웃었다. 그러고는 레이첼을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해 댄스홀로 향했다.
테르반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 모습을 빤히 주시했다.
댄스홀에 도착하여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레이첼 오늘 인기 많네.”
비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에드워드와 레이첼이 춤추는 모습을 확인했다.
테르반은 곁으로 다가온 비올라의 모습을 한 번 일별한 후 다시 레이첼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테르반.”
그때 비올라가 작은 목소리로 테르반을 불렀다.
“왜?”
“너랑 레이첼이랑 어떻게 화해한 거야?”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더니 비올라는 레이첼과 테르반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었던 건지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테르반이 들고 있던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자 씁쓸한 맛이 입에 감돌았다.
“화해, 한 적 없어.”
“뭐?”
테르반의 말에 비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몇 번 레이첼에게 사과했는데, 레이첼이 받아 주지 않았어. 아니, 받기는 했는데……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받은 것 같았고.”
테르반은 레이첼에게 거듭 사과를 건네던 때를 떠올렸다. 끝끝내 사과를 받으면서도 레이첼은 지겨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때 당시에는 레이첼이 받아 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레이첼이 그렇게 사과를 받고도 이전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자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래서 로도만 산 비탈길에 떨어졌을 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는지 물었다.
만일 거기서마저 레이첼이 거절했더라면 테르반에게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레이첼은 테르반의 부탁대로 예전처럼 되돌아가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레이첼은 이걸 화해라고 했지만, 테르반이 생각할 때 이건 화해가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건 여전히 레이첼의 마음이 얼어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냥 예전처럼 돌아간 척하고 있는 거야. 나 때문에.”
“…….”
복잡한 테르반과 레이첼의 사정에 비올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올라에게 레이첼과 테르반은 둘도 없는 단짝 친구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의도치 않게 엇갈리고 관계마저도 틀어지려 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테르반은 비올라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그녀를 의식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정말이야?”
비올라의 여린 목소리에 테르반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지만, 너희가 빨리 예전처럼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어.”
비올라의 희망 사항이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틀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테르반은 또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 비올라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비올라.”
“응?”
“이전에……. 내가, 레이첼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착각했었잖아.”
“……아, 그랬지.”
비올라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긍정했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녀의 착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보아하니 더 그랬다.
그 착각으로 인해 레이첼이 상처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비올라의 목소리가 절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테르반은 비올라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확인하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넌 왜, 내가 레이첼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테르반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전에 비올라가 그렇게 생각한다 했을 때는 그녀가 착각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다고 치부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깨닫고 나니 비올라의 말을 단순한 착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어졌다.
어쩌면 그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레이첼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드러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건 들어서 뭐 하려고? 어차피 너, 레이첼 안 좋아하잖아.”
비올라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한 걸로 인해 레이첼에게 상처를 준 것은 비올라 역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상황이 일단락된 지금, 그때의 일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알고 싶어서.”
테르반이 포기하지 않고 답하자 비올라가 그를 샐쭉 흘겨보았다.
“말 안 해 줄 거야. 어차피 내가 착각했던 거니까.”
비올라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자 결국 테르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착각한 거 아니야.”
“뭐?”
비올라는 테르반의 말에 놀라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테르반을 올려다보았다.
테르반은 그런 비올라를 흘겨본 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네가 착각한 게 아니라고. 오히려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맙소사. 그 말은 설마…….”
비올라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비올라가 테르반을 보며 느꼈던 게 착각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테르반은 한번 비올라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멀리 에드워드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춤을 추는 레이첼을 응시했다.
레이첼은 테르반과 춤출 때와는 달리 화기애애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신과 춤출 때 그 딱딱하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테르반은 레이첼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질투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레이첼을 붙잡고 따지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탓에 주먹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내가 레이첼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거 같거든.”
테르반이 스스로 인정했다.
비올라는 예상치 못한 테르반의 고백에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이야?”
“그래.”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야?”
이미 레이첼과 테르반이 엇갈려 버린 이후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비올라는 하필이면 레이첼이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은 지금에 와서 왜 테르반이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건지 의아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테르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당황스러워. 난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을 마친 테르반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데 레이첼이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리고 에드워드와 춤을 추면서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나서 미쳐 버릴 것 같은 걸 어떡해.”
비올라는 테르반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 끝에는 레이첼이 있었다.
비올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의 친구들이었지만, 엇갈릴 대로 엇갈려 버린 레이첼과 테르반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나도 자각한 지 얼마 안 돼서.”
거기까지 말한 테르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의 침묵이 있은 끝에 그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단은 상황을 봐야겠지. 더 이상 레이첼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