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3 - 193화 이별과 만남
그러나 은나무는 이미 다 받아들인 듯 내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앞에서 말했듯 다른 세계선의 기억을 지닌 은나무에게는 이 또한 죽음을 의미했는데.
왜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왜 이제야.
“말했잖아. 하찬.”
절망하듯 입술을 깨문 내게 은나무는 여전히 웃음 지어 보였다.
마치, 너무나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는 듯이 은나무는 자신의 가슴가를 꾸욱 하니 눌렀다.
“나는 오늘 일을 모두 기억 할 거라고.”
그녀의 기억이 마모되어 사라져 간다.
흩어져 나간 기억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그 광경을 나는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녀의 기억을 이어줄 힘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괜찮아.”
그렇게 말한 은나무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 한 번만 안아줄래?”
그 부탁을 듣고, 내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애처로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끌어안는 것밖에 없었다.
내 품에 안긴 은나무에게서는 여전히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 가루를 나는 내 손으로 담아 주고 싶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고 무의미하게 날아갈 뿐이었다.
나는 부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찬에게 받은 건 전부 내 안에 담아있어.”
은나무를 바라본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를 끝내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헌터 육성 아카데미에서의 첫 만남.
분명 그녀는 나와 적이었지만 이제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비록 여러 기억이 뒤섞여 만들어진 관계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미…….”
내 입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은나무는 그런 내 사과를 덮듯 까치발을 들어 자기 입술로 내 입술을 덮었다.
아주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는 내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손으로 감싸곤 여느 때와 같이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자신이 괜찮다는 의미를 담은 가장 소중한 미소라는 듯.
은나무는 처음 만난 그날과 똑같은 미소를 자기 얼굴에 담아 주었다.
“우리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 말, 지켜 줄 거지?”
사라진다.
내 눈앞에 있는 은나무가 영영.
그것을 깨달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마지막에 가장 기억에 남을 미소를 짓는 것밖에 없었다.
“……응.”
흘러내린 눈물과 함께 내가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세계선 속 마지막 기억 속 내 비통한 표정이 아닌.
그녀가 떠올릴 수 있을 가장 행복한 미소를 담아서.
“나는 은나무.”
은나무가 자기소개를 입에 담았다.
아카데미에서 첫날 자신을 소개하듯 내뱉은 그 말과 같이.
“너는?”
내게 돌아온 그 물음을 듣고, 나는 따라 웃으며 말했다.
“강하찬이야.”
은나무는 내 대답과 함께 천천히 웃음을 흘렸다.
“우리 둘이 합치면 하찬은나무네.”
재밌다는 듯이 웃은 그녀의 개그 포인트는 여전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나는 그마저도 웃어줄 수 있었다.
“사랑해.”
그리고 마지막 그 순간.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아래 은나무는 나에게 그녀가 쭉 하고 싶었던 고백을 다시금 내뱉었다.
“세상에서, 어떤 세계라도, 이 세상이 사라질지라도.”
은나무는 몇 번이고 곱씹으며 나에게 전력을 담은 고백을 내뱉었다.
“난 널 사랑해.”
그것을 마지막으로 떠오른 태양과 함께 은나무의 몸이 무너졌다.
나는 무너진 그녀의 몸을 받았다.
은나무에게서는 더 이상 가루가 흩날리지 않고 있었다.
단지, 색색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그녀가 무사함을 알려줄 뿐이었다.
수평선 끝자락.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바라보았다.
저 태양은 그녀의 새로운 삶이 떠오름을 의미하는 걸까.
거기까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 또한 의식이 끊겼다.
빙의에 전력을 다한 뇌뢰를 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12
왜인지 깊디깊은 잠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 자고 있었을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단지, 그 꿈은 무척이나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을 주었다.
평생토록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었는데 그 꿈이 너무 달콤하여 무심코 잠에 평생 취해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꿈의 끝에 느껴진 아련한 감정은 왜인지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아리고, 너무 아려, 아무리 밴드를 덧대어도 낫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상처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아림과는 달랐다.
그리움과 기쁨, 애석함 여러 감정이 뒤섞여 버린 그 상처는 치료할 수 없을 테지만 가슴속에 평생 품고 살고 싶은 상처였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결국 끝은 오는 법이다.
뜬 눈 사이로 미약한 별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무래도 병실인 듯 특유의 시원한 소독 냄새가 풍겨왔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얼마나 잠이 든 걸까.
솔직히 말해 잠이 든 시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을 거란 느낌이었다.
‘나는.’
은나무.
자신의 이름을 되새긴 그녀는 멍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왜냐하면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어났어?”
어딘가 자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하찬?”
헌터 육성 아카데미에 같이 입학했던 인물이자 자신이 기라성을 위해 납치하려 했던 인물.
그를 보고, 은나무는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렸다.
‘역으로 제압당한 건가.’
기억이 애매하게 끊겨 흐릿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압당하던 당시 꽤나 크게 당한 모양이었다.
몸 여기저기서 오는 통증도 그 여파였겠지.
그런 순간 하찬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를 납치하려 했던 자신이다.
뺨이라도 치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품은 순간 하찬의 손이 천천히 자기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꿈뻑-
은나무의 눈이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또 한 번 하찬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아카데미에서 악신에게 희롱당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하찬은 그날도 자신을 끌어안고 악신의 희롱이 사라지도록 도와주었었다.
그 자상함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두근-
어째선가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그와 동시에 은나무는 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몸이 제멋대로 굴었다.
혹시 몸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자기 몸을 점검하려던 은나무는 뒤늦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을 평생 옭아매던 악신의 주박이 어째선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은나무가 팔로 몸을 더듬거렸다.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이제 괜찮아. 악신은 우리가 처리했으니까.”
그 순간 그 말을 듣고 은나무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악신을 처리했다고?
누가?
그 말을 묻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냥 알 수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그가 악신을 처치해 줬을 거란 것을 말이다.
“……왜?”
은나무의 입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그를 납치하려 했던 자신인데 평생의 숙원이었던 악신을 대신 처치해 주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찬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야, 은나무 너를 구하고 싶었으니까.”
나를 구하고 싶었다고.
그런 그의 눈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것을 본 은나무는 왜인지 가슴이 제멋대로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했다.
은나무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녀의 손이 하찬의 볼에 닿고, 그녀는 그 볼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울지마.”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닌 듯한 감각.
분명 악신이 세계선을 제멋대로 다뤘을 때 이런 감각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감각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감각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 은나무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은나무를 보고, 하찬은 작게 웃었다.
그러곤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안 울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을 보고, 하찬은 천천히 미소 짓곤 은나무에게 물었다.
“은나무, 이제 널 괴롭히던 악신은 없어.”
그 말대로 악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은나무는 한편으로는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이 상당히 기뻤다.
“그러니 이제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돼.”
다해도 된다.
뭘 해도 된다는 걸까.
방금 일어나서인지 멍한 머릿속 탓에 은나무는 왜인지 잘 적응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또 한 번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게 있어?”
하찬의 질문을 듣고, 은나무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평생토록 염원하던 웬수가 죽었다고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못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은나무는 고개를 들어 하찬을 바라보았다.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살짝 부족할지 몰라도 그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 은나무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설렘이라는 게 무엇인지 은나무는 조금씩 자각하고 있었다.
“나.”
은나무의 입술이 겨우 열렸다.
그녀의 입에서 달띤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째선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콩닥거리는 가슴이 목을 틀어막기라도 한 듯 목이 멨다.
그런데도 말하고 있었다.
이 말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고백하고 싶어.”
고백.
평생 생각도 못했던 그 말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그걸 알 수는 없었지만, 은나무는 차오르는 눈물을 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하찬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이 말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뜨거워진 감정과 숨결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가슴이 너무 아팠지만.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하찬은 눈동자를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서서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을 기다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찬의 자상함을 느끼며 은나무는 조심히 입술을 열었다.
“좋아해.”
그리고 그 자상함 앞에 결국 터져 버리고 말았다.
“좋아, 너무 좋아해. 말로 다 못 할 만큼 좋아해.”
하찬의 가슴팍에 머리를 댄 은나무는 계속해서 고백을 내뱉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건 이거뿐이라는 듯.
흘러나온 고백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날을 위해 자신이 살아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은나무는 모든 진심을 담아 그에게 고백하였다.
그러고 나니 겨우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기쁨이 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이 납치하려 했던 인물을 이토록 사랑하는 게 말이 안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임을 어느 사람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은나무.”
하찬이 자신을 부르자 은나무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녀가 조심히 그를 올려다보자 하찬은 은나무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나는 바보에다가 미련해.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알량한 선의를 가진 채 사는 주제에 욕심은 많고, 그러면서도 뭐하나 포기를 못 해.”
아니라고 입에서 말하고 싶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마음 아팠으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지닌 감정이 죄책감일 수도 있어. 나는 그런 녀석이니까.”
“죄책감이라니. 뭐에 관해?”
“내가 지켜주지 못한 사람에 관해.”
지켜주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누군지 은나무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깃든 애석함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네 고백에 솔직히 답할 수 없어. 죄책감으로 답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좀 더 확실한 마음으로 대답해주고 싶다는 말을 듣고 은나무는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막무가내로 한 고백에 관해 이토록 진지하게 여겨준다는 사실이 기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구나.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여겨주지 않으니까.
나를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겨줄 거란 확신이 드니까.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야.
은나무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선은 지금, 이 순간을 간직하기로 했다.
“괜찮아.”
무엇이든 괜찮았다.
지금 자기 몸이 지금, 이 순간을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이걸로 충분해.”
언젠가 여기서 더 나아가 욕심을 부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괜찮다.
이제 악신은 없고, 시간은 많으니까.
“그러니까 고마워. 하찬.”
매일 밤 악신이 올까 두려워 떨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하찬의 품에 안긴 은나무는 더 이상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설령 새로운 악신이 나타나더라도 자신을 감싼 이 품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줄 것 같았기에.
은나무는 처음으로 무척이나 따스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