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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문드 공작은 레이첼이 탄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얼굴에 피어 있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레이첼이 스스로 회귀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온건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될 터였다.
베르문드 공작의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을 테고, 레이첼 역시도 크레온의 계약자가 찾아야 할 리코리스의 눈물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다.
무표정으로 몸을 돌린 베르문드 공작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은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깊이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집사 론하임이 베르문드 공작을 향해 물었다.
그제야 손을 멈춘 그가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죽어 주는 게 제일 최선이었겠지만, 그렇지 않겠다면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지.”
제안을 거절한 순간부터 그녀는 그에게 걸림돌일 뿐이었다.
문제는 레이첼이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베르문드 공작은 그녀가 마녀를 죽이기 위해 고작 세 가지 마법만을 사용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차기 마탑주 후보인 에드워드 헤스테인이 마물 토벌대에 합류했다고 하더라도 크게 고전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레이첼은 아무런 부상이나 상처 없이 월등한 실력으로 마녀 사라를 죽여 버렸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자신의 실제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스펠 네 개를 메모라이즈할 정도의 실력이거나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역으로 그녀가 베르문드 공작을 적으로 인식해 버리면 곤란했으니까.
그렇다면 레이첼의 약점을 공략하는 쪽이 더 알맞을 듯했다.
베르문드 공작은 레이첼이 왜 크레온과 계약해야만 했을지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레이첼이 두각을 드러낸 것은 마물 토벌대 이후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중요한 사건이 그쯤 일어났다고 보는 게 옳을 터였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가면서까지 이뤄야 했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이뤄야 했을 목적이 마녀 사라를 죽이는 일이 아니었다면 필시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었겠지.
마물 토벌대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레이첼과 가까운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테르반 산체스.
테르반과 레이첼, 그리고 비올라 세 사람이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고, 졸업한 이후로도 줄곧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는 건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베르문드 공작은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의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마물 토벌대에서 테르반이 죽음을 맞이했고, 이를 막기 위해 레이첼이 크레온과 계약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아마 계속 실패했겠지.’
레이첼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강해지기로 결심했을 터였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렀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야 아무런 전조도 없던 레이첼이 갑작스럽게 두각을 드러낸 현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추측대로라면 지금 레이첼에게 가장 큰 약점은 테르반이었다.
하지만 테르반 역시도 산체스 공작가의 장남이며 또한 황실 근위 기사단 소속의 기사인 만큼 함부로 건들 수는 없었다.
그럼 레이첼의 주변 인물을 공략하는 게 나을 것인가?
베르문드 공작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칫 잘못한다면 일이 완전히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 * *
레이첼이 플러렛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테르반과 에드워드의 방문 소식이었다.
그녀는 곧장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왔어?”
레이첼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자 에드워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반겼다. 테르반도 자리에서 일어나 흘끔 에드워드를 일별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두 사람? 연락도 없이.”
레이첼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먼저 대답한 건 테르반이었다.
“오늘 황성에 안 나왔길래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해서. 근데 어디 다녀오는 것 같네.”
“응. 볼일이 있어서 오늘은 안 나갔어. 아픈 건 아니고.”
“다행이네. 걱정했는데.”
테르반이 안도하며 말했다.
레이첼은 그런 그에게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곧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에드워드는요?”
“난 레이첼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서적을 좀 찾아왔어.”
“서적이라면…….”
“마수와 리코리스의 눈물에 관한 자료들. 여전히 밝혀진 바가 적긴 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까 해서.”
에드워드가 담백하게 말했다. 그 말에 놀란 레이첼이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도요?”
“응. 관심을 기울이고 책을 찾아보니까 생각보다 자료들이 있기는 하네.”
에드워드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책을 레이첼의 앞에 조심스럽게 놓아두었다.
일곱 권의 책이 테이블에 놓였다.
레이첼은 에드워드가 자신을 위해 책을 읽고 또 가져와 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가뜩이나 베르문드 공작의 제안을 거절하여 마음이 언짢았던 그녀였다.
크레온은 시간이 많으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에드워드가 도움을 주니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고마워요, 에드워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줄은 몰랐어요.”
“아니야. 널 위한 건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언젠가 꼭 답례할게요.”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좋아서 한 일이라니까.”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테르반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화기애애한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억지로 끼어 있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야겠다고 생각한 테르반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었다.
“근데 레이첼, 너 마수에 대해서 조사하는 거야?”
테르반이 운을 떼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니, 레이첼이 찾는 건 마수가 아니라 리코리스의 눈물이라는 보석이야.”
레이첼에게 물은 것이었지만, 그녀보다 먼저 대답한 것은 에드워드였다.
테르반은 그것이 못내 신경 쓰여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그것도 몰랐냐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에드워드의 말이 맞아. 리코리스의 눈물이라는 보석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어. 마탑도 그렇고, 황실 도서관도 그렇고 관련 자료들이 너무 없어서 곤란했던 참인데 에드워드가 도와준 거야.”
“나도.”
“응?”
설명이 끝나자 테르반이 즉각적으로 레이첼에게 입을 열었다.
“나도 찾아볼게.”
“테르반 네가?”
레이첼이 놀라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기 어려운 정보라며. 그런 거라면 최대한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더 빨리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나도 한번 찾아볼게.”
적극적인 태도에 레이첼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확실히 테르반의 말처럼 정보를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 그럼 도와줄래?”
“응. 얼마든지.”
테르반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레이첼에게 대답했다.
“정확히 어떤 걸 찾으면 되는 거야? 리코리스의 눈물?”
“응. 리코리스의 눈물에 관한 정보라면 뭐든지 좋아. 알아내는 게 있다면 내게 알려 줄래?”
“그렇게 할게.”
“지금 가려고?”
레이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테르반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당장이라도 리코리스의 눈물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는 듯 의욕적이었다.
“오늘은 한가하니까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알아보려고. 어차피 오늘 찾아온 것도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였는걸. 괜찮은 거 봤으니 됐어.”
레이첼은 테르반의 말에 수긍하며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오지 마. 나 먼저 가 볼 테니까.”
“응. 조심히 들어가.”
테르반이 먼저 응접실을 나가고, 응접실에는 레이첼과 에드워드만 남게 되었다.
“의욕적이네, 테르반.”
“그러게요.”
레이첼이 픽 웃으며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에드워드는 평소와 달리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레이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
낯선 표정에 레이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어떤 걸요?”
“마수와 리코리스의 눈물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나도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거든.”
레이첼은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라이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곧이어 그녀의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에드워드가 질문을 꺼냈다.
“네가 하고 있는 그 목걸이, 혹시 시간의 마수 크레온이 봉인된 목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