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4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 평소처럼 책을 대여한 후 서고를 벗어나려는데, 서고 관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 송유겸, 잠깐.”
한심한 공기가 잔뜩 흐르는, 삼십대 중후반의 그 사내다.
그간 자주 봐서 아는데, 그는 일주일에 최소 세 차례는 술을 죽도록 퍼마시는 듯했다. 숙취로 고생하는 빈도를 보면 딱 그랬다.
자주 마주친 사이이긴 한데 대화를 길게 나눠본 적은 없었다. 항상 그는 사무적인 말만 짧게 했고, 나 또한 그 말들에 대꾸해준 게 다였다.
오늘도 그와 나 사이의 대화는 끝난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달리 왜 불러 세우는 걸까.
“예, 교관님.”
그게 내가 평소 그를 부르는 호칭이다.
직함을 모르니 내 딴에는 그 호칭이 제일 나을 듯하여 그렇게 불러왔던 것이다. 사내 또한 딱히 그 호칭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한심한 장년이 말했다.
“본가가, 그러니까 송가장이, 바로 옆 고을인 광풍현이었지?”
“예.”
“가까운 곳이지. 이번 방학 기간에 본가에 가나?”
승반 심사가 끝나면 다음 날 결과가 발표되고, 그 때부터 방학이 시작된다. 기간은 삼 주 남짓이다. 일월 중순 중에 다음 학기가 다시 열린다.
강서에 있는 이곳 동부지맹은 인근의 안휘지부, 절강지부, 복건지부, 광동지부를 관리하고 있다. 이곳 잠룡관의 관도들도 그 지역들과 호북 동부 지역에서 모여든 후기지수들이다.
운 좋게도 출신지가 충분히 다녀올 만한 거리라면, 대부분의 관도들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다녀온다.
멀어서 못 가는 관도들은 잠룡관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출신지가 가까운 친우들을 따라가서 신세를 지기도 한다.
친우들끼리 강서의 남창이나 포양호 근처에 숙소를 잡은 채로 휴가를 즐기기도 하고, 동쪽에 있는 절강으로 넘어가서 그 유명한 항주를 관광하고 오기도 한다.
길초량과 송유하가 알려준 정보들이었다.
한심한 장년에게 대꾸했다.
“저는 잠룡관에 머물고 싶어서 일단 장원에도 그렇게 알려두었습니다. 한데 어른들이 오라 하시면 할 수 없이 가야겠지요.”
“가까운데 왜 갈 생각을 안 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서책이나 실컷 읽겠다는 계획인가?”
“예. 계획은 그렇습니다.”
“더 읽을 만한 서책이 남아 있긴 하고?”
“아직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가뜩이나 요즘 집중도 잘 되다 보니, 이 흐름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심한 장년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안 하나 할까? 본가에 가고 싶지 않다면 구실로도 적당할 것 같은데.”
“갑자기 제안이라시면······.”
“제일서고에서 근무하는 내 동료가 방학 기간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됐거든. 거길 누군가가 맡아줘야 하는데 마땅한 인력이 없어서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여길 비우고 가면 자네가 이곳을 못 이용하잖아.”
한심한 장년이 바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쪽을 관리하면 자네는 그쪽에서도 서책들을 읽을 수 있으니 좋고, 나는 이곳에서 마음껏 땡땡이를 칠 수 있어서 좋지. 자네가 안 오면 이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셈이니, 나는 대충 출근도 늦게 할 수 있고 퇴근도 빨리할 수 있지. 여러 모로, 서로 좋은 일이 아닌가.”
이보쇼. 당신은 지금까지도 눈치 볼 사람 없이 충분히 편하게 지냈던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보다 더 편해질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양심은 대체 어디 갔어요?
“하지만 저는 계반이라 애초에 제일서고에 갈 자격이······.”
“그 자격요건이라는 것이 반의 등급보다는 모호한 출신성분 쪽에 가중치가 더 크다네. 자네는 어차피 옆 고을의 송가장 출신이니 모호할 게 하나도 없는 거고.”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하루 종일 관리하기가 어렵다면 오전 나절이나 오후 나절 중에 한 나절만 해줘도 되네. 나머지 한 나절은 한 사람 더 구해서 채울 수도 있고, 그것도 안 되면 할 수없이 내가 이곳을 닫고 가서 채우든가 해야지.”
이 정도면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방학 기간 동안 본가에 가지 않을 충분한 이유도 되고, 수련에도 크게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평소에는 종종 붐비기도 하지만, 방학 기간이니 한가할 걸세. 자네가 서책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제안하는 거야.”
이쯤이면 더 이상 각을 잴 필요도 없다.
“하겠습니다.”
한심한 장년도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난 것이 있어서 바로 말했다.
“아무래도 계반인 제가 제일서고에 가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제일서고의 임시 관리자임을 증명하는 증서 같은 걸 써주실 수는······.”
내가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한심한 장년이 서류철을 들추더니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앞부분을 훑어보니 임시 관리자임을 증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속과 이름 부분만 공란이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직인까지 살짝 보였다.
증서를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모양이다.
한심한 장년이 곧바로 붓을 들더니 공란에 ‘계반 관도 송유겸’이라는 글자를 채워 넣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이 한심한 장년이 글씨 하나는 참 기가 막히게 잘 쓴다. 명필이다.
저 정도 명필은 돼야 이런 꿀 보직을 맡을 수 있다는 건가.
한심한 장년이 증서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걸 받아서 다시 한 번 훑었다.
맨 마지막 부분까지 확인한 나는 살짝 놀란 눈으로 한심한 장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부지맹 잠룡관 제삼서고 관리자 제갈수광.>
성이 제갈이라고 해서 모두 제갈세가 출신인 건 아니다.
실제로 내가 기억하는 제갈세가의 주요 인물들 중에 딱 떠오르는 이름도 아니었다. 제갈세가쯤 되면 워낙 거대 세가라 방계로 넘어가면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하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
어쨌든 저 한심한 장년이 무림맹에 연관된 곳에서 일하고 있으니 혹시 제갈세가 출신인가 싶긴 하다.
“내 성 때문인가 보군.”
“예.”
“방계야. 별 볼일 없는.”
“아.”
이런 한직에서 일하고 있으니 역시나 제갈세가의 주요 인사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놀랍긴 하다. 방계라고는 해도 이 한심한 장년이 그 제갈세가의 혈통이었다니.
현재의 직계에서 얼마나 갈라진 가지인지 궁금하긴 한데, 그것까지 대놓고 물어보는 건 당연히 결례일 수밖에 없다.
문득 또 한 가지 생각난 게 있어서 말했다.
“저어, 교관님, 제일서고를 임시로 관리할 나머지 한 명 말입니다만······.”
“오! 추천해 줄 사람이라도 있나?”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출신성분도 확실하니 오늘 저녁에 의사를 물어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와서 결과를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나야 좋지. 기다리고 있겠네.”
한심한 장년, 아니 제갈수광의 얼굴에 만족감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 * *
다음 날 오후.
송유하를 따라 무반 관도들의 거처로 향했다. 송유백의 호출 때문이었다.
송유겸의 몸으로 이곳에서 깨어난 후, 다른 반 관도들의 거주 구역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나면서 보니 마당 등의 공간들도 더 넓었고, 각 거처들 자체의 규모도 더 컸다. 거주 구역 내의 모든 시설들이 계반에 비해 훨씬 좋았다.
무반은 다섯 번째 등급의 반인데, 이 정도만 되어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나 싶었다.
무반이 이러면 상징성이 있는 갑을병정 반의 시설들은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예요.”
송유하가 알려주는 거처의 안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반과는 다른 깔끔한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와 의자가 마련된 공간이었는데, 훑어보니 침실은 또 따로 있는 모양이다. 계반은 침실 겸 거실인데다가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생활하는 구조인데.
그 안에 두 청년이 있었다.
한 명은 이전에 한 번 봤던, 철딱서니 없는 느낌이 용모에서도 드러나는, 바로 그 송유상이었다.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당연히 그가 송유백일 터였다.
용모는 준수한 편인데 인상은 고지식해 보인다. 융통성이 거의 없을 것 같고 체면치레를 중시할 것 같은, 딱 틀 안에서 자란 장남의 인상이라고 할까.
이로서 사남매를 모두 보고 나니, 기본적으로는 네 명 모두가 준수한 편의 용모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첩의 자식들 두 명의 용모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편이었다.
송유겸과 송유하가 어렸을 때부터 본처의 자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이유에는 이러한 용모 또한 충분히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잠룡오화로 꼽히는 송유하의 용모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몸의 주인인 송유겸의 용모도 상당히 빼어나다.
나는 사내답게 생긴 미남을 좋아하는데, 사실 송유겸의 용모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중성적인 느낌의 선이 고운 미남인 건 아니다.
사내다운 느낌과 중성적인 느낌의 중간쯤이라고 할까.
전체적으로는 시원한 인상이나, 눈매는 또 나름 정이 많게 생겼다.
덕분에, 송유겸은 적어도 생김새만으로는 여관도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 말을 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단목지였고,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송유하도 고개를 끄덕였었다.
어쨌거나 사 남매의 용모를 주관적으로 열거하자면 송유하, 송유겸, 송유백, 송유상 정도의 순서일 것 같다.
송유백과 송유상은 못마땅함 가득한 기색이었다.
두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송유하를 향해서도 대놓고 그런 기색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이 송유하를 못마땅해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침에 발표된 승반 심사 결과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승반에 실패했는데, 송유하만 유일하게 승반에 성공했다.
더욱이 송유하는 이번에 제대로 사고를 쳤다.
심사 결과 두 단계 승반이 결정된 것이다.
두 단계 승반이 쾌거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경이로운 업적까지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두 단계 승반한 관도가 여섯 명이라고 들었다. 하위 반의 관도들일수록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류 수준에서는 갑자기 빠르게 발전하는 시기들이 있는 법이니까.
개인적으로도 송유하가 승반을 하고도 남을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두 단계를 승반해버려서 나 또한 놀라긴 했다.
내 공로가 적지 않았기에 뿌듯하다.
“기억을 잃었었다지?”
나를 째려보던 송유백의 첫 마디였다.
이놈아, 네 쓰린 심정은 알겠는데, 두 단계 승반한 누이에게 빈 말이라도 축하 인사 정도는 먼저 건넬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랬습니다.”
“정말로 내 얼굴도 기억을 못 하는 거고?”
“예. 그러나 형님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인사 올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천천히, 나름 공손해 보이게끔 목례를 했다.
고개를 들면서 보니 송유백의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우가 못난 꼴을 보여 염려를 끼쳤습니다. 송구합니다. 그간 너무 혼란스러워서 적응기가 필요했고, 어느 정도 적응했을 때는 형님이 수련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해서 이제야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점도 송구합니다.”
되었다. 이 정도면.
나는 일전에 아우인 송유상이 건방지게 구는 모습을 보고 아예 연을 끊자는 식으로 상황을 몰아갔었다. 그랬던 만큼, 형인 송유백 앞에서도 최소한의 명분은 챙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공손하게 대한 것이다.
“너······, 말투가······.”
송유백이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내 말투가 너무 공손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놀란 모양이고.
“이전에는 형님께 어떤 식의 말투를 썼었는지 몰라서······.”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이게 진짜 심각한 거구나?”
발언만 보면 염려하는 느낌의 발언인데 표정은 잔뜩 한심해 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던데, 네 경우에는 아닌 모양이구나?”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은 이 상황에 적응하려고 계속 노력 중입니다.”
“혹시 이미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아닌 척하고 있는 건 아니고?”
“······그렇게 보이십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구나. 말투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피하는 느낌 없이 내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것도 그렇고.”
대개 말대꾸로 꼬투리를 잡는 자들은 대답을 안 하면 또 그걸 갖고 꼬투리를 잡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인 채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송유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한테는 왜 그랬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