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4 - 144화 도화에게 무림
“저는 누님과 그리 긴 시간을 보지 않았습니다.”
도화는 이 말을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듯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누님께서 보여준 표정마저 늘 무표정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너무 지쳐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아유는 본인이 말했다.
그 당시에 자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나아갈 방법 따위 모르는 상태였다고.
그리고 도화는 그러한 아유를 직접 눈앞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 누님께서 무척이나 밝게 웃고 계셨습니다.”
아유의 웃음을 떠올린 듯 도화는 착잡한 웃음을 따라 띄웠다.
“그토록 환하게 웃으시는 누님께 더 이상 무림으로 돌아와 달란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도화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혈육.
아유가 어머니를 제 손으로 베었지만 그런데도 도화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의 깊은 심성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저는 이곳이 누님께서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합니다.”
도화가 첫날 아유에게 무림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한 이후 왜 아유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지 나는 그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무림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거기에 힘으로 만들어낸 평화는 힘이 사라지면 또다시 자취를 감춘다면 재차 혼란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무림으로 한 번 돌아온 시점에서 그녀는 무림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도화는 그 사실을 알기에 혈교와 천살대제에 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아유가 그걸 알게 된다면 그녀의 마음이 무림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게 할까 바였을 것이다.
그러니 마교가 나타났을 때 그들이 아유와 접촉하여 괜히 이 일이 알려지지 않도록 일부러 자취를 감췄던 거겠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적어도 그가 아유와 적대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도화 넌, 천홍련을 미워하지 않는 거지.”
내 물음을 듣고 도화의 두 눈에는 이미 대답이 들어 있었다.
“저보다 지독한 삶을 사신 하나뿐인 누님을 제가 어찌 원망하겠습니까.”
태상교주의 납치로 인해 태어나버린 천홍련.
비록 그런 끔찍한 과정으로 태어난 그녀라도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난 죄 밖에 없는 제 아이라 버리고 간 것이 미안하였을 검후는.
그녀가 천홍련에게 평생 품었을 미안함과 선함을 나중에 태어난 자신의 또 다른 아이 도화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러한 검후의 마음은 도화에게 이어져 그가 천홍련을 원망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아유, 네 가족은 여기 있어.’
무림에서 육체로 이어진 가족을 전부 죽이고.
지구에서 정신으로 이어진 가족마저 잃어야 했던 아유에게.
여기 이곳에 그녀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도화.”
그렇기에 나는 도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자.”
“예.”
도화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그 무림이라는 거 도화 네게 구할 의미가 있긴 해?”
내 말을 듣고 도화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내 이야기를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너에게 있어 무림은 뭐야? 네 이야기 중 나는 너에게 의무감 말고는 느낄 수 없었어.”
“그건, 그게.”
도화는 내 질문을 듣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림에서 도화의 인생은 솔직하게 말해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어머니는 무림맹의 인질로서 써먹히고 도화는 그 증거 삼아 강제로 마교에 사신으로 보내졌다.
당연히 무림맹에서 사신으로 보내졌을 도화가 받은 대우는 곱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하루하루 피 말리는 삶을 보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 피가 이어진 누나의 손에 어머니가 죽고, 그 누나마저 자취를 감춰버렸다.
무림은 하루가 다르게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도화의 말대로 그곳에는 한 떨기 꽃조차 태어나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도화는 왜 그곳을 구하고자 하는가.
“나는 아유에게 무림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
그곳에서 아유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가 행복했다면 지구로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고통만 받은 곳이라는데 내가 미쳤다고 보내겠는가.
“그리고 나는 너한테도 똑같이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 눈에는 도화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도화는 자신에 세계니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을 뿐 무림 자체에 의의를 둔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우리 세계니까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
그리고 그런 생각이 때로는 자신을 좀 먹을 때도 있는 법이다.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네가 천홍련을 가족이라 여기고 있다면 네 가족은 여기에 있잖아.”
“…….”
도화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그의 얼굴에 한차례 떨림이 이어졌다.
“도화, 넌 정말로 무림을 지키고 싶어?”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만약 그가 무림을 지키고 싶다면 나는 아유를 대신해서라도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혹시나 그가 생각이 바뀐다면 나는 그 또한 전심전력으로 도와줄 것이다.
도화는 아유의 동생이니까.
나는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필코 지킨다.
“저는.”
도화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차마 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입술만을 달싹거렸다.
그가 지금 내뱉을 발언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도화 씨.”
그러는 순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엑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도화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오지랖이 넓긴 하지만 세상 좀 구해 보려고 노력 해봤거든.”
나엑이는 자신의 옆 머리카락을 슬쩍 매만지며 말했다.
“근데 구해도 썩 후련하지는 않더라. 마음속에 있는 이 응어리가 쉽게 사라지지를 않아.”
나는 나엑이가 귀환 후 외로움을 느끼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 또한 귀환 후 허탈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세계를 구하고 나서 현실로 돌아온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들이 망가트려 놓고 뭐 하러 도화 씨가 고생해서 구해?”
그렇게 말한 나엑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망가진 건 고쳐 쓰는 거 아니야.”
이미 겪어봤다는 듯 나엑이의 감긴 왼쪽 눈이 어쩐지 한차례 파르르 떨렸다.
“세계를 구한다 해서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아.”
나는 나엑이의 말을 듣고 도화에게 말했다.
“세계를 구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같으면서도 또 다른 문제를 맞이 할 테니까.”
내 말을 끝마쳤을 때 도화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애처롭게 그의 몸이 떨렸다.
“무림……으로 돌아가고……싶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세계니까.
나고 자란 곳이니까.
비록 고통투성이로 얼룩진 곳이라도 결국 태어났으니까.
그런 의무감만으로 움직였던 도화가 처음으로 진심을 내뱉었다.
“그래.”
그리고 그걸로 모든 대답은 충분했다.
7
나는 도화가 감정을 추스를 여유를 줄 겸 혼자 두고, 나엑이와 카페 앞에 나와 있었다.
나엑이는 카페 안쪽을 바라보다 내 쪽을 힐끗 보았다.
“도미, 의외네. 난 솔직히 네가 도화에게 무림을 구하라고 할 줄 알았어.”
그 말을 듣고 나는 나엑이를 슬쩍 보았다.
나엑이도 도화와 같이 어떤 의미론 의무감으로 그녀가 갔던 게임 속 세계를 구했을까.
그녀의 감긴 왼쪽 눈은 그 영향일지도 모른다.
“나엑, 세상에는 강요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강요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 압박감은 사람을 짓눌려 터트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내 환경에 의해 생긴 강요가 사람을 짓누르는 때도 있다.
그러한 강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히들 지친 눈으로 살아간다.
환경이 이러니까.
내가 잘돼야 하니까.
내가 버텨야 하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생긴 그러한 강요가 자꾸만 나에게 외쳐온다.
그것은 마치 족쇄와 같다.
나 또한 한동안 그 족쇄에 묶여 허우적거린 적이 있기에 더더욱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한 명쯤은 강요를 안 해도 괜찮잖아.”
그러니 나는 도화에게 세계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다른 선택지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지를 만들어 줄 수 있어.”
쑥스럽지만 귀환자 협회장이 내 여자친구다.
도화가 살 곳쯤이야 손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부탁하는 만큼 나도 전력으로 도울 거지만 말이다.
주로 설향의 투정을 받아주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그럼 된 거잖아.”
내가 그리 말하고 나엑이를 돌아보자 나엑은 나를 바라보다 곧 핏하니 웃어 버렸다.
“하아, 내가 그 세상에서 도미를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
“거기서 뭔 꼴을 당했길래 그러냐.”
“이것저것 있어. 좋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나엑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다 앞을 보곤 몸을 돌렸다.
“그럼 잘 이야기하다 오세요. 나는 도화 씨랑 좀 더 이야기나 해볼래.”
“연애 사업?”
“그쪽이나 잘하세요.”
그렇게 말한 나엑이가 혀를 내밀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천홍련의 모습에서 신소라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유가 걸어오고 있었다.
“도미 오빠.”
아유는 내게 미소 지어 보이며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가 마냥 웃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기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안아주었다.
그러자 내게 안긴 아유는 한차례 움찔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도미 오빠에게는 못 당하겠네.”
“네 얼굴이 다 듣고 왔어요 하는 표정이었으니까.”
“도화는?”
“카페 안에 있어.”
내가 그리 말하자 아유는 꼼지락거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 심장 소리가 듣기 좋은지 그녀의 얼굴은 조금 편안히 풀어졌다.
“장호영이라는 사람한테 이야기를 듣고 온 거지.”
“응, 도중에 은여우도 왔거든. 그 녀석은 정보 빼내는 건 선수니까. 도화가 왜 왔는지는 다 들었어.”
천살대장 장호영 쪽의 정보는 그녀를 진천마로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표정을 보니 천살대제에 관해서는 아유도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괜찮아. 도화가 날 원망하는 거야 이미 당연한 거였는걸.”
그래서 아유는 진작에 받아들였다는 듯 힘없이 웃었다.
도화에게 죄책감을 지닌 그녀였기에 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아유, 잘 들어. 지금부터 도화가 내게 해준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
나는 내 품에 있는 아유에게 곧바로 도화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었다.
도화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고.
그리고 어떤 결심을 했는지까지.
나는 전부 다 포함하여 아유에게 전하였다.
그런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유는 곧 천천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원망받을 각오를 다 했는데 그것이 한 줌도 없다고 하니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 녀석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