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9 - 129화 지은이의 고백
“해주려고?”
유우정이 나를 보며 물었다.
“듣고 나서.”
“그럼 섹스하자.”
“썅, 들을 가치도 없었네!”
진짜로 들을 가치도 없는 거였다.
그 순간 유우정의 모습이 사라졌다.
내가 고개를 서서히 아래로 내리자 시호가 그녀가 있던 장소에 손을 뻗은 게 보였다.
시호의 두 눈동자에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시호, 유우정을 어디로 보낸 거야?”
“저런 여자 필요 없어요.”
유우정의 취급이 날이 갈수록 박해지는군.
그러면서 시호는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 건 시호랑만 해요.”
나는 뭘 하자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시호를 달래 유우정을 데려오게 시켰다.
잠시 후 유우정이 돌아오자 그녀는 흠칫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머리와 옷에는 눈이 묻어져 있었다.
“어디 갔다 온 거냐.”
“……눈밖에 없는 산이었어. 하늘이 너무 가깝던데. 공기도 희박하고.”
나는 아주 잠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조용히 묻어 두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원하는 거 다시 말해.”
“헛소리라니 난 진짜 진심인데.”
“헛소리 영원히 못 하게 해줄까요.”
여전히 나를 끌어안고 있는 시호가 쏘아보자 유우정은 멈칫하곤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럼 데이트 한 번 더 해줘.”
“데이트?”
“저번에 그렇게 끝나 버렸는걸. 나도 준비한 거 이것저것 있었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정도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호랑도 해요.”
내가 대답하려는 순간 시호가 불쑥 말을 해왔다.
생각해보면 시호랑은 딱히 개인적으로 놀은 적은 없었나.
시호와는 워낙 한동안 고되게 지냈던 만큼 나는 시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았어. 시호, 나중에 같이 가자.”
내 대답에 시호는 기쁜 듯이 웃었다.
“……데이트 신청은 내가 했는데 왜 둘이서 데이트 성사가 되는 거야?”
그러자 유우정은 억울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너랑도 할게.”
“완전 마지못해 하는 말이네?”
“그럼 하지 마.”
“악악! 진짜 나한테만 못되게 굴고! 그게 좋은 거긴 한데! 정말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는 게 딱 맞네.”
시호가 쏘아보건 말건 투덜거리는 그녀였다.
저런 털털함이 있는 주제에 나한테 왜 저리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능력도 외모도 되는 그녀라면 다른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방법은?”
방법 하나 묻는데 참 많이도 돌아온다고 생각하며 묻자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그게 말이야…….”
그리고 그 방법은 의외로 나도 상당히 설득되는 방법이었다.
2
카페 앞 내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으니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거기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피어싱 자국 또한 언뜻 보였다.
“오빠!”
손을 열심히 흔들며 달려온 지은이는 학교를 막 마치고 와서인지 교복 차림이었다.
“왜 춥게 여기 있어요? 손 안 시려요?”
그러면서 나에게 달려온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그대로 호호하고 불어 주었다.
그 모습을 잠깐 보고 있으려니 지은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시호랑 우정 언니는요?”
“지은아, 오늘은 둘이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내 말을 듣고 지은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원래도 눈치 빠른 그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지은이는 내 손을 살짝 놓고는 자기 치맛단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중요한 이야기예요?”
“응.”
내 대답을 듣고,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춥다. 우선 안에 들어가자.”
그런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음료를 시킨 뒤 자리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은 음료가 나올 때까지도 침묵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나는 잠시동안 탁자를 두드리고 있다가 이내 지은이를 바라보았다.
“지은아.”
“네, 오빠.”
내가 부르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짝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일단 나한테 최근에 있던 일부터 말해줄게.”
그동안 지은이에게 줄곧 숨겨 왔던 여러 일들.
그건 전부 그녀는 일반 헌터니까 관계되면 좋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숨겼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배려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내가 그녀를 따돌린 셈이지 않는가.
나는 천천히 지난날의 이야기를 풀었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쭈욱 듣고 있던 지은이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최근 훈련이나 여러 일들로 이런저런 상처가 떠나지를 않았던 내 손이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매일 같이 내가 왜 그리 다쳐서 왔는지 이해한 듯하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헌터로 각성했다 해도 그렇게 능력이 폭주하나 싶어서.”
“미안해. 네가 휘말릴까 봐 숨겼었는데. 오히려 배려심이 없었어.”
“괜찮아요. 오빠도 오빠 나름대로 생각해서 해준 거잖아요. 조금 서운하긴 해도 이해 못하지는 않아요.”
지은이는 나보다도 어른스럽게 대처했다.
이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그녀다.
그런 그녀는 나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지냈었는데 나는 숨겼었으니.
그녀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해준 이유가 뭐예요?”
그 물음을 듣고 나는 내 손을 모았다.
“지은아, 앞에서 말했듯 시호나 유우정이 S급인 건 이해했지.”
“네, 유우정 언니는 잘 몰라도 시호는 예전부터 A급은 아닌 것 같긴 했었으니까요.”
그리 대답한 지은이는 시켜놓은 핫초코 잔을 잠시 매만지다 나를 바라보았다.
“저 팀에서 나가야 하는 건가요.”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 훌쩍, 오, 빠한테 방, 해 돼요?”
방울방울 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눈물을 닦아 줄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지은아, 팀을 나가라는 게 아니야. 당연히 지은이 네가 방해된 적도 없고.”
“하지만 저는 시호나 우정 언니처럼 S급이 아니잖아요. B급밖에 안 되는걸요.”
“사실 처음에는 지은이랑 맞는 새로운 팀을 하나 더 짤까 했어.”
내 말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은이도 당연히 그걸 원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맞아요. 저는 이 팀에 계속 있고 싶은걸요. 시호도 좋고, 우정 언니도 좋고, 오빠도 좋아요…….”
마지막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잠시 쓰게 웃었다.
“맞아. 우리도 다 지은이 널 좋아해. 그래서 방법을 하나 생각했어.”
“방법이요?”
지은이의 눈동자에 의문이 깃들자 나는 유우정에게 들었던 설명을 쭈욱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지은이는 꽤나 놀란 눈이었다.
“……제가 그런 게 돼요?”
“나도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봤어. 처음은 실패 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감을 잡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은이가 가장 노력해야겠지.
“그리고 유우정 쪽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한테도 자문을 좀 구해놨어. 이쪽 관련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 도와주겠다더라.”
나는 그리 말하곤 지은이를 바라보았다.
“……한번 해볼래?”
모든 건 지은이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내가 그녀의 마지막 의사를 묻자 지은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불타고 있었다.
“할래요. 저 해볼래요.”
“꽤 힘들 거야. 아이슬란드까지 가야 하니까. 학교도 빠져야 하고.”
“어차피 곧 수능도 끝나는걸요. 그때부터 사정 말하고 학교 안 나가도 선생님들 신경 안 써요. 아니, 애초에 원래 별로 신경 안 쓰기도 했구요.”
지은이는 헌터 쪽 일을 하는 것이 이미 확실시되어있다.
거기에 유튜브도 잘 되고 있다 보니 수능이 필요한 학생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지은이는 굳이 터치하지 않았다.
“학교 애들도 이제 신경 안 써요. 제가 유튜브 하는 거 알고 막 다가오긴 했는데. 이제 그런 애들 필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지은이는 무척이나 굳게 보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 또한 성장하고 있던 것이었다.
10대 아이들의 성장은 빠르다.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고, 볼 것이 많기에.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나간다.
그 사실을 체감하며 나는 미소 지었다.
“좋아. 지은이 네가 할 마음이 있다면 나도 전력으로 도울게.”
나는 그녀의 담당자니 말이다.
“그 말 하려고 오늘 둘이 보자 한 거였어요?”
그러는 순간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멈칫하였다.
내가 하려는 말은 지은이 말마따나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지은이의 미래를 위한 이야기지.
나와 그녀 사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빠도 알고 있죠. 저 하찬 오빠 좋아하는 거.”
그리고 그녀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왔다.
눈치 빠른 지은이답게 이미 내가 하려던 이야기를 진작 꿰뚫고 있었다.
“하찬 오빠가 보기에 제가 좋아하는 감정은 10대 어린애로 보이나요?”
나는 침묵했다.
실제로 그러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그녀가 더 넓은 세상으로 간다면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말이에요. 하찬 오빠가 매일 같이 꿈에 나와요. 침대에 누우면 생각나고, 밥 먹다 보면 오빠도 식사할까 궁금하고, 학교에 있어도 오빠가 보고 싶고 그래요.”
솔직한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제가 오빠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분명 옆에 있는 가장 좋은 오빠였으니까 일지도 몰라요.”
지은이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구길 만큼 꽉 쥐었다.
그녀가 내뱉는 지금 말들이 그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저는 앞으로 하찬 오빠만큼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지은이는 다시금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찬 오빠가 제 첫사랑이니까요.”
첫사랑이라는 건 원래 애달프다고 한다.
처음 해보는 것이기에 실수가 많고, 그렇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많은.
“10대의 치기 어린 사랑이어도 사랑이에요. 저는 하찬 오빠 좋아해요.”
그리고 솔직한 그 고백을 듣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지은아, 나 그렇게 괜찮은 사람 아니야.”
“저한테는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첫사랑이니까요.”
그러면서 지은이는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아, 물론 오빠 주위에 질투 날 정도로 여자가 너무 많긴 해요. 분명 제가 처음 볼 때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다들 오빠의 좋은 점을 아나 봐요.”
분명 웃고 있지만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뭘 대답하려는지 그녀도 알아서인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고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저 오빠 좋아해요. 오빠는요?”
지은이가 그리 묻자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대답했다.
“미안해.”
사과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 사과를 듣고 지은이는 눈물 젖은 얼굴로 천천히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괜찮으니까 저 오늘만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는 결국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를 잡을 수 없던 나는 천천히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내렸다.
때마침 백산이 녀석이 창문 밖 벽에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지은이와 내 일이라고 생각하여 엿듣지 않고 굳이 밖에서 기다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백산이 쪽 세계의 지은이는 어땠을까.
아마 나와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 않았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 마음을 거절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는 조용히 곱씹었다.
그러는 순간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 저 무조건 강해질 거예요. ]
메시지를 보낸 건 다름 아닌 지은이였다.
그 메시지를 내가 보고 조금 쓰게 웃고 있으려니 또다시 메시지 하나가 더 왔다.
[ 그래서 강해진 다음 한 번 더 고백 할 거니까요. ]
이어진 말은 나를 멈칫하게 했다.
내 생각 이상으로 지은이의 의지는 강했다.
[ 그러니 저 아직 포기 안 했어요. ]
그랬던 건가.
메시지를 잠시 보던 나는 휴대폰을 내려 두었다.
내 주위에는 정말 강한 사람들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