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4 - 174화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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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리는 베이거를 무사히 구했다.
다행히 그는 아슬한 시점까지 목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아유 표 환단은 또 이때도 빛을 발했다.
‘아유의 환단은 만능인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유가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도미 오빠 쓰라구 내가 직접 열심히 만들어 준 건데. 왜 자꾸 다른 사람한테 줘버리는 거야.”
“눈앞에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우리 오빠, 이렇게 착해서 어떡할까.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나한테만 착하면 좋겠는데.”
아유는 내 팔을 끌어안으며 투정하듯 말했다.
“늘 아유한테는 신세 지고 있어. 고마워.”
나도 신세 짐은 물론 아유의 환단 덕에 살아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으니까.
아유의 덕이 무척이나 컸다.
그런 내 칭찬 덕분인지 아유는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 흥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알았어. 하긴, 아이에게도 이런 교육이 좋겠징.”
나는 아유의 말을 듣다 순간 멈칫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유의 뱃속에는 내가 이래저래 해놓은 게 있었다.
설향이의 경우 별말 없는 걸 보니 주기가 아니라 빗나간 모양인데.
아유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생각하고 있어야겠다.’
곧 새해다.
최소한 누가 보기에 형편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겨우 몸을 추스른 베이거가 우리 앞으로 다가와 고개 숙였다.
“고맙소. 내가 귀환자들에게 신세를 지게 될 줄은 몰랐군.”
얼터즈 소속 S급 헌터란 특성상 귀환자와 맞부딪칠 일이 많은 만큼 그는 귀환자에게 신세 진 일의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가와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함께 느껴지는 태도에서 그는 듣던 것과는 다르게 그리 나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잘 몰라도.’
사람에게는 여러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특히 자네에게는 정말로 고맙네.”
그러는 사이 베이거는 흑산이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인사를 받은 흑산이는 순간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옆으로 휙 하니 돌려 버렸다.
“……됐어.”
나는 그런 흑산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기분 나쁘다.”
물론 옆에 있는 백산이는 내 표정이 썩 달갑지 않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내 입장에서는 뭔가 딸의 성장도를 보는 느낌이라 흐뭇해서 자연스럽게 이런 웃음이 지어진단 말이지.
그 뒤 층의 주인이 격파된 만큼 우리는 탑 밖으로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층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에 만들어진 문 하나가 1층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 길과 위층으로 올라오는 길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 가지 길을 보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잠시 보았다.
언젠가 100층을 넘어갔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백산이는 그걸 알고 있을까.
잘은 몰라도 그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나는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밖으로 걸어 나오자 어느새 하늘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라도 묵시록의 탑을 오르는데, 하루 이상이 걸렸던 탓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묵시록의 탑은 전세계가 항상 주시하고 있는 장소다.
묵시록의 탑은 세계 어디에서나 보이지만 밝혀진 게 전혀 없다.
세계 불가사의 중 가장 의문인 것은 물론 차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어느 곳이든 묵시록의 탑에 관련해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층의 클리어와 같은 부분은 세계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었다.
층이 클리어될 때마다 묵시록의 탑은 빛이 하나 더 늘어난다.
그 빛이 무슨 뜻이 있는지는 몰라도 세계 여기저기에서 그러한 빛은 항상 관측 중이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23층을 클리어했을 때 전세계가 묵시록의 탑에 빛이 하나 더 늘었음이 관측되고 말았다.
덕분에 세상이 갑자기 뒤집혔다.
어느 누구의 선언도 없이 갑자기 23층이 클리어됐으니 말이다.
뉴스 속보가 계속 나오고, 세계 각국에서는 클리어한 인물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말이 돌고 있었고, 세계 각지의 기자들은 묵시록의 탑 앞으로 모여들었다.
세계 각국에는 제각각 묵시록의 탑이 나오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이 부분을 잠시 깜빡했었다.
우리 쪽에 워낙 귀환자들이 많다 보니 묵시록의 탑의 저층은 크게 위험하지 않아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메라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입구 앞에 기다리고 있던 진소엽 씨와 마주했다.
그는 손에 쥔 커피와 함께 피로한 얼굴로 내게 미소 지었고,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했다.
헌터 관리국에서 직접 기자들이 일체 묵시록의 탑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아 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럴 거 같았어.”
설향이는 진작 알고 있었다는 투로 그리 말했다.
하긴, 설향이 성격상 이런 쪽에 문제가 있었다면 진작 막았을 것이다.
“기자들은 저희 쪽에서 다 정리해놨습니다.”
나는 헌터 관리국에게 내 일을 주로 담당해 주던 진소엽 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나와준 마당에 상황까지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내 상황을 다 곱씹은 진소엽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참에 차라리 이번 건 저희가 이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용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용한다면 어떤 걸로요?”
“기자들이나 다른 세계에서도 아마 계속 수소문 해올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희 쪽에서 SS급 헌터의 존재를 먼저 공표해 버리는 거죠.”
“흐응.”
그러는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설향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묵시록의 탑의 클리어를 한국이 가져간다는 이점과 이번 일에 같이 투입된 귀환자와 SS급 헌터와의 관계도 확립시켜 귀환자와 헌터 관계 완화를 노릴 셈이죠?”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혹시 귀환자분이십니까?”
진소엽은 헌터 관리국에 상황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설향에게 조금 당황한 듯 그리 물었다.
설향은 협회장으로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으니 헌터 관리국 소속 요원인 진소엽이라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뭐, 귀환자 협회 쪽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 정도로 해두죠.”
귀환자 협회 의견 그 자체인 애가 무슨 소리람.
“이야기는 좋아. 득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건 하찬이 네 의견이야.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면 하찬이 네 노출도 결국 점점 더 늘어나게 될 거야.”
그런 와중에도 설향은 내 의견을 제일 먼저 존중해주었다.
진소엽 쪽도 마찬가지라는 듯 내 말을 기다리자 나는 설향에게 물었다.
“이번 일이 있으면 헌터와 귀환자 사이에 골도 조금은 주는 거지?”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가 적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긴 하니까. 헌터의 일인자와 귀환자 협회가 손잡고 있다는 이미지는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긴 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터져 나가고 있는 마당에 나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숨어 있기만 해서 답은 아님을 안다.
백산이 말해준 미래는 멸망한 세계였다.
내가 그런 세계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내 고생이야 얼마든지 감수해 줄 수 있었다.
적어도 세계가 유지가 돼야 내 삶도 유지되는 법이니 말이다.
“진소엽 씨, 그런 식으로 공표 부탁드립니다.”
“예, 최대한 영향 가지 않는 선에서 저희 쪽에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진소엽은 안도하듯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입장으로서는 내가 묵시록의 탑을 나오는 동안 준비해놨을 플랜이 흐지부지되지 않아서 다행이라 느낀 거겠지.
그 뒤 베이거는 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다.
그는 얼터즈 쪽에서 어련히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었다.
물론 흑산이 또한 마찬가지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설향이가 이번에 도망가면 가만 안 둘 거라고 연거푸 말해서인지 이번에는 고분고분했다.
가면서 왜인지 나를 자꾸 짜증 섞인 눈으로 보긴 했는데 백산이 덕에 이미 익숙해져서인지 별생각 들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감 있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어쨌든 흑산이의 도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다.
물론 지능을 지닌 차원종의 등장은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 있었다.
“백산, 우리 세계 괜찮은 걸까.”
“모른다. 내 시점이랑은 너무 달라졌으니까. 이제는 죄다 변수야. 시기도 전체적으로 빨라졌고.”
백산은 착잡한 눈으로 묵시록의 탑을 바라보다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흐름이 나쁜 건 아니다. 당장 네 누나인 강마리 쪽도 뭘 원하는지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 말이다.”
“보이기 시작했다고?”
“그래, 아마 곧 결과가 나올 거다.”
어떤 결과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백산은 그리 말했다.
우리 누나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
‘살아 있고, 무사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제 급급하지는 않긴 해도.’
여전히 걱정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얼굴이라도 비췄으면 좋겠건만.’
우리 누나는 그럴 생각이 아직 없는 모양이다.
“크리스마스인데 데이트도 못 했네. 도미 오빠, 나 아쉬워서 어쩌지?”
그러는 순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내 옆에 아유가 슬쩍 팔짱을 껴왔다.
확실히 그 말대로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를 사실상 묵시록의 탑에서 보내 버린 우리였다.
거의 밤을 새워서 하루를 꼬박 묵시록의 탑을 오른 만큼 실감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쉽기는 뭐가 아쉬워요. 묵시록의 탑에 들어가기 전에 하찬이랑 같이 있었잖아요.”
그러는 순간 설향이도 내 옆에 팔짱을 끼며 엉겨 붙어 왔다.
여전히 중량감 넘치는 그녀의 가슴은 내 팔을 다 덮고도 남았다.
“흥, 뭐래. 넌 귀환자 협회 일이나 가. 묵시록의 탑에 들어가느라 일 쌓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당신이야말로 슬슬 일 좀 하죠? 귀환자 협회가 언제고 지원해 줄 거라 생각 마요.”
나는 내 양쪽에 붙은 두 사람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를 꼬박 달려 놓고 귀환자 아니랄까 봐 다들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나는 나오고 나서 휴대폰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상황이 급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는 말 못하고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묵시록의 탑에서는 휴대폰이 사용되지 않으니 뒤늦게 휴대폰 전원을 켠 순간 나는 멈칫하였다.
[ 담당자님, 바보. ]
시호가 화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