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0
저 정도면 따로 시간을 투자하여 신체 단련을 열심히 한 몸이었다.
의외다. 백도의 어린놈들 중에도 신체 단련을 저렇게까지 하는 놈이 있다니.
“혹시 나를 기억하시오?”
사내가 대뜸 물어오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 우리가 아는 사이였소? 미안하오. 내가 근래 머리를 크게 다쳐서 기억을 잃는 바람에······.”
“어? 아! 맞다! 얼핏 그 얘기를 들었던 것 같소. 한데 여전히 기억이 안 돌아온 거요?”
“그렇소. 어쨌거나 아는 사이인데도 내가 못 알아봤다면 미안하오.”
“아, 뭐.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소. 그저 우리는 입관시험을 함께 친 사이인데, 공자의 순번이 우리 전전이어서 교관님이 호명하는 걸 듣고 알았소.”
“아하.”
“그, 광풍현 송가장의 둘째 공자시잖소.”
“맞소.”
“송유······. 송유······. 스읍, 송유······.”
양미간을 좁히며 말하는 모습이, 내 이름을 기억해내려 노력하는 모양새였다.
“아, 나는 송······.”
내가 이름을 알려주려고 입을 떼자 그가 빠르게 양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 잠깐! 말씀하지 마시오! 내가 맞혀보겠소. 그러니까 송유······, ‘하’ 소저는 막내시고.”
으이그 송가장의 이 한심한 아들놈들아. 여태 뭐하고 살았냐? 우리 남매들 중 잠룡관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누이 같구나. 고작 일 년차인 그 막내 말이다.
하긴, 입관 일 년차에 동부지맹의 잠룡오화로 불릴 만큼 미모가 뛰어나니 금세 유명해진 것도 이해는 가지만.
“송유······, ‘성’ 공자였던가요? 우리와 함께 입관했던 셋째 공자가?”
으이그 셋째 이놈아, 뭐했냐? 그 수준에 그 따위로 까불고 다녔던 거냐?
“비슷하긴 하구려. ‘상’이오.”
“아! 상! 송유상! 송유상 공자! 맞다! 그랬었소. 그리고 송유······, ‘혁’ 공자였던가요? 장남이.”
형이라는 작자여, 당신도 글렀소.
이건 뭐 비슷하지도 않잖소? ‘백’하고 ‘혁’ 사이는 멀어도 너무 머니까.
“형은 ‘백’이오.”
“아! 맞다! 백! 송유백! 송유백 공자!”
“그 정도면 굳이 맞힐 생각 마시고 그냥 물어보시오. 그쯤 되면 결례 수준이란 말이오.”
“아! 그, 그것도 그렇구려. 내가 맞히는 것에만 몰입하다 보니 그 생각을 못했소. 확실히 결례였소. 미안하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소.”
뭐, 나름 재미는 있었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그래도 이왕 내친 김에 공자의 이름도 마저 맞혀보고 싶은 마음이······.”
“소생은 그럼 이만.”
그 말을 남긴 후 더 볼 것도 없다는 분위기를 취하며 걸음을 떼었다.
기분 나빠서가 아니었다.
놈에게 맞히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저놈의 입에서 내 이름을 빙자한 무슨 이름이 튀어나올 줄 알고 그냥 듣고 있겠는가. 송유백과 송유상의 굴욕을 들었으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내 입장에서는 딱 기분 좋다.
“송유······, 겸! 그래! 송유겸! 송유겸 공자시잖소!”
나는 놀란 눈으로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송유백과 송유상도 못 맞힌 놈이, 계반 찌끄레기인 송유겸의 이름을 맞힐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엥? 형과 아우의 이름은 다 틀리시더니 내 이름은 또 어찌 맞히셨소?”
사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하하. 미, 미안하오. 사실은 내가 맞힌 게 아니오. 방금 전에 누나가 전음으로 알려줬소. ‘송유겸 공자잖아, 이 멍청아! 언제까지 결례를 범하려고 그래!’ 라고 했소.”
이에 나는 여인 쪽으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 여인이 내 이름을 어찌 알고 있는지 의아했다.
“‘멍청이라는 말까지 왜 해, 이 모질아! 이러면 내가 말을 사납게 하는 여인처럼 보일 거 아냐! 그건 우리 사이에서나 하는 말이잖아!’ 라고 하는구려.”
나는 양미간을 좁힌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니들 뭐하는 거냐?
“아, 누나가 숫기가 없어서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가 아니면 사내 앞에서는 육성을 잘 내지 않소. 친해지면 괜찮아지는데, 하여튼 저것도 병이오. 그러니 송 공자가 이해해 주시오.”
별의 별 사람들 다 봤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라 어리둥절할 뿐이다.
“‘우리 소개는 언제 할 거야! 계속 우리가 누군지 안 밝히는 것도 결례잖아, 이 멍텅구리야!’ 라고 하는구려. 하하! 이건 누나 말이 맞소. 미안하오, 송 공자. 우리는 단목세가 출신이오. 나는 단목홍신이라 하고 누나의 이름은 단목지요.”
단목세가.
웅장한 검법이 특징이며, 강호사에 간혹 초고수들을 배출한 적이 있는 유명한 세가다.
초고수를 배출했을 즈음에는 잠깐씩 오대세가 안에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초고수를 배출하지 못하는 시기에는 대부분 팔대세가 내에도 꼽히지 못해 왔다. 근래에도 초고수를 배출한 적이 없기에, 요즘은 천하 십대세가에도 이름을 못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십대세가의 살짝 바깥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가의 이름은 유명하여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세가다. 당장 천하 십대세가 안에 들지 못한다 해도, 이 몸이 속한 송가장 따위와 비교하려면 보름달과 반딧불이를 붙여놔야 한다.
참고로 단목세가는 절강 북서부의 천목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송가장이 강서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기에 서로 먼 거리는 아니다.
“아, 참! 송 공자께서 기억을 잃으셨으니 우리 세가의 이름도 모르실 수도······.”
“알고 있소. 주변에서 도와줘서 열심히 공부를 했던지라.”
천마신교의 정보를 더듬어보면 단목지라는 이름은 현 단목세가주의 딸이었다.
그녀의 오라비가 소가주인데, 단목강이라는 이름이었다. 단목강도 이쪽 잠룡관도인 것으로 안다.
단목홍신이라는 이름은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이윽고 현 단목세가주의 조카 중에 무재가 제법 빼어나다고 알려진 이름이 바로 그 이름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유명세가 출신인 만큼 단목세가의 소가주인 단목강은 갑반으로 알고 있고, 지금 마주친 두 사람도 상위 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정확히 무슨 반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참고로 누나와 나는 사촌관계요. 동년생인데 누나가 생일이 빠르오. 동년생인 만큼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왔던지라, 잠룡관도 같은 해에 들어왔고, 이렇듯 수련도 함께하고 있는 거요.”
사촌지간이라는 걸 들으니 내 기억이 맞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그렇구려. 단목 공자와 단목 소저 모두 만나서 반갑소. 내가 의도치 않게 두 분의 수련을 방해한 모양새가 되어 괜히 미안하구려. 더 방해하지 않고 얼른 지나갈 테니, 마저 수련들 하시오.”
“산책하는 송 공자를 방해한 건 오히려 내 쪽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하하.”
“어쨌거나 말이오.”
“사실 이곳이 계반 거주 구역 뒷산의 구석 쪽이라, 동부지맹 잠룡관에서 가장 외진 곳이오. 그래서 인적이 거의 없소. 지난 몇 달간 이쪽에 온 사람도 송 공자가 처음이오. 그래서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인사나 건네러 와 본 것이오. 아, 그리고 여기, 물 한 모금 드시오.”
단목홍신이 들고 있던 죽통을 내게 건넸다.
“아니, 괜찮소. 그다지 목이 마른 상황이 아니라서.”
“그러지 말고 드셔 보시오. 저 비탈 위쪽에 우리만 아는 맑은 샘이 있는데, 아까 그곳에서 떠온 물이오. 물맛이 참 좋소. 마침 누나도 권하는 모양이오. 누나는 사실, 친분이 있지 않으면 이런 거 잘 안 권한다오.”
시선을 돌려보니 수면 위로 목 위쪽만 보이는 단목지가 천천히, 그러나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희한한 사람들일세.
어쨌거나 수면 위로 보이는 아리따운 얼굴이 호의를 받아들이라는 듯 바라보고 있으니 더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알겠소.”
죽통을 받아들고 입구 쪽의 마개를 딴 후, 입술을 대지 않고 두세 모금을 마셨다. 그러자 단목홍신이 죽통을 받아들더니 본인도 두세 모금을 마셨다.
“어떻소? 물맛이 괜찮지요?”
“그렇구려. 고맙소.”
자꾸 신경 쓰이는 수면 위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한데 송 공자께서는 산책 중이셨소?”
“그렇소.”
“오늘만 산책하시는 거요,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이시오? 계속한다면 이 시간에 하실 거요?”
“앞으로 꾸준한 체력단련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늘은 처음으로 경로나 한 바퀴 둘러보던 중이었소. 한데······.”
그런 걸 왜 물어? 내가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면 니들 수련하기에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
대충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단목홍신이 미소 띤 얼굴로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표정을 보니 오해가 좀 있으신 듯한데, 그런 거 아니오. 행여나 우리의 수련 때문에 불편해 하실까 싶어, 그러지 말고 그냥 편하게 지나다니시라고 말씀드리려던 거였소. 우리 때문에 괜히 경로를 바꾸거나 하지 마시고.”
“아······.”
괜히 내가 공격적으로 생각한 건가 싶어 미안해진다.
“아까처럼 고개를 돌려 배려해주실 필요도 없소. 이런 식으로 마주치면 서로 반갑게 인사나 건네며 지냅시다.”
“아, 아······. 알겠소. 배려해주셔서 고맙소.”
“혹여 목마르면 지나가다가 말씀하시오. 언제든 드리겠소.”
“하하. 그렇게까지는······. 어쨌든 알겠소. 고맙소.”
“하면 살펴가시오, 송 공자. 또 뵙기를, 아니 매일매일 뵙기를 고대하겠소. 보시오. 누나도 똑같은 마음이니까.”
돌아보니 수면 위의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겠소. 그럼 두 분도 수련 열심히 하시오.”
단목세가의 사촌남매에게서 서둘러 멀어진 후, 걷는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첫 인상이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다.
단목홍신은 장난기가 좀 있어 보이나 서글서글했고, 단목지도 약간 특이하긴 하나 성격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유명 문파나 세가 출신들은 건방 떠는 놈들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는데, 저들은 일단 정중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 모두 무공수위가 일류는 되어 보였다. 하면 소가주 단목강의 경지는 당연히 더 높겠지.
근래 단목세가의 위세가 이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역시나 명가는 명가인 것이다.
송가장 같은 곳 출신의 계반 관도에게까지 저런 식으로 대할 정도면 평소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참고로 단목지 또한 동부지맹 잠룡오화 중의 일인으로 알고 있다.
시종일관 그녀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있던 덕에 용모 확인이 어렵지는 않았다. 어디에 내놓아도 사내들 애 깨나 태울 만큼 빼어난 용모여서, 과연 잠룡오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첫 인상도 나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자주 마주치게 될 테니, 두 사람 모두에게 무난하고 정중하게 대하면 될 것 같다.
* * *
제삼서고에 드나들기 시작한 후로 삼 주가 더 흘렀다.
내가 송유겸의 몸으로 깨어난 시점으로부터 계산하자면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난 셈이다.
체력단련을 시작한 시점도 약 삼 주 전부터였는데, 그때는 곳곳의 활엽수에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 나무들에서 낙엽이 떨어지며 가지들이 점점 앙상해지고 있다.
그 기간 동안 첫째 송유백과 어떤 식으로든 마주치게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송유상한테서 전해들은 바가 있을 테니, 나를 부르거나 내 거처에 찾아와서라도 싫은 소리들을 해댈 줄 알았다.
한데 의외로 찾는다는 얘기도 없었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형이라는 자의 얼굴을 여태 모른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내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었지만,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송유하가 그 이유를 알려줬는데, 반년에 한 번씩 있는 승반 심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사실 이 시기쯤 되면 송유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도들이 승반 심사 준비에 몰두한다는 모양이다.
한데 송유백의 입장에서는 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송유백은 현재 무반으로, 정반丁班 승반을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반은 갑을병정에 속하는 상위반이라서 의미가 확실히 다르긴 하다.
제대로 된 무가가 아닌 송가장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잠룡관 갑을병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다는 게 특히나 경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 쾌거이기도 하거니와, 부수적으로 송유백의 인맥 수준 또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송유백도 최선을 다하려는 것일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