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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요, 산체스 공자.”
플러렛 백작 부부가 테르반을 반겼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산체스 공자야말로 잘 지냈나요?”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테르반이 넉살 좋게 웃으며 플러렛 백작 부부에게 인사했다.
“와서 앉아요. 저녁 식사 들고 갈 거죠?”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레이첼도 좋아할 거예요. 그렇지, 레이첼?”
플러렛 백작 부인이 돌아보자 레이첼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거봐요. 산체스 공자만 부담스럽지 않다면 같이 식사해요.”
“그럼 염치없지만 함께하겠습니다.”
테르반이 대답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온 건지 물어도 될까요? 보아하니 레이첼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식사를 막 시작할 즈음, 플러렛 백작이 질문했다.
평소 테르반이 플러렛 백작가를 찾는 이유는 레이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 그는 레이첼보다도 플러렛 백작 부부에게 볼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플러렛 백작은 그 점이 의아했다.
테르반과 레이첼이 아카데미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라는 걸 백작가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테르반이 이곳을 찾아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레이첼이 아닌 백작 부부에게 용건이 있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테르반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간단히 말씀을 드리자면, 최근 베르문드 공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베르문드 공작이라면…….”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어지는 질문에 테르반이 잠시 레이첼을 일별했다. 레이첼은 테르반이 부모님께 설명하는 것을 확인하며 느리게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반역을 꾀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플러렛 백작 부부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됐다.
테르반이 꺼낸 말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그럼 베르문드 공작이 황좌를 노린다는 말입니까?”
테르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플러렛 백작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중요한 건 베르문드 공작이 백작님과 부인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건 어떤 이유에서죠?”
테르반의 시선이 다시금 레이첼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플러렛 백작 부부의 시선도 덩달아 레이첼에게로 옮겨졌다.
“저 때문이에요.”
레이첼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은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문드 공작님께서 제게 협조를 바라셨는데 거절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황태자 전하의 곁에 남은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런!”
“아시다시피 레이첼이…… 마탑주 후보로 거론될 만큼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 보니 베르문드 공작 측에서도 레이첼이 이번 일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백작님과 부인께 손을 뻗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테르반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레이첼은 미리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짧은 시간 동안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낸 그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다.
“그래서 저희 공작가에서 백작님과 부인을 호위하기 위해 기사들을 파견하려 하는데 괜찮으실지요.”
“일단은 우리도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겠습니까?”
플러렛 백작이 테르반에게 말했다.
타 귀족 가문의 기사에게 호위를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가 고민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테르반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편하게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요. 생각해 줘서.”
용건을 마친 이후로 식사가 이어졌다.
가볍게 근황을 묻는 것부터 사소한 가십까지.
테르반과 레이첼은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은 불편함을 서로가 모를 리 없었다.
“레이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니?”
식사를 모두 마쳤을 때, 플러렛 백작이 레이첼에게 물었다.
“네, 아버지. 괜찮아요.”
그녀가 수긍하자 엷게 미소를 지은 백작이 고개를 돌려 테르반을 보았다.
“산체스 공자, 잠시 기다려 주겠습니까?”
“예.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대화 나누고 오십시오.”
“미안합니다, 산체스 공자. 하인이 쉴 곳으로 안내를 해 줄 테니 거기서 차라도 들고 있는 게 좋겠군요.”
“배려 감사합니다.”
테르반이 웃으며 대답하자 플러렛 백작은 곧 레이첼과 백작 부인을 데리고 식당에서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니? 산체스 공자의 말이 맞는 거니?”
근처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에 들어온 플러렛 백작이 레이첼에게 물었다.
“테르반의 말대로예요. 타 가문의 기사를 호위로 두는 게 찜찜하실 거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베르문드 공작님께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당분간은 테르반의 제안대로 산체스 공작가의 기사들을 받아 호위로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레이첼의 말에 플러렛 백작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우리에게 산체스 공작가의 호위까지 필요할 정도라면 에리카는요?”
플러렛 백작 부인이 물었다. 깊은 걱정이 그녀의 얼굴에 묻어나고 있었다.
“아카데미라면 보안으로 문제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그쪽으로도 호위 기사를 파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적어도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요.”
레이첼이 제안했다.
부모님만큼이나 레이첼이 걱정하는 것은 어린 동생인 에리카의 안위였다.
“그게 좋겠구나. 일단 우리 가문의 기사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를 레이첼, 너에게 붙이고.”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아시잖아요. 제가 어느 정도의 마법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요. 기사는 저보다는 혼자 있을 에리카에게 보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레이첼이 손사래 치며 말하자 백작 부인이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래. 일단 에리카에게 기사를 보내자꾸나.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호위를 안 붙일 수 없구나. 네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널 걱정해서 그런 거니 이건 이해해 주렴.”
“알아요, 아버지.”
“그리고 되도록 저택 밖으로 나가는 건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걱정을 담은 목소리에 레이첼이 망설이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플러렛 백작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노력은 하겠지만,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레이첼, 네가 위험할지도 몰라.”
“토벌대에 널 보내 놓고 우리가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알고 있니?”
부모님의 걱정을 레이첼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저는 생각보다 더 강해요. 그러니까 저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단호한 레이첼의 모습에 백작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의 말로는 딸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널 붙잡는 건 무리겠지. 그래, 레이첼. 대신 다치지 마렴. 우리를 봐서라도.”
“네, 그럴게요.”
플러렛 백작 부부가 레이첼을 끌어안았다.
레이첼은 따듯하고 다정한 두 사람의 품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전의 시간선에서도, 그리고 그 전의 시간선에서도.
레이첼의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 역시 이를 알고 있었지만, 테르반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부모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시간을 역행해 왔다.
크레온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선행되어야 했다.
레이첼은 그때까지 의무감에 젖어 망설임 없이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음 시간선으로 역행해 왔다.
그럼 그 전 시간선에서 자신의 죽음을 감당하는 건 언제나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을 터였다.
레이첼의 부모님, 동생, 그리고 친구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레이첼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딸의 죽음을 눈앞에서 맞이해야 했을 다른 시간선의 부모님께 전달하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플러렛 백작은 레이첼의 뜬금없는 사과에 잠시 고개를 들어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짐작 가는 바가 없는 듯이 보이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레이첼.”
플러렛 백작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백작 부인은 말없이 레이첼의 등을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 * *
레이첼과 대화를 마친 백작이 테르반이 쉬고 있는 메인 응접실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말씀은 나누셨나요?”
테르반이 플러렛 백작과 레이첼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산체스 공자, 공자가 제안한 대로 한동안은 호위를 부탁드리지요.”
“예. 알겠습니다. 최고의 정예를 꾸려 호위를 맡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테르반이 안도한 듯 미소 지으며 플러렛 백작에게 약속했다.
떠나는 테르반을 배웅하는 건 레이첼의 몫이었다.
“그럼 가 볼게, 레이첼. 기사는 내일 아침 중으로 보내도록 할게.”
“고마워, 생각해 줘서.”
“아냐. 너와 너희 가족을 위한 일이잖아. 그리고 너도 조심해.”
“……응.”
레이첼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테르반이 마차에 올랐다.
레이첼은 산체스 공작가의 마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