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1
지난 삼 주간 제삼서고에서 살다시피 하며 운기조식을 했고, 그 외의 시간에는 꾸준히 체력단련을 병행했다.
새벽에는 구보 경로를 꾸준히 한 바퀴씩 걸었고, 어느 정도 체력이 붙은 후부터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후에 체력이 더 붙은 시점부터는 해떨어지기 직전의 시간에도 한 차례 더 구보를 했다.
비 오는 날에도 바람이 거센 날에도, 한 번도 빼먹은 일이 없었다.
체력이 더 붙으면 새벽 시간에는 한 바퀴가 아니라 두 바퀴를 돌 계획이다. 구보 속도를 더 빠르게 해서.
단목세가의 사촌남매와는 새벽 구보 때마다 매일 마주쳤다. 두 사람 또한 날씨가 궂은 날에도 수련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강서 지역이 전체적으로 보면 온화한 편이나, 북쪽이고 산지일수록 겨울 즈음이 되면 제법 춥다.
동부지맹의 잠룡관은 특히나 북동부의 삼청산에 위치한 탓에, 벌써 서리도 두어 차례 내렸고 얕은 물에는 살얼음이 낀 날도 있었다.
그런데 단목세가의 사촌남매는 춥지도 않은지 계속 물속에서 수련 중이다. 두 사람은 혹여 얼음이 얼어도 그걸 깨부수고서라도 물속에서 수련할 사람들이다.
둘 다 일류고수들이니 어느 정도의 추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만.
여느 날처럼 저녁 구보를 마친 후 적당히 씻고 돌아오니, 거처 안에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내가 없는데도 거처 안에 들어가서 불을 밝히고 있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나 송유하가 와 있었다.
날이 추워졌으니 혹여 내가 없을 때는 방 안에서 기다리라고 미리 얘기를 해뒀었다.
“오셨어요.”
“어. 와 있었네.”
요즘도 송유하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찾아온다.
내가 식량을 미리 가져다가 보이는 곳에 놓는데도, 어떻게든 과일이나 열매나 견과류 등을 조금씩이라도 챙겨 온다.
서탁의 반대편에 앉으면서 보니 칼로 깎여 하얀 알맹이만 남은 밤 몇 톨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송유하가 미리 까서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그것도 내가 많이 먹지 않는 걸 알고 소량만.
“드세요.”
“매번 황공해서 이거.”
밤 한 톨을 입에 넣고 씹은 후에 말했다.
“누이도 승반 심사 준비 때문에 바쁠 테니 굳이 안 와도 된대도.”
“승반 심사 같은 건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예요.”
응. 너는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아.
“오호! 자신 있나 보네? 이러면 반년 만에 또 승반인가?”
“결과는 알 수 없죠. 그냥 맘 편하게 치를 거예요.”
말로만 무던한 게 아니라, 얘는 성격 자체가 무던한 편이다. 본디 저런 성격이 시험 같은 걸 치를 때는 유리한 면이 많다.
“어쨌든 잘 왔어. 마침 누이에게 부탁할 게 있었거든.”
“뭐든 말씀하세요.”
아니, 승반 심사를 앞둔 애가 내용도 안 듣고선 다 들어줄 기세라니.
“알다시피 내가 근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공의 기초가 되는 서적들을 싹 다 훑어봤잖아? 혈도 경맥에 관련된 서적이며 기초 의술서들까지.”
“걱정될 정도로 열심히 보셨죠. 게다가 놀랍게도 내용의 전반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이해까지 하셨고요.”
송유하는 나를 위해 제삼서고에 없는 책들을 제이서고에서 대여해서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송유하가 대여해 온 책들을 모두 한두 차례씩 훑어 봤다.
그 후, 그녀가 반납을 위해 책들을 가져가러 이곳에 왔을 때, 내용들이 어렵지는 않더라는 식으로 운을 뗐다.
그랬더니 송유하가 못 미더워 하기에, 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한 번 물어보라 했다. 그녀가 실제로 책을 펼쳐들고 질문을 했고, 나는 제대로 답해줬다.
당시에 송유하의 놀라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에도 그런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니, 송유하는 이제 나를 천재 비슷한 족속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이는 무학 전반에 대한 내 이해도가 매우 높은 수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독한 무학 연구가이자 무학 이론가였던, 그러면서 천하제일인이기도 했던, 대단하신 사부님 덕분이라고 하겠다.
틈만 나면 사부님의 무학 이론을 듣고 답해야 했던 덕분에, 나는 절정고수 치고도 무학 전반의 이론에 매우 밝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삼 주 만에 회회심공을 수련할 구실을 마련했으니 잘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서적들을 대부분 이해하고 나니까, 문득 실험해 보고 싶은 방식이 하나 떠올라서. 근데 이게 나 혼자서는 실험해 보기가 어려운 방식이라.”
“뭔데요?”
“일단 심법 개념이긴 한데, 방식이 좀 특이해.”
이어서 내가 회회심공의 그 개 같은 특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 송유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 그래서 한 번 실험을 해보려는 거고.”
“시, 실험이라는 게 결국 제가 오라버니를 패, 아니 때, 때려야 한다는 말이잖아요.”
음. 방금 중간에 뭔가 험악한 표현이 나오려다가 급하게 바뀐 것 같은데.
“그런 거지.”
“그래도 제가 어떻게 오라버니를······.”
“누이, 실제로 사람 패 본 적 있어?”
“패, 패다니요. 그런 표현은······.”
응. 니가 아까 쓰려다가 황급히 순화한 표현이지. 뭘 이제 와서 아닌 척은.
“있어, 없어?”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없어요.”
“이 기회에 한 번 해 봐. 누이의 무공 수련에도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봐. 실제로 사람 때려 본 사람하고 아닌 사람하고, 권각술 펼치는 게 같겠어? 난 분명히 다를 거라고 보는데.”
방금 전의 설득이 먹혔는지, 송유하는 내적 갈등이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눈빛이었다.
나아가서 그녀의 눈동자에 모종의 기대감과 함께, 약간의 위험해 보이는 느낌마저 담기기 시작했다.
그래. 기억난다.
회회심공 수련 시간만 다가오면 사부님의 눈동자 속에도 꼭 저런 느낌이 담기곤 했었지.
* * *
다음 날 오후.
송유하와 나는 계반 거주구역에 딸려 있는 실내 연무동으로 향했다.
각 거주구역의 근처에는 개별 수련을 위한 실내 연무동이 존재한다. 실내 연무동이라고 해서 대단할 건 없고, 높고 넓은 창고형의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는 형태다.
시설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들어보니 다른 거주 구역의 실내 연무동들도 그렇단다. 어차피 무공을 수련하다보면 여기저기 파괴되기 일쑤인 탓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각 실내 연무장들이 꽉 찰 일이 없는데, 승반 심사 기간이 다가올수록 만원이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나 계반은 달랐다.
승반 심사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서른 곳의 실내 연무장 중에 사람이 차 있는 곳은 열두세 곳 정도였다.
계반 거주 구역에 속한 실내 연무동이니 당연히 계반 관도가 이용하는 곳이다.
그러나 상위 반의 관도들이라도 계반 관도와 함께라면 이용할 수가 있다. 실내 연무장이 부족한 시기이니 상위 반 관도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고려해 볼만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역의 실내 연무장은 남아돌고 있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아무리 급해도 계반 관도들과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다는 거다. 괜히 잘못 엮이면 귀찮아질 우려가 있으니까.
문득 단목세가의 사촌남매가 고맙게 느껴진다.
이 몸이 계반 찌끄레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항상 친절하고 정중한 그들이다.
너희들, 착한 아이들이었구나.
실내 연무장에 들어선 후, 송유하와 마주섰다.
이제부터 내가 당할 일을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오라버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송유하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염려와 미안함도 담긴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 표정은 조만간 희열과 개운함으로 바뀔 것이다.
사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염려스러워서 묻는 표정과 달리 주먹은 솔직한 걸? 아주 야무지게 말아 쥐고 있네? 주먹 속에 짱돌이라도 감춘 거야?”
“아, 아니에요. 제가 설마······.”
송유하가 양손바닥을 펴 보였다.
“내가 그걸 의심했겠어? 그냥 서로 긴장 풀자고 해본 말이지. 하하하.”
쟤를 위해 억지로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하는 이 상황.
정말 개 같다.
사부님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표정이라도 지을 수 있었다.
한데 송유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 아이의 마음도 약해질 테니까. 그러면 회회심공 수련의 효율이 떨어질 테니까.
“근래 내가 신체 단련 열심히 한 거 알지? 맷집 좋아졌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해.”
나를 때리려는 상대의 기분까지 배려해줘야 한다니.
내가 더러워서 진짜.
그놈의 내공이 뭐라고.
정말이지 개 같은 상황이다.
“갈게요.”
당연하지만 집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시작한다는 뜻이다.
퍽! 퍽! 퍼버벅! 퍼버버벅!
송유하의 구타가 시작되었고 나는 열심히 구결을 외웠다.
한 번 시작하면 최소 백 회 이상은 타격을 하라고 주문했기에, 그녀의 구타는 한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막 백 회를 넘겼을 때쯤 송유하가 움직임을 멈추며 내게서 살짝 멀어졌다.
“괜찮으세요?”
아직까지는 염려가 담긴 표정.
저 표정과 어조에서도 알 수 있듯, 방금 전의 그녀는 손속에 사정을 매우 많이 두었다. 그 마음이 내게도 충분히 전해질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다.
맞는 데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나.
“뭐야, 신반도 별 거 아니었구나? 고작 이 정도로 또 승반하겠다는 생각을 다 했어?”
당연히 그녀의 투쟁심을 불태우기 위한 발언이었다.
바로 대꾸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송유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를 자극할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라는 거, 다 알아요.”
쬐끄만 게 진짜, 눈치는 빨라가지고선.
하긴, 생긴 것만 보면 금지옥엽으로 자란 것 같아서 자꾸 착각하게 되는데, 실상은 얘도 눈칫밥 먹고 자란 신세다.
“그러니 그 의도에 맞춰드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죠.”
어라? 너 눈빛 변했어, 방금.
“이왕 그렇게 마음먹은 김에, 이번에는 공력도 써서 타격해 볼래?”
“하, 하지만 그건 정말 위험할 수도······.”
“나도 공력을 이용해서 버틸 거야. 그러니 한 번 해 보자. 도중에 내가 못 버티겠으면 뒤로 빠질 테니까.”
서로가 공력을 이용하면 잠력이 쌓이는 효율도 올라간다.
내가 느끼는 통각의 수준이 비슷하다면, 서로가 공력을 사용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약간 더 효율이 좋다.
상대방이 나를 타격하는 그 공력의 일부마저도 체내의 잠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격당하는 위치를 내가 적정한 공력으로 보호하면, 그 공력 또한 반작용으로 인해 잠력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전환되는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잠력은 통각을 느끼는 와중에 구결을 외워야만 생기며, 이런 식으로 전환되는 잠력은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약간의 종속적인 이득에 불과하다.
초창기에 사부님과 함께 통각 없이 공력과 공력의 부딪침만으로도 잠력이 생기는지에 대한 실험까지 했었다. 수차례 해봤지만 역시나 통각 없이는 잠력도 생기지 않았었다.
이런 방식의 회회심공 수련으로 한 번에 쌓을 수 있는 잠력에는 당연히 한계치가 있다.
그러니 공력을 이용하면 조금 덜 맞고도 그 한계치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정도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