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 62화 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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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도 며칠 흘렀다.
밤에 있었던 일 이후 은나무는 아무것도 없었던 마냥 평소와 같이 나를 대하였다.
단지, 그다음 날 어느샌가 내 침대 위에 반창고와 상처에 바르는 약 등이 올려져 있었을 뿐 그녀는 같았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녀를 평소처럼 대해 주었고, 나와 그녀는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간혹 그녀가 나를 묘한 시선으로 보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내가 돌아보면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나에게는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스토커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스토커라고 하기에는 그랬다.
스토커는 내가 서호를 좋아하냐고 물은 이후 나와 마주치면 도망치는 조시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제에 왜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그야 니가 하서호한테 말할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
“아, 그렇구나.”
그건 생각 못했네.
나는 일리가 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떡하지.”
“그 요실금 여자처럼 만들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예카테리나 두 명은 사양이다.
“그거까지 내가 어떻게 아냐. 알아서 해.”
만능 회귀자도 이런 곳에는 쓸모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대화라도 해보고 싶은데.’
조시아도 S급 헌터이다 보니 잡아 보려 해도 전력으로 도망치면 잡지도 못한다.
그렇다 보니 저쪽이 오지도 내가 잡지도 못하는 교착 상태가 되어버린 내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담당자님, 저 왔어요.”
문자를 한 시호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니 와있던 것이었다.
오늘은 일요일.
아카데미는 토요일까지도 훈련 일정이 잡혀 있으므로 일요일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시호는 내게서 그날을 전해 듣고 맞춰 찾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얼마 전에 왔는데 오랜만인 거야?”
“매일 봐도 오랜만이에요.”
시호의 말에 피식 웃은 나는 시호에게 의자를 내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반대편 의자에 앉자 시호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호를 보니 갑자기 은나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라는 그 말.
이왕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내 입으로 묻기에는 그랬다.
만약에 아니라면 앞으로 시호 얼굴을 못 본다.
‘지은이는 바로 알 수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지은이처럼 대놓고 드러내 주면 편할 텐데.
“시호.”
“응, 왜요?”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그녀가 불러준 것만으로 기쁜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확실히 시호는 첫인상과는 무척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조시아 씨라고 알아?”
일단 다른 걸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질문을 던지자 시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하서호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
시호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나.
시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조시아 씨가 지금 아카데미에 와있거든.”
“하서호 따라온 거네요.”
“그런 셈이지.”
시호는 예상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요?”
“서호가 나 때문에 아카데미에 왔잖아. 그래서 그걸 알고, 나한테 좀 관심을 가졌던 모양인데. 내 상황이 그렇잖아?”
“응, 귀환자랑 연관 있죠.”
은나무가 방을 비운 상태인 만큼 시호도 쉽게 대답했다.
귀환자 일은 외부 발설이 그러니 그녀도 설명하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나무가 조시아 씨를 좀 떨어트려 주게 하려고 내가 네 남자친구라고 해버렸어.”
“정말요?!”
그 순간 시호가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양 무릎을 잡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시호를 보니 나는 한순간 멈칫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호는 이내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무릎에서 슬쩍 손을 떼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래서 담당자님은 어떻게 했는데요.”
“미안, 나도 일단은 그냥 그렇다고 했어. 덕분에 조시아 씨도 납득 해주기는 했는데.”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시호의 행동을 살폈다.
다시 의자에 앉은 그녀의 발이 어딘가 신이 난 듯 살짝 씩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아저씨 남자친구 취급은 당연히 불쾌할 텐데 시호가 신나 하는 이유는 뭘까.
‘나를 좋아해서.’
젠장, 은나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계속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이 안 났다.
만약 시호가 진짜로 날 좋아하는 거면 미성년자가 두 명이나 날 좋아야 한다는 상황인데 솔직히 그게 현실인 게 더 이상 하잖아.
나는 최대한 진정했다.
“어쨌든 그래서 조시아 씨는 내가 서호에게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밝힐까 봐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모양이야.”
그러자 시호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을 떨어트리면 되는 거죠?”
“불편하긴 하니까. 조언 좀 얻을 수 있으면 좋긴 해.”
시호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 결심한 듯 앙증맞은 주먹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담당자님, 하서호는 원래도 여자를 썩 좋아하지 않은 거 아시나요.”
“그랬었나?”
“네, 시호는 이해 못하겠지만 여자애들이 하서호를 다들 좋아해요. 집 찾아오는 스토커도 있다 보니까 좀 꺼리는 게 있어요.”
그건 이해가 된다.
내가 여자라도 서호의 얼굴을 본다면 무심코 홀린 듯 따라가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에 그 일이 있었잖아요.”
그 일이라면 곽사연 일일 것이다.
그건 서호 입장에서는 여자한테 아예 질려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 일 때문에 하서호가 좀 걱정돼요. 저대로 여자를 아예 싫어하게 되어서 다 멀리할지도 몰라요.”
“그건, 그럴 수 있겠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동생 입장으로 봐도 오빠가 저러고 있으면 걱정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하서호가 더 심해지기 전에 조시아 언니가 하서호랑 잘 되면 어떨까 해서요.”
같은 S급 헌터에다가 고등학교 동창, 거기다가 서호는 그녀를 귀찮아하기는 해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확실히 서호를 위해서라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괜찮네.”
“그러니까 담당자님이랑 시호랑 조언하는 거예요.”
“내가? 나 연애라곤 해본 적도 없는데.”
시호는 어째서인지 주먹을 더 꽉 쥐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하서호는 시호가 잘 아니까 시호가 같이 말해주면 돼요.”
확실히 그렇게 해서 해결된다면 조시아가 내가 서호한테 말할까 싶어 걱정 안 해도 될 거고.
서호의 트라우마도 덩달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좋은 생각이네. 해보자.”
그 순간 시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럼 저 이제 담당자님 여자친구예요?”
“아, 미안, 기분 나쁘지.”
“전혀요. 시호는 좋아요.”
어라, 잠깐만 이럼…….
“와, 살다 살다 꼬맹이가 여우짓 하는 꼴을 다 보네.”
내가 백산을 힐끔 보자마자 그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거냐.
지금 이게 그렇고 그런 거?
나는 시호를 다시 돌아보았다.
순진무구한 그녀의 눈은 나와 마주치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등 뒤에서 여우 꼬리가 살랑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정말 은나무와 백산의 말이 맞는다면 나는 시호가 조금 무서워질지도 모르겠다.
‘됐다. 어차피 조시아 씨 앞에서 이러는 것뿐이고, 우선은 그냥 넘어가자.’
나는 이 일은 미래에 나에게 맡기기로 하고, 곧바로 시호와 함께 조시아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방을 나서자마자 얼마 후 그녀가 바로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유자재로 벽을 뚫고 다니는 통에 간혹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벽을 뚫고 다니는 회귀자 백산이가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위치는 금방 우리에게 들통났다.
“여 있다.”
백산이 말해주자마자 나는 시호를 향해 말했다.
“시호, 우리 뒤편 기둥 뒤에 있어.”
“응, 알았어요.”
시호는 대답하곤 내 옷깃을 잡았다.
그 순간 나와 시호의 시야가 바뀌었다.
우리가 나타난 것은 지금도 우리가 있던 방향을 보고 있는 조시아의 바로 옆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양옆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조시아 또한 우리에게 팔이 잡히고 말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 간과했다.
바로 그녀가 마음먹으면 자기 몸 일부분을 어디든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 됐네!”
그 말 한마디를 남긴 순간 시호와 내 팔이 그녀를 후웅 통과해버렸다.
그녀가 전력으로 도망치면 우리는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택할 뿐이다.
“시호! 바로 서호에게 날아간다!”
“응기앗!”
내가 그리 외치자마자 조시아가 비명과 동시에 능력을 풀었다.
나와 시호는 그걸 보자마자 재빨리 팔을 다시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했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설산이리로 협박이라니 너무 하잖아.”
“이러지 않으면 또 도망칠 거잖습니까.”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고, 시호 쪽을 보았다.
“그래서 여자친구도 데려온 거야?”
“그건…….”
“맞아요. 시호, 담당자님 여자친구예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시호가 눈을 반짝이며 선수 쳐버렸다.
그 모습을 잠깐 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러기로 했으니까.
“정말로 사귄다고?”
그렇지.
나라도 안 믿겠다.
“응, 사귀어요. 증거 보여줄까요?”
그러면서 시호는 대뜸 나에게 얼굴을 살짝 내밀곤 눈을 감았다.
수줍은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유달리 살짝 나온 분홍색 입술이 돋보이자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미안, 믿을 테니까. 내 앞에서 그러지는 말아줄래?”
차마 커플 행동을 눈 뜨고 보지는 못하겠다는 듯 조시아가 살짝 질린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시호, 그렇대.”
“…….”
시호는 슬그머니 눈을 뜨곤 조시아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둘 다 도망 안 칠 테니까 좀 놔주지 않을래?”
이래서는 대화하기도 힘들다는 듯 그녀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나는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시호도 따라 풀었다.
대신 시호는 내 옆에 다가와 내 팔을 끌어안았다.
한순간 멈칫했지만, 사귄다고 한 이상 자연스러울 거로 생각해 일단 가만히 있었다.
왜인지 시호가 자기에게 생긴 기회를 마음껏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그 생각을 지웠다.
“그래서 나를 잡은 이유는?”
“매일 같이 저 따라다니시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어드바이스 좀 드리려고요.”
“……나 따라다니던 거 걸렸었냐?”
백산이 없었다면 나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어드바이스라는 건.”
“서호한테 잘 보이는 법이죠. 서호 좋아하시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조시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녀는 휘파람을 불면서 고개를 스윽 옆으로 돌렸지만 대놓고 티가 다 났다.
그녀는 누가 봐도 서호를 좋아했으니까.
“나는, 나는 그냥 하서호랑 만든다는 팀에 들어가려는 것뿐이라고. 그런 거 아닌데.”
“그 망상 속 팀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겁니까. 그런 팀 없습니다.”
“괜히 거짓말하기는. 좀 끼워주면 어디 덧나.”
아니, 없다고.
“하서호가 왜 좋아요?”
그러자 시호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긴, 남매란 그런 법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서호는 여자들이 절대 가만둘 수 없는 매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시호에게는 그냥 서호이다.
“너는 강하찬 수강생이랑 왜 사귀는데?”
“시호 왕자님이에요.”
“왕자님?”
“시호는 왕자님 좋아해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그 말을 하고 시호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약간 붉어진 그녀의 볼을 보고 나는 그때 시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호는 동화 속 왕자님을 많이 좋아해요.」
「그래서 요즘 담당자님이 왕자님이 아닐까 하고 생각 중이에요.」
혹시 그때 했던 그 말은 그녀 나름대로 마음 표현이었을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 조시아를 납득 시키기 위해 사귀는 척을 하는 만큼 머리가 복잡했다.
그냥 시호가 지금 사귀는 척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닐까…….
“네 멍청한 뇌가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데굴데굴 들려오니까. 돌대가리 굴리지 마라.”
나는 백산에게 혼났다.
“진짜구나…….”
그 사이 조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며 대체 '어떻게'라는 의미를 담은 표정을 지었다.
보지 마라.
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