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7 - 137화 지은이 도약
애초에 이미 한번 거절당한 시점에서 지은이는 그렇게라도 하찬의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그렇지?”
시호가 되묻자 지은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시호도 한 가지는 절대로 양보 못 해.”
지은이는 그런 시호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부인은 시호가 될 거야.”
첫 번째 부인.
그것만큼은 절대로 양보 못 한다는 듯 시호가 의지를 태우는 것을 보고 지은이는 얼굴을 굳혔다.
시호의 얼굴을 보니 왜인지 자신도 그 자리만큼은 가지고 싶다는 생각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는 어떻게 정하기로 했는데?”
그렇지만 두 언니도 절대로 양보 안 할 게 분명하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지은이가 묻자 시호는 자기 배를 살짝 감쌌다.
“담당자님 아이를 먼저 가지는 사람.”
그 말을 듣고 지은이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엇, 읏, 시, 시호, 그건.”
“지은이는 담당자님 아기 싫어?”
“그거야.”
지은이는 하찬의 아이를 떠올렸다.
분명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겠지.
아들이든 딸이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줄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좋아. 하찬 오빠가 원하면 몇 명이든.”
“그렇지?”
지은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대답했다.
시호는 그런 지은이를 보곤 말했다.
“시호도 이건 양보 못하니까. 지은이도 알아둬.”
시호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지은이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주먹은 그녀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겨울, 곧 성인을 앞둔 두 여고생은 하찬이 알면 목덜미를 잡을 이야기를 그렇게 끝마쳤다.
11
하루 뒤 우리는 아이슬란드에서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이번에 벌어진 일에 관해 아이슬란드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었다.
S급 헌터에 S급 귀환자라는 전력.
그러한 전력이 있는 만큼 우리의 말은 신뢰가 있었고, 랭크 외 차원종을 죽인 것에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한국 헌터 관리국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즉각 대처해준 덕분에 우리는 이 일로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랭크 외 차원종은 내가 아예 싹다 날려버려 차원종 소재 물품은 전혀 구할 수 없긴 했지만.
대신 그들은 소정의 보상금을 주기로 하였다.
“짜다 짜. 그거밖에 안주고 입 싹 닦다니.”
“유우정, 랭크 외 차원종 상대로는 넌 아무것도 안 했잖아.”
“왜 이래? 나도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항의했다.
그런 것 치곤 우리 중 가장 쌩쌩하지 않은가 싶긴 하다마는.
“그리고 한 번 해주기로 한 거 기억하지?”
“말 똑바로.”
“데이트 말이에요. 데이트, 하찬 씨.”
그야 기억은 한다.
무시하고 싶긴 한데 약속 한 거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녀 덕분에 정말로 지은이가 크게 성장했으니.
부탁을 아예 못 들어줄 건 없었다.
“알았어.”
“시호도요.”
그러자 그 틈에 시호가 냉큼 튀어나왔다.
이번 일에 그녀의 노력도 아는 만큼 나는 미소 지으며 시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알았어.”
“……나랑 너무 온도 차가 다른 거 아니야?”
당연하지.
그러는 순간 나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에바 누나가 있었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을 피했다.
요즘 에바 누나가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피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 에바 누나도 데이트할래?”
그런 그녀를 보며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에바 누나가 갑자기 고개를 홱 하니 돌아왔다.
그녀의 새파란 눈이 커다랗게 떠져 있자 나는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에바 누나는 뒤늦게 자신이 한 행동을 알아차린 듯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누나?”
“그, 아, 그게, 아니라. 저희 그때 정모 저랑 오빠 때문에 이상하게 끝났잖아요.”
그녀는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서 정모 다시 하면 어떨까 해서! 개같은, 아무튼, 그, 그런 거예요!”
에바 누나는 당황해서 욕설까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눈을 깜빡이던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다음에 한 번 자리 마련해 볼게. 마침 나엑이도 난리였거든.”
나엑이 녀석은 정말로 대학에 다니는 게 의문일 정도로 매일 같이 게임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 주제에 게임에만 들어오면 ‘정모? 정모정모정모?’ 하면서 매일 같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나도 조만간 자리 하나 만들까 싶긴 했었다.
죽심에게도 물어보니 [ 고민해보겠다 합니다. ] 라고 말하긴 했고.
나엑이가 ‘내가 쳐들어가서 데려올게!’라고 신나게 말하길래 죽심이 로그아웃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에바 누나는 내 말을 듣고 그제야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를 보고 살짝 수상한 기운을 느낀 나는 더 물어보려다 참았다.
“지은, 돌아가서도 꼭 연락해.”
“응, 무조건 연락할게!”
그 사이 지은이는 사란과 이별하고 있었다.
하루 만에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대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기에서 함께 탈출 해 나온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런 사란을 보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제로니가 있었다.
나보다 좀 더 연상인 그는 인자한 얼굴의 남성이었다.
실제로 대화를 해봤을 때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유우정이 왜 그를 좋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제로니는 나에게 한차례 고개 숙여 인사를 해왔다.
혹시나 지은이와 함께 있는 금쪽이에 관해 또 문제가 있거나 하다면 연락을 주라며 연락처까지 직접 주었다.
저런 인물이니 사란이 그를 그토록 좋아하던 거겠지.
“나중에 한국에 놀러 갈게.”
“지금 미국에 있다고 했지? 나도 거기로 놀러 갈게.”
“응, 오면 같이 더블데이트하자.”
“알았어! 꼭 그렇게 하자!”
그리고 동갑내기인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며 제로니와 나는 동시에 착잡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저쪽도 고생이 많았다.
사란과 제로니가 이별하고, 우리는 시호를 통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른 국가에서 랭크 외 차원종을 쓰러트리고 온 만큼 한국 헌터 관리국에서도 조치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진소엽 씨.”
“오랜만이군요.”
진소엽 씨는 나를 보곤 아주 짧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피로감은 내가 차라 뭐라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일벨리를 사냥하며 헌터 관리국 쪽이 한바탕 뒤집혀 버린 듯하였다.
“아,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일은 우리나라의 위상을 올리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는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양 웃어 보였다.
일은 많아져도 어쨌든 이번 일이 한국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무려 뜨는 순간 바로 비상 소집인 랭크 외 차원종을 쓰러트리고 왔으니 오히려 그는 칭송받을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강하찬 씨를 보고 관리국에서도 비밀리에 하나 만들어 온 게 있습니다.”
그리 말한 그는 내게 슬쩍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그게 뭔가하고 받으니 거기에는 영롱한 빛이 나는 헌터증이 있었다.
떡하니 박혀 있는 SS급.
거기에 한국 헌터 관리국 공인을 증명하는 확실한 도장까지.
나는 그것을 받고 몸을 굳혔다.
나는 졸지에 진짜로 한국 헌터 관리국이 인정하는 SS급 헌터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순간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앞으로 헌터와 관련된 일이 생긴다면 이걸 보여주시면 될 겁니다. 가지고 계신 F급은 아무래도 활동의 제약이 생기니까요.”
“그, 이걸 보여주면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책임은 저희가 지겠습니다. 강하찬 씨도 사용하셔야 한다고 판단하실 때 사용하시면 됩니다.”
내 개인 판단에 오롯이 맡기겠다는 건가.
“관리국장님께서 강하찬 씨의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판단하셔서 건네신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결국 헌터증을 받아 범 카드 옆에 소중히 끼워 넣었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F급만 쓰도록 하자.
“그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머지 일은 저희가 다 담당 할 테니 돌아가셔서 쉬시면 됩니다.”
그는 그리 말하곤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디 그가 오늘은 딸의 얼굴을 보러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모두에게 돌아왔다.
나는 모두에게 이만 해산하자고 하였다.
다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피로할 만큼 돌아가서 쉬는 데 찬성이었다.
“하찬 오빠.”
그러던 순간 나는 지은이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뭔가 할 말이라도 더 있었던 걸까.
지은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살포시 웃더니 그대로 도약했다.
내가 아주 짧게 방심한 순간 어느새 나는 내 입술에 닿은 촉감을 느꼈다.
당황한 내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을 때 지은이는 내게서 두 걸음 멀어졌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은 살짝 물기가 젖어 있었다.
조금 전 지은이가 내게 입맞춤 했음을 깨달은 내가 굳어 있자 지은이는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포기 안하고 계속 하찬 오빠 좋아할 거예요.”
그 저돌적인 말을 듣고 내가 입술을 벙긋거리자 지은이의 눈이 여성진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세 사람 모두 다 굳은 채 지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호와 눈이 마주친 지은이는 ‘이게 내 대답이야.’라고 전했다.
아무래도 둘 다 나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한 지은이가 부끄러워졌는지 도도도 달려 가버렸다.
“이야, 하찬 씨, 고등학생한테 뽀뽀까지 받고, 좋겠다. 나도 해줄까?”
유우정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나를 보며 그리 말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려다 그녀 옆에 서있는 시호를 보았다.
시호는 서서히 몸을 떨더니 곧 눈에 살짝 물기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호는 아직이었는데. 담당자님이 먼저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거였는데.”
그런 걸 기다리고 있었나.
시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오랜 옛날에 설향에게 첫 키스를 빼앗겼고, 최근에 어른이 되어 사랑을 자각했을 때는 아유한테도 빼앗겼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만큼은 절대로 시호한테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다른 건, 다른 건 시호가 먼저예요.”
그리고 나를 홱 하니 보며 시호가 말하자 나는 몸을 굳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냥 어련히 알아서 해줄 나를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