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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황성에 도착하자 테르반이 레이첼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자신에게로 내밀어진 손을 확인하고 테르반에게 시선을 주었다.
“호의야. 그냥 호의. 친구에게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레이첼이 그의 손을 외면하고 내려서려 하자 테르반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 멈칫거렸던 그녀가 그 말에 수긍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내려섰다.
그러나 내려서자마자 곧장 손을 놓았다.
테르반은 손을 내려다보다 이내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올 거야?”
레이첼이 테르반에게 물었다.
그가 황실 기사단 건물이 아닌 자신의 연구실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는 것까지만 확인할게. 걱정돼서 그래.”
“너도 알잖아. 내가 알려진 것보다 더.”
“알아. 전혀 다른 종류의 마법 스펠을 다섯 개까지 메모라이즈할 수 있는 거.”
“…….”
“그렇다고 해서 네가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베르문드 공작이 어떻게 널 노릴지 모르는 상황이고.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호위 없이 다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테르반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레이첼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도 호위는 있어.”
레이첼이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기사들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기사 명가인 산체스 공작가의 후계자 테르반에게 부족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레이첼을 호위하는 기사들 역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불만스럽게 들리는 그녀의 말에 테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 하지만 두 명뿐인 게 문제지.”
“…….”
“일단 잘 들어가는지만 확인할게. 괜찮지?”
“……알았어.”
고집을 부리는 테르반을 막을 이유가 없었기에 레이첼은 결국 그의 말에 순응했다.
어차피 연구실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연구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레이첼이 선을 그은 이후로는 테르반도 그녀에게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고 있었다.
테르반이 그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은 것 같기는 했지만, 레이첼은 그의 기분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차피 연구실 앞에 도착하면 돌아갈 테니 그때까지 그를 외면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계단에 올라 막 연구실 앞을 확인했을 때, 두 사람은 뜻밖의 상황을 맞닥트리게 되었다.
눈에 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바로 베르문드 공작의 수행원들이었다.
테르반이 고개를 돌려 레이첼을 보았다.
“약속, 되어 있었던 거야?”
그가 기억하기로 레이첼이 황성으로 향한 이유는 라이언과 만나기 위함이었다.
라이언을 만나 베르문드 공작의 동태를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녀의 연구실에 베르문드 공작이 먼저 와 있는 듯했다.
레이첼은 잠시 테르반을 일별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불청객이라는 소리군.”
“응.”
레이첼이 미간을 찡그렸다.
베르문드 공작이 슬슬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가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레이첼, 괜찮으면 연구실 안까지 같이 들어가도 될까? 아무래도 너 혼자 들어가게 두는 건 영 마음이 불편해서.”
테르반이 물었다.
“그렇게 해.”
어차피 테르반에게 시간의 마수 크레온과 계약한 사실까지 들킨 마당에 그녀가 더 숨길 것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르문드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를 대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이 연구실 앞에 도착하자 베르문드 공작가의 수행원들이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잠시 시선만 주었던 두 사람이 곧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군요.”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한 베르문드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반겼다.
마치 레이첼의 연구실이 제 방인 양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레이첼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제 연구실에서 뭐 하고 계신 거죠?”
레이첼의 말투가 절로 까칠해졌다.
아무리 공작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연구실에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플러렛. 찾아왔는데 안 계시기에 일단 실례를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별도로 문단속해 두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 점은 조심해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레이첼이 구겨진 인상을 펴지 않고 베르문드 공작을 노려보았다.
레이첼이 연구실을 비울 때마다 카트린이 빠짐없이 문단속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가 조금 더 강경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그녀였다.
“문이 열려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설령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다니 무례하시군요.”
레이첼도 물러서지 않고 베르문드 공작에게 따지듯 말했다.
공작은 까칠한 레이첼의 태도에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실 줄은 몰랐군요. 정식으로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플러렛.”
그는 레이첼을 일부러 약 올리고 있었다. 인상을 쓰는 레이첼과 달리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베르문드 공작의 여유로움이 더욱 부각되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르반이 레이첼을 지키듯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몰랐다는 말씀으로 끝날 일이 아니군요. 베르문드 공작님께서 이런 물의를 일으키시다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베르문드 공작의 시선이 테르반에게로 옮겨 갔다.
“제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정말 선의로 찾아온 건데 이리도 매도하다니. 레이디 플러렛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빙긋 웃으며 답한 베르문드 공작이 레이첼을 돌아보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이디 플러렛.”
베르문드 공작이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첼이 티 나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아니에요. 기왕 오신 거 차라도 대접해 드리죠.”
“레이첼!”
레이첼이 베르문드 공작을 붙잡자 테르반이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르반은 베르문드 공작과 레이첼이 대립하는 상황이니 최대한 접촉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레이첼의 생각은 달랐다.
레이첼은 습격 사건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베르문드 공작을 만나 대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그가 직접 찾아왔으니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베르문드 공작이 자신의 연구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은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개인감정보다도 앞으로의 일이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
“괜찮겠습니까?”
베르문드 공작이 웃으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테르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레이첼도 이를 느끼고 테르반을 일별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앉으시죠.”
레이첼이 테르반을 지나쳐 한쪽에 마련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문드 공작이 테르반을 향해 짙게 웃어 보인 후 곧장 몸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그러고는 레이첼과 동시에 소파에 앉았다.
레이첼은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이 영 불쾌했지만, 자신이 차를 마시고 가라 제안한 것인 만큼 그에게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멍하니 서 있는 테르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테르반, 이대로 갈 거야? 아니면 너도 차라도 한 잔 하고 갈래?”
“…….”
레이첼이 평이한 어조로 제안했다.
마치 평소 그에게 차를 권하는 듯한 말투였다.
테르반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레이첼을 보았다.
베르문드 공작이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그리고 또 어떤 생각으로 비어 있던 레이첼의 연구실에 침입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태연히 공작과 차를 마신다고 하는 게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됐다.
오히려 그를 쫓아내도 모자라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은 거기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레이첼이 그의 결정을 재촉하듯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생각 없으면 돌아가도 돼. 너도 일정 있을 테니까.”
테르반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베르문드 공작과 레이첼을 단둘이 놔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자리를 비웠다가 레이첼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벌어졌다가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같이 마실게.”
테르반이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반은 곧 레이첼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 베르문드 공작의 시선이 끈질기게 테르반을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