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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악!”
베르문드 공작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레이첼은 론펠론과 에트나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흘긋 베르문드 공작의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멀지 않은 곳에 베르문드 공작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목으로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은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는 현저히 다른 냉정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베르문드 공작이라고 하더라도 라이언과 테르반 두 사람의 협공에는 당해 내지 못했다.
혹시나 라이언과 테르반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레이첼은 속으로 적잖이 안도했다.
병사들은 라이언이 베르문드 공작을 제압한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병사들이 포박하고 난 후에야 라이언이 공작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회수했다.
“산체스 공자, 이 뒷일은 그대에게 맡기지.”
테르반이 고개를 들어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불응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는 곧 라이언의 지시에 순응했다.
“알겠습니다.”
테르반이 베르문드 공작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돌발 행동을 하더라도 그가 막아내려는 듯 레이첼 쪽에 완전히 등을 보이고 섰다.
라이언은 그런 테르반을 잠시 주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긴 라이언이 레이첼의 곁에 섰다. 그러고는 다시 검을 들었다.
그의 검 끝이 에트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 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레이첼.”
라이언이 낮은 음색으로 레이첼을 불렀다.
레이첼과 에드워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라이언을 향했다.
“호위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부디 무사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더라도 라이언은 레이첼과 대립하는 에트나를 막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사특한 마기가 에트나의 주변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건 마법에 문외한인 라이언이 보더라도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자도 마수의 계약자예요. 저자가 리코리스의 눈물을 만들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해요. 만일 리코리스의 눈물이 완성된다면 마수와 겨루게 될 거예요.”
레이첼의 말이 끝나자 라이언이 검을 고쳐 쥐었다.
에드워드는 잠깐의 짬을 이용해 마법 스펠을 메모라이즈해 두었다.
[재미있군. 하찮은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네가 유리해지지는 않을 텐데.]
론펠론이 비웃는 것과 동시에 에트나의 몸을 조종했다.
에트나가 한쪽 팔을 벌리자 그녀의 손끝에 어렸던 마력이 그들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라이언은 검에 마나를 담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쇄도하는 마력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겅!
검이 마력탄을 베자 귀가 아릴 정도의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라이언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조심하세요!”
신체 강화와 속도 증가 마법을 스스로에게 다시 부여한 레이첼이 빠르게 라이언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라이언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둘로 갈라졌던 마력탄을 향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불쑥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둘로 갈라졌던 마력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레이첼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라이언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레이첼은 볼 수 있었다.
에트나에게서 쏘아져 나온 무형의 존재가 라이언을 향해 입을 벌리던 그 모습을.
아마도 그것이 식탐의 마수 론펠론의 모습인 듯했다.
“방금 그게 무슨…….”
라이언 또한 자신을 향해 덤벼들던 무형의 존재를 알아차렸기에 놀라며 입을 더듬거렸다.
“식탐의 마수 론펠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마수의 힘이에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라이언에게 경고한 레이첼이 에드워드를 일별했다.
“에드워드, 라이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 주세요.”
“레이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레이첼의 판단에 당황한 라이언이 그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라이언의 역할이 중요해요. 우리 중에서 검을 다룰 수 있는 건 라이언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여기서는 라이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좋아요.”
레이첼이 단호하게 말하자 라이언이 멈칫거렸다.
“방금 그 힘을 봤다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론펠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저로서는 론펠론의 속도를 피하는 게 한계일 것 같아요. 그러니 라이언이 공격의 중심이 되어야 해요.”
라이언은 레이첼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레이첼과 에드워드가 보조하는 사이에 라이언이 에트나와 론펠론을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기척을 느꼈다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 늦습니다. 방금만 해도 위험했으니 말이죠.”
문제는 바로 론펠론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레이첼이 굳은 표정으로 에트나의 주변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까만 털의 멧돼지 형상이 힘없이 늘어진 에트나의 주변에 서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저게…….’
[맞아. 론펠론이야. 아직 완전히 봉인이 풀린 건 아니지만 계약자의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쓰는 탓에 외부에 형태를 갖추었군.]
레이첼의 생각을 확인시켜주듯 크레온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태가 더욱 선명해질 거야. 나중에는 네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에게도 모습이 보이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 그러니 그가 형체를 갖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아.]
레이첼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제 눈에는 보여요.”
“그게 정말입니까?”
라이언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레이첼을 돌아보았다.
레이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를 알려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중요해요. 론펠론이 외부에도 보일 정도로 형태를 갖기 시작하면 당해내기 어려울 거예요.”
“……알겠습니다.”
라이언이 수긍하며 칼끝을 위로했다.
에드워드가 레이첼의 부탁대로 라이언의 주변으로 배리어를 형성했다.
그러는 사이 론펠론이 두 사람 사이로 빠르게 도약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어요!”
레이첼이 말을 마치며 옆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라이언 역시 레이첼의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옆으로 회피했다.
그들이 있단 자리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크게 파였다. 어찌나 깊게 파였는지 바닥이 꺼지고 아래층 파티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론펠론에게 맞았다면 사지를 멀쩡히 보존하기는 글렀을 터였다.
그러나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론펠론이 다시금 라이언을 향해 맴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라이언, 그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라이언도 론펠론의 기척을 감지했다.
상체를 낮춘 라이언이 빠르게 쇄도해 오는 론펠론을 추적했다.
기척뿐이었지만, 그처럼 큰 존재감을 모를 수가 없었다.
라이언은 론펠론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다가 이내 론펠론의 위로 몸을 굴렸다.
[크악!]
라이언이 론펠론의 위를 지나치며 검으로 그의 등을 세게 베어냈다.
그 탓에 론펠론이 고통을 호소하며 커다랗게 비명을 내질렀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찢어지는 고음이었다.
라이언은 보이지 않는 론펠론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금세 감을 잡았는지 론펠론을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론펠론이 재빠르게 바닥을 굴러 라이언의 검을 피해냈다.
그러는 사이 레이첼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에트나를 향해 달려갔다.
들고 있던 단도를 고쳐 쥔 레이첼이 에트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깡!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휘두른 칼날은 무언가에 막힌 듯 에트나의 몸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익숙한 마법이 에트나의 주변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리어?’
레이첼의 칼을 막은 건 방어 마법인 배리어였다.
마나의 형질이 론펠론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보아하니 라이언을 향해 돌진하기 전에 이미 에트나를 보호할 조치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레이첼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에트나의 상태를 살폈다.
투명한 배리어가 에트나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고, 에트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반쯤 삼켰군.]
크레온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전에 마수마다 리코리스의 눈물을 만드는 법이 다르다고 했지?]
레이첼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론펠론의 방식은 계약자의 영혼을 잡아먹는 식이야. 지금처럼. 하지만 우리 때문에 완전히 계약자를 먹어 치우지는 못했군. 그렇다면 이쪽에도 승산은 있어.]
크레온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이 검에 마나를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검을 수련한 이들이 마나소드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차곡차곡 축적시키듯 쌓인 마나가 그녀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레이첼은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며 에트나의 몸을 감싸고 있는 배리어를 확인했다.
뒤에서 라이언과 론펠론이 각축을 벌이는 소리가 났다.
레이첼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한 후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나가 응축된 칼날이 마치 종잇장을 베듯 에트나를 감싼 베리어를 베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