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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위로 형성되었던 마력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이언과 테르반, 그리고 에드워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당황한 눈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력탄이 소멸된 것과 레이첼의 몸에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 듯했다.
“…….”
레이첼의 입이 열리며 짙은 마력이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왈칵, 피를 토해 냈다.
“레이첼!”
주시하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불렀다.
“…….”
레이첼이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음성이 너무 작아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라이언이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레이첼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력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물들었던 레이첼의 눈도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으로 인해 허공에 휘날리던 머리칼 역시 조금 전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마침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레이첼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그녀가 팔을 들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그러고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레이첼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고마워, 크레온.’
정신을 추스른 레이첼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크레온에게 감사를 전하는 일이었다.
조금 전 레이첼의 위로 피어난 마력탄을 제거한 것은 크레온의 힘이었다.
봉인으로 인해 온전히 힘을 사용하지는 못하더라도 레이첼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계약자인 레이첼의 몸에 가는 부담이 컸다.
론펠론의 경우에는 외부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계약자인 에트나의 영혼을 반쯤 집어삼켰을 정도였다.
[……천만에.]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크레온은 대답하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레이첼은 힘없는 크레온의 목소리에 쓰게 웃었다.
레이첼도 크레온이 자신에게 개입한 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결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크레온이 아니었다면 레이첼은 무수히 생성된 론펠론의 마력탄에 맞아 눈을 감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레이첼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숨에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났다.
“에트나, 정신 차려.”
혀로 입술을 축인 레이첼이 에트나를 향해 말했다.
에트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론펠론 또한 마력탄의 소멸로 인해 타격이 큰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에트나도 론펠론의 영향력에서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멀리서 론펠론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신 이대로면 죽어. 알아?”
레이첼의 말에 에트나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에트나의 표정에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그녀의 목적은 론펠론과 마찬가지로 자신 대신 레이첼을 희생하여 리코리스의 눈물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죽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계획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레이첼을 희생시키는 것에 실패했고, 론펠론은 대신 에트나를 희생시키기로 했다.
이미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레이첼은 겁에 질린 에트나를 향해 반걸음 다가갔다.
레이첼이 접근하는 이유를 뭐라고 착각한 건지 에트나가 덜덜 떨며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세요.”
에트나가 두 손을 모아 레이첼에게 빌었다.
걸음을 옮기던 레이첼이 반사적으로 자리에 멈추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난.”
레이첼이 다시금 입을 열었으나 말을 채 끝마칠 수 없었다.
“론펠론, 제발, 으으. 제발…….”
두려움에 잠긴 에트나가 몸을 낮게 옹송그린 채로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그녀가 정신을 차리길 바랐으나, 지금 이대로라면 그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듯했다.
그럼에도 레이첼이 다시금 에트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조심해!]
크레온이 먼저 론펠론의 기운을 감지하고 레이첼에게 소리쳤다.
등허리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 감각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레이첼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사특한 기운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레이첼?”
바닥에 구르는 그녀를 두 손으로 받아 낸 라이언이 상태를 살폈다.
레이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급히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를 확인했다.
그녀가 있던 곳에는 까맣고 커다란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레이첼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론펠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는지도 금세 알아차렸다.
“……!”
[…….]
론펠론은 에트나의 남은 영혼을 뜯어먹고 있었다.
론펠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에트나가 그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레이첼의 눈에는 에트나에게서 영혼을 탐하는 론펠론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레이첼, 어서 막아!]
먼저 상황 파악을 마친 크레온이 크게 외쳤다.
그제야 레이첼 역시 정신을 차리고 라이언의 품에서 벗어나 론펠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라이언도 그런 레이첼을 따랐다.
마나를 둘러싼 레이첼의 검날이 론펠론의 등을 세게 찔렀다.
[크아악!]
론펠론의 비명이 귀를 찢을 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기존까지는 론펠론의 목소리를 레이첼만 들을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에 혹시나 론펠론을 해치운 건가 싶었던 희망이 싹을 틔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나를 압축해 검날을 날카롭게 만들었음에도 좀처럼 단도가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레이첼이 다시 힘을 줄 때였다.
레이첼의 뒤로 달려온 라이언이 그녀의 손을 감싸듯 잡았다.
그러더니 함께 손에 힘을 주었다.
라이언과 레이첼의 힘이 합쳐졌다.
론펠론이 고통을 호소하며 발버둥을 쳤으나, 이미 박혀 들어간 칼날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되는데……!]
칼날이 까만 론펠론의 등을 갈랐다.
절망 어린 절규를 쏟아 낸 론펠론의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론펠론의 모습이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론펠론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레이첼이 풀썩 주저앉았다.
라이언은 혹시나 레이첼이 다칠까 싶어 그녀가 바닥에 앉기 전에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다쳤습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라이언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힘이 풀려서요.”
긴 숨을 내쉰 레이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끝난 겁니까?”
론펠론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라이언이라고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첼처럼 선명히 론펠론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기에 그녀에게 확답을 구했다.
“네, 아마도.”
레이첼이 긍정하자 라이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네, 정말로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후에야 테르반과 에드워드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당장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라이언에게 기대어 있는 레이첼이 거짓말처럼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과도한 힘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그들로서는 알 길이 요원했다.
대신 라이언은 레이첼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뒤처리를 부탁하지.”
라이언의 시선이 테르반과 에드워드를 향했다.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이 교차했다.
라이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레이첼을 데리고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애초에 레이첼이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황실 병사들이 빠르게 베르문드 공작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황실 병사들과 맞닥뜨리게 된 베르문드 공작가의 사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수세에 몰렸고, 이를 지휘하던 라이언과 테르반, 그리고 에드워드가 레이첼을 구하기 위해 베르문드 공작가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던 것이었다.
베르문드 공작 역시 이미 포박된 이후였으니 정리라고 할 것은 거의 없었다.
라이언이 레이첼을 데리고 집무실을 떠나고, 테르반이 포박된 공작을 끌고 집무실을 나갔다.
에드워드는 한숨 돌리며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이첼과 대립했던 에트나의 시신 근처를 확인했다.
“이건…….”
에드워드가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주워 들었다.
투명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목걸이가 레이첼이 찾던 리코리스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목걸이를 잘 챙긴 에드워드가 이내 집무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