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 22화 여기가 어디오
내려꽂힌 벼락에 의해 한순간 눈이 먼 시호가 상황을 파악 못하고 뒷걸음질 친 순간.
그녀는 자기 목에서 온 충격에 '컥'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몸이 공중으로 떠지며 부유감이 들었다.
그녀가 서서히 돌아오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에는 전신에서 전류를 흘리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본 적 없는 군복 바지와 민소매, 장갑, 그리고 짙은 청색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한국인이 아님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Эта женщина права?(이 여자인가?)”
러시아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네, 맞슴다. 죽이면 안 되니까 잘 붙들고 계셔 주십쇼.”
그 말을 하곤 남성은 미소와 함께 소녀의 앞에 다가와 섰다.
눈이 보이지 않는 듯하였지만, 그는 소녀의 주위를 가볍게 돌며 무언가 확인하는 듯했다.
“이야, 한국에서 이런 헌터가 태어나다니 진귀한 일임다. S급 공간계 능력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말임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S급 공간계 능력자.
그 말을 듣자마자 소녀는 움찔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하시호.
S급 헌터 설산 이리 하서호의 동생이자.
급수를 속인 S급 공간계 능력자였다.
아니, 사실 급수를 속인 것은 아니다.
모종의 사유 때문에 그녀가 낼 수 있는 출력이 A급밖에 되지 않기에 측정에서 그렇게 나왔을 뿐이니까.
“너희들 누구, 야.”
시호가 질문을 던진 순간 그녀를 잡은 멱살에 힘이 들어갔다.
시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남성은 그녀의 볼을 손으로 내려쳤다.
짝!
입안을 깨물었는지 시호의 입에서 핏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시호의 두 눈이 흔들리고 남성은 태연하게 자신이 내려친 볼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질문은 이쪽만 한다. 나올 것은 오직 대답뿐. 당신의 힘이 필요하니 저희한테 협조 좀 해주셔야 하겠슴다.”
시호의 부릅뜬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폭력 앞에서도 조금도 꺾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남성에게 더욱 가학적인 모습을 띠게 만들었다.
“아, 아쉽슴다. 제가 보이는 게 달랐으면 그 표정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시호는 자신의 볼을 훑는 그의 손가락이 마치 개미가 기는 것 같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남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옆 머리카락까지 갔던 손을 떼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공간 능력을 계속 쓰고 있는 검까?”
그 말을 듣자마자 시호의 얼굴이 굳었다.
이 남자 공간계 능력자다.
그것도 상당한.
시호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검은색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웃음 지었다.
“아하하, 답하기 싫슴까? 그럼 뭐 상관 없슴다. 제가 능력을 취소시킬 테니까.”
“아, 안돼!”
그 말을 듣자마자 시호는 비명을 내질렀다.
멱살이 잡힌 상태로 파르르 몸을 떠는 그녀는 뺨을 맞았을 때보다 더한 공포에 빠진 듯하였다.
하지만 남성은 오히려 즐겁다는 양 웃기 시작했다.
“당신의 힘이 꼭 좀 필요해서 말임다. 협조적으로 나와주셨으면 함다.”
그 말과 함께 남성이 뻗은 손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공간을 넘어 자기 능력에 침투하려는 것을 알고 시호는 발버둥 치려 했다.
꽈아악!
그러나 그녀가 반항하려 하자마자 러시아 군인 여성의 손이 그녀의 멱살을 더더욱 강하게 쥐었다.
턱하고 숨이 막히며 의식이 희미해졌다.
안된다.
이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시호가 악착같이 정신을 잡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신은 언제나 그대의 곁에서 눈을 감고 소리 내어 우시니. 그대들 또한 그 울음을 같이 하리라.”
불어온 여름 바람을 타고 한 여성의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성서를 낭독하듯 성스럽게까지 느껴진 목소리였다.
“푸학?!”
그리고 그 순간 시호의 곁에 있던 두사람이 피눈물을 쏟으며 비틀거렸다.
무언가 강렬한 충격을 받았는지 그들의 몸이 거칠게 떨렸고 덕분에 시호는 멱살에서 풀려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켈록, 켈록!”
시호가 입에서 기침을 토해내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몸에 부유감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흠칫한 시호가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자신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달리는 남성이 있었다.
그는 시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다, 담당자님.”
시호의 부름에 그녀의 담당자 하찬은 대답하지 않고 산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어떻게 그가 여기 있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시호는 그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설마 자신을 찾아온 걸까.
이 한여름에 숲을 뒤지면서.
어째서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하루 만에 만들어진 관계고, 고작해야 담당자로서의 관계다.
자신이 문제 되면 그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곤 하나, 이건 회사가 끝난 이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그런 의문을 품는 동안 하찬은 발을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르지아에게 충고로 들었던 최소 거리를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달리기 속도는 50m 기준 8.5초.
산행임을 감안해도 안 넘어진 게 용할 정도로 내달렸으니 10초가 지난 시점에서 50m가 됐을 것이다.
오르지아에게 부탁받은 거리는 30m.
안전을 대비한 50m를 넘은 시점에서 하찬은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오르지아 씨!”
그리고 그의 목이 터져라 울린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
새까만 검은색의 촉수 다발이 하늘 위에서 쏟아지고 검은 번개가 치솟았다.
귀환자 오르지아가 본격적인 전투로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7
쾅쾅쾅!
일반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푸른색 번개와 그걸 휘감는 새까만 촉수의 싸움은 멀리서 보기에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눈 담을 겨를이 없었다.
일단 당장 여기서 어떻게든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귀환자끼리의 싸움에서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걸 거의 없다.
하물며 오르지아와 천마 천홍련 때의 싸움도 아니고 오직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투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까 그 귀환자들이 뭔지는 몰라도.’
그들은 시호를 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시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만 했다.
지금도 내 품에 안겨 맞은 볼이 새빨갛게 물든 시호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안고 보니 알겠다.
시호는 정말로 작았다.
그리고 아직 너무 어렸다.
19살이라는 나이는 곧 성인을 앞둔 나이였지만 그녀는 아직 사회에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이런 아이를 노린 그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나는 화가 나는 기분을 느꼈다.
“담당자님, 내려 주세요.”
“네? 시, 호양! 아직, 위험, 해요!”
달리는 와중이었기에 나는 턱까지 오른 숨을 겨우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저 공간계 능력자에요.”
맞다.
상황이 급해서 깜빡했다.
그녀의 힘을 빌리면 여기서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괜, 찮겠어요?”
“저 하시호에요.”
그건 잘 안다만.
뭔지는 몰라도 내가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려 주자 그녀는 땅을 턱 하니 밟았다.
“아.”
그러자 시호가 바로 비틀거렸고, 나는 당황해서 급히 그녀를 받아 주었다.
조금 전에 이 작은 몸으로 그런 폭력을 당한 그녀다.
당연히 후유증이 있을 수밖에.
“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듯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내 부축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이동할게요.”
그리 말하자마자 우리 시야가 휙 하니 바뀌었다.
갑작스레 바뀐 시야와 함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나는 갑자기 몸에 부유감이 느껴짐을 깨달았다.
어라?
지금 우리 추락하고 있지 않나?
“시, 시호양?!”
“어?”
내가 놀라 소리를 내지르자 시호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내가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한참 떨어진 도심 풍경이 보였고, 우리가 상당한 상공으로 공간 이동했음을 깨달았다.
“이, 이게 왜.”
시호 쪽도 뜻하는 바가 아니었는 듯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당황하면 죽도 밥도 안된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아 당기고는 외쳤다.
“한 번 더 이동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상태가 불안정한 건 눈치챘다.
그러나 상공에서 추락하면 즉사 말고는 피할 수 없었다.
시호는 내 팔을 붙잡은 채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금 공간 이동을 발동시켰다.
또 한 번 시야가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숨이 턱 하니 막히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입과 코 쪽으로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물 때문이었다.
밤이어서 그런지 물속임에도 너무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
아니다.
이 짠맛.
바다다!
“우우웁!”
나는 억지로 숨을 틀어막으며 시호를 품 안으로 당겼다.
바다 어느 지점인지는 몰라도 파도가 나와 그녀를 쓸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호 쪽도 많이 당황한 듯 그녀는 물속에서 버둥거리다가 다시금 공간 이동을 발동시켰다.
쿠당탕!
그리고 그제야 나는 땅 위를 한바탕 구를 수 있었다.
등에서 오는 통증이 아릿한 게 조금 위에서 떨어진 모양이었지만 다행히 까마득한 상공도 바다도 아니었다.
바닷물에 푹 젖은 몸이 정신을 쏙 빼놓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급히 시호부터 살폈다.
“켈록, 켈록.”
내 품에서 바닷물을 연신 내뱉고 있는 시호는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내가 서둘러 그녀의 등을 두드리자 한참 기침하던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대체 왜.”
연이은 공간 이동의 실패 때문일까.
그녀의 눈에는 짙은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내 추측으로는 큰일을 당한 충격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다른 게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 그 남자.”
무언가 떠오른 듯 시호가 꽉 하고 모래 묻은 주먹을 쥐었다.
그걸 보던 나는 문뜩 모래와 함께 귓가로 스치듯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다로 이동된 만큼 아무래도 근처 해변가로 이동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서울이었으니 인천 쪽이려나.
그런데 왜 등 뒤가 왜 이리 밝은 느낌이지.
이상함을 느낀 내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나는 야자수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깜빡이었다.
분명 방금까지 밤이었는데 왜 해가 떠 있지.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절대 없을 것 같은 야자수는 뭐고.
“저, 시호양, 여기가 어디인가요?”
“…….”
시호 또한 멍한 표정으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무인도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