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
이러고 있자니 사부님을 처음 독대했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 * *
스무 살에 당시 최연소 흑풍대원으로 발탁 된 후 이 년 남짓 지났을 무렵, 천마전의 호출을 받았다.
천마전의 호출이라면 당연히 교주님의 호출이었다.
명색이 천마신교 최강의 소수정예무력단체가 흑풍대고 나 또한 그곳의 대원이었으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교주님의 존안을 뵀던 적은 두세 차례 있었다.
그러나 교주님이 갑자기 콕 집어서 나만 호출하여 독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왜 천마신교의 지존씩이나 되는 존재가, 흑풍대의 간부도 아닌 일개 대원과 독대하려 한단 말인가.
넓은 천마전에는 교주님 한 분뿐이었다.
교주님은 태사의가 위치해 있는 높은 단의 아래에서 뒷짐을 진 채 태사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속하 흑풍대원 서무욱이 교주님을 뵈옵니다.”
예법대로 오체투지하며 교주님의 뒷모습에 대고 예를 취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은 상태이니 교주님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에 대한 흑풍대주의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매 작전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선봉에 선다지? 일전에도 네가 칼을 맞아가면서까지 근접하여 귀부사옹의 신체를 구속한 덕분에, 그 골치 아픈 늙은 괴물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너는 매번 그런 식이라서 네가 투입되면 작전이 수월해진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네가 흑풍대의 별종 내지는 독종으로 불린다고?”
“소, 속하가 아직 무공 실력이 부족하다보니 맷집으로라도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흑풍대주의 말로는 무공 실력도 부족하지 않다던데? 흑풍대에 입대한지 이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 안에서 중간급 고수라고 들었다. 자질도 상당히 뛰어나고 수련 또한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더구나. 그 정도면 부족하다기보다는 대단한 거지.”
“모,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쁜 분위기는 아닌지라 속으로 살짝 안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주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귀부사옹에게서 입은 상처는 다 나았느냐?”
“예.”
“죽을까 두렵기도 할 테고, 다치면 고통스러울 것도 빤히 알 텐데, 왜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이냐? 설마 남들보다 고통을 덜 느끼거나 하는, 그런 체질이냐?”
왜 저런 걸 묻는 건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상대는 교주님이었다. 묻는 말에 확실하고도 솔직하게 답해야 했다.
“당연히 속하 또한 다치면 고통스러우나 이를 악물고 참아내려 할뿐입니다. 무인은 언제든 다칠 수 있는데 그때마다 참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면 급박한 상황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덧붙여 속하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나서면 동료들이 덜 다치고, 작전도 수월해진다는 생각에······.”
“결국 그 또한 고통을 참는데 익숙해지기 위한 수련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그, 그렇다 할 수 있습니다.”
“허허. 괜히 독종이라 불리는 게 아니로군. 일어서거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후에도 고개는 여전히 공손하게 숙인 채였다.
교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부른 건, 너를 내 제자로 삼을까 해서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 말에 경악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답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답해야할지조차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다.
“허허. 왜 대꾸가 없는고? 싫으냐?”
“사사,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인지라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 더없는 광영이오나 아시다시피 속하는 일반 교도 출신으로, 본교의 구대가문 출신이 아닙니다. 그 기본적인 자격요건에서조차······.”
나는 이미 스물두 살. 천마씩이나 되는 존재의 제자가 되기에는 나이도 많았다. 하지만 나이에 앞서 더 중요한 게 바로 저 자격 요건이었다.
“그건 오랜 세월 관습적으로 굳어져 온 것일 뿐, 율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제자를 두는 건 천마의 재량이니라. 즉, 내 제자의 자격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감히 그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이냐.”
순간적으로 서릿발 같은 위엄이 느껴져 양 무릎이 덜덜 떨렸다.
“단, 선택만큼은 온전히 네 뜻에 맡기고 싶다. 혹여 네가 부담스러워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나는 앞으로도 너를 훌륭한 수하로서 아낄 것이다.”
다시금 이어진 교주님의 목소리에서는 압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대꾸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교주님에게 공손히 구배지례를 올렸다.
예를 다하고 나자 교주님, 아니 사부님이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내게는 이미 네 명의 제자가 있다. 그 아이들 모두 너보다 한참 어리다. 최대 일곱 살 차이까지 나고,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첫째조차 너보다 네 살이나 어리다. 그 녀석들 모두를 사형으로 받들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대공자로부터 사공자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지금껏 속하에게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하여 받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사부님이 다시 말했다.
“앞으로는 지내는 환경도, 너에 대한 대우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당분간은 그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거라. 적응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인 무공 전수가 시작될 것이다.”
“존명.”
“심법 하나를 알려줄 터이니 적응기에는 심심할 때마다 그걸 익히거라. 생소하게 느껴지는 심법이겠지만 현 상황에서 네게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특별히 고른 것이다. 뒷부분에 따로 정리된 구결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
“존명.”
“사부의 입장에서 늦게 입문한 제자가 걱정이 되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너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지 않는구나.”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속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속하, 교주님, 존명 등의 말은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느니라.”
“존······.”
“허허헛. 나가 보거라. 밖에서 네 거처로 안내해줄 것이다.”
“예, 사, 사부님······.”
그날, 그렇게 천마의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되고나서 한 달 후.
본격적인 첫 가르침이 시작된 날, 사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천마의 무공을 가르치고 있지만, 네게는 그것들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다.”
천마의 무공은 ‘명황천마신공’이라는 심법에 ‘구유마영보’라는 보법, ‘수라검법’이라는 검법으로 대표된다. 당연히 천마신교 최고의 마공들이다.
사부님의 제자가 되면 그것들을 배울 수 있을 줄 알고 기대가 가득했는데, 왠지 모를 서운함과 실망감이 밀려왔다.
“허허허! 아주 대놓고 실망했다는 표정이구나?”
“예.”
어차피 속내도 들켰겠다, 이 시점에라도 내 심정을 확실히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천마의 무공을 배우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내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내 단호한 대꾸가 의외였는지 사부님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푸허! 푸허허허! 교주인 나를 대할 때는 그리도 어려워하더니, 사부인 나를 대하는 모습은 그때와 많이 다르구나? 이젠 안 무서우냐? 이젠 네 녀석도 입장이 달라졌다, 그거냐?”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고 했으니 사제관계도 부자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자식이 고작 이 정도 불만을 내비쳤다 해서 아버지가 매를 때리거나 호적에서 파내기야 하겠습니까.”
“푸허허허허헛! 맹랑한 놈이로다. 듣던 대로 네놈이 별종은 별종이로구나. 허허허허!”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다는 듯, 사부님의 웃음에는 황당함이 가득 섞여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즐거워하는 분위기였다.
혹여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끔 표정과 말투를 최대한 조절했는데, 그게 먹혀든 것이다.
사부님이 물었다.
“지난 십여 년간 내가 수많은 연구 끝에 창안해낸 무공인데도? 내가 이 경지에 이르러 얻은 심득을 제대로 녹여 넣은 무공인데도?”
나는 눈을 내리깔며 대꾸하지 않는 것으로 반대 의사를 전했다.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인으로 통하는 사부님은 무공 연구를 좋아하고, 무학의 이치에도 매우 밝은 분이다. 그래서 솔깃하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역시 천마의 무공뿐이었다.
“내가 백 번을 생각해도 그 무공이 천마의 무공보다 훨씬 낫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는데도?”
그쯤 되자 눈이 번쩍 뜨였다. 사부님이 저런 걸로 농담을 하실 분이 결코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 무공이야말로 제자에게 안성맞춤인 무공이 아닌가 합니다. 사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킨 무공이니만큼, 제자, 열과 성을 다해 밤낮으로 정진하며 익히겠습니다.”
“푸허허허허허허헛! 고얀 놈 같으니! 푸허허허!”
오랜 세월 사부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으며 느낀 이상한 점은, 사부님이 나를 단 한 번도 꾸짖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제자들을 대할 때는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가끔 호통을 치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는 대사형도 예외가 아니고, 나보다 일 년 반쯤 늦게 들어온 어린 사제도 꾸중 듣는 일이 잦다고 들었다.
한데 사부님은 초반 이삼 년이 지나도록, 유독 내게만큼은 그러는 적이 없었다.
내가 사형제들과는 다른 무공을 배우고 있어서 기준 적용도 달리 하시는 건가? 이 거지 같은 내공 심법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익히고 있으니 그게 불쌍해서 봐 주시는 건가?
아니면 늦은 나이에 제자가 된 내가 자신감이 꺾이지 않게끔 각별히 배려해주시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고, 더 오래 된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더 커서 그러는 건가?
별의 별 생각을 다 했었는데, 사부님은 그 후에도 나를 꾸짖는 일이 없었다.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너를 일찍 알았어야 했다. 그래서 너를 가장 먼저 제자로 들였어야 했다.”
사 년째에 사부님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나는 오 년째가 되어서야 그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사부님은 둘만 있는 자리에서 여러 차례 그 말씀을 하셨다.
노환과 함께 사부님에게 찾아온 매병(치매의 증상 중 하나)이 점점 악화되기 전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