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5
일전에 내가 송유상에게 의절을 선언한 일에 대한 질문이다.
“기억을 잃은 후로 처음 마주친 자리에서 다짜고짜 저를 조롱하더군요. 다른 이들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저를 대하는 모습이 아우 같지도 않고 가족 같지도 않았습니다.”
“네 평소 행실이 오죽 한심했으면 셋째가 너를 그렇게 대했겠느냐. 너 때문에 우리 형제가 평소 얼마나 창피를 당하며 사는지 모르지 않을······. 아, 너는 그것도 기억을 못하는 거지, 참.”
피식 웃어 보인 송유백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참 편리하겠구나. 그 전의 한심함을 기억을 못한다고 하면 지금의 네 입장에서는 그걸로 끝일 테니까.”
에이, 씨.
과거의 송유겸이 했던 잘못이긴 하나, 이런 식으로 몰리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송유백과 송유상이 함께 있는 그림을 보고 나니, 저들과 엮인 송유겸의 삶도 힘겨웠을 거라는 연민이 든다. 송유하에 대한 연민도 생기고.
“기억을 잃은 직후면 차분히 과거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먼저 파악할 일이지, 단순히 그 상황에서의 감정만 가지고 그따위 건방진 결정을 내려?”
당시에 내가 송유상에게서 느꼈던 심정을 떠나, 장남인 송유백의 입장에서 저 정도가 못할 말은 아니었다.
한데 느낌이 뭐라고 할까, 어른한테 혼나고 있는 것 같다.
뭐라고 반박을 하면 꼬투리를 계속 잡혀서 나만 점점 더 곤란해질 것 같은 느낌.
그렇다. 이 놈은 어리지만 꼰대다.
“형이라는 놈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기억만 내다 버린 게 아니라 개념도 내다 버렸냐?”
푸훕! 말하는 꼴 보소? 같잖은 놈 같으니.
뭐라고 대꾸를 해주는 게 좋을까.
여차하면 저놈과도 연을 끊으면 그만이니 슬슬 막 나가?
아직 고민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어린 꼰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식이 왜 대꾸가 없어? 네놈이 셋째한테 한 일이 지금, 잘했다는 거냐?”
역시나 대꾸 안 하면 또 그걸 갖고 뭐라고 할 거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어린 꼰대에게 말했다.
“아, 단순히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럼 그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옳았겠습니까?”
어린 꼰대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아우라는 놈이 제 놈의 벗들과 형의 벗이 있는 자리에서 형을 조롱하고 있는데, 그냥 못 들은 척 지나가야 합니까? 잘 모르겠어서 그럽니다. 현명한 형님이 답을 좀 알려주십시오.”
“훗! 그러게 네 놈이 평소에 행실을 똑바로 했어야지.”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습니까. 현명한 형님께서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해 주셔야 이 우매한 아우가 배워서 앞으로 고쳐갈 게 아닙니까. 그래야 말씀하신 평소 행실도 똑바로 할 수 있을 테고요.”
송유백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나를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당연히 내 눈에는 애들 장난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네놈이 지금 나를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감히 천한 핏줄 따위가 어디서 지금······.”
에라, 이 자식아. 결국 그거냐?
“몰라서 질문하니까 시험한다고 뭐라고 하고. 답을 제시해 달랬더니 이 일과 상관도 없는 핏줄 얘기나 하고.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네 놈이 정녕 기억을 잃으면서 정신줄까지 놨구나?”
“기억만 잃었습니다. 정신줄은 잘 잡고 있고. 사실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새끼가 근데!”
송유백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내게 빠르게 달려들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오! 폭력이야? 좋지!
내가 또 폭력을 엄청 좋아하거든.
태생이 마교 출신이라서 말이다.
뺨을 때리기 위해 날아오는 손바닥의 손금까지 보인다.
놈은 빠르게 휘둘렀을 테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이놈아, 동작이 너무 크잖아.
무게중심도 너무 앞으로 쏠려 있고.
나는 겁먹은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송유백의 공격을 피할 만큼만 몸을 움츠리며 곁눈질로 송유백의 발을 확인했다.
쉬익-
놈의 손바닥이 머리 위쪽을 스쳐지나갈 즈음, 나는 자세가 무너진 척 휘청거렸다.
“어이쿠!”
놀란 음성을 내뱉으며 놈의 디딤 발을 밟자, 놈의 신형이 뒤뚱거리며 앞으로 기울었다.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쏠려 있었던 탓이다.
놈도 무공을 익힌 몸이라 이쯤은 가만히 놔두면 어느 정도 대처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게끔, 나는 여전히 휘청거리는 척하며 놈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놈의 상체가 앞으로 쏠려 있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휘청거리는 입장에서 뭐라도 붙들려는 모양새로 보이기 위해 온갖 애를 쓰면서.
“어어······!”
그 상태에서 당황한 척 음성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놈과 나의 몸뚱이가 얽혀서 바닥을 향해 빠르게 기울었다.
몸을 비틀었기에 내가 위쪽이고, 놈이 아래쪽이다.
좋아.
지금까지는 아주 자연스러웠고.
몸이 겹친 채로 쓰러지려는 중에도 나는 본능적인 방어 동작을 취하듯, 한 팔을 빼서 하박을 놈의 가슴께에 댔다.
하다 보니 하필 팔꿈치의 위치가 놈의 명치쯤인데, 이거 괜찮겠지?
쯧. 알게 뭐냐.
이게 다 사고로 포장하려는 건데, 뭐. 괜찮겠지.
팔꿈치를 아예 놈의 늑골 위쪽으로 옮길까 생각도 했지만, 저녁때의 일정을 생각해서 참았다.
대신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오른쪽 무릎을 잔뜩 끌어 올려서 놈의 가랑이 사이에 오게 했다.
이게 바로, 포개어진 우리의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의, 내 마지막 행동이었다.
철퍼덕!
“악······!”
“커헉······!”
나는 하나도 안 아프지만 당황한 듯 소리를 질러 주었다. 놈의 신음도 함께 터져 나왔다.
놈의 눈알이 홰까닥 뒤집히기 일보직전인 것을 보면 아프긴 아픈 모양이다.
“끄으윽······.”
명치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호흡이 곤란할 텐데,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사타구니 쪽일 것이다. 내 오른쪽 무릎에 확실한 감각이 전해졌으니까.
“혀, 형님······!”
당황한 듯 외치며 상체를 일으켰고, 마지막으로 모른 척 오른쪽 무릎에 무게를 실었다.
“끄어억······.”
“헛!”
동시에 나조차도 놀란 듯 오른쪽 무릎을 떼며 최대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하하하하하하!
성취감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좋았어. 아주 좋았어. 완벽했어.
송가장 장남의 하찮은 씨앗 따위, 앞으로 어찌 되든 내가 알 게 뭐란 말이냐. 장남의 씨 주머니가 나중에 제구실을 하든 말든, 이 몸과는 일절 상관이 없는 일이란 말이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운 송유백의 몸이 새우 등 굽듯 굽어졌다. 어느새 놈의 한 손은 가슴팍으로, 다른 손은 사타구니로 향해 있는 상태였다.
호흡도 곤란하겠지만 가슴팍도 상당히 아플 것이다.
팔꿈치뿐만 아니라 내 하박 전체가 놈의 가슴팍에 충격을 가했으니까.
그러나 당장 더 고통스러운 건 아래쪽이겠지.
“혀, 형님······! 괘, 괜찮으십니까? 이, 이게 응급처치를 하는 방법이 그러니까······.”
탁! 탁! 탁! 탁! 탁!
나는 당황해서 응급처치를 하는 척, 손바닥으로 송유백 놈의 궁둥이를 몇 대 때려 주었다.
놈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끄으윽. 그, 그만······. 이 샊······.”
“그, 그게 이쪽 급소에 대한 응급처치는 이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 말을 한 후 빠르게 고개를 돌려 송유상 놈에게 물었다.
“아니오?”
“나, 나도 그렇게 알고 있기는 한데······.”
“그럼 뭐하시오? 얼른 와서 형님을 도와드리지 않고?”
송유상 놈이 다가오는 가운데, 나는 송유하에게도 눈짓을 보내어 돕게 했다.
송유하가 송유백의 상체 쪽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큰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가슴도 아프신 거예요? 여기에요? 아니면 여기에요?”
“끅! 끄윽······! 아프······!”
송유하가 송유백의 가슴팍 쪽에 손을 댈 때마다 송유백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나는 보았다.
송유하의 손이 송유백의 가슴팍을 필요 이상의 힘으로 꾹꾹 누르는 모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동자에는 염려가 가득 담겨 있는 가증스러운 모습을.
저, 저거 사악한 것 좀 보소?
그 정도 사악함이면 야, 당장 천마신교에 가도 적응이 필요 없겠다, 야.
송유상과 함께 좌우에서 송유백의 양팔을 둘렀다. 그 후에 송유백을 일으켜서 의자에 앉혔다.
의자에 앉히자마자 내 뒷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송유백의 손바닥을 느낄 수 있었다.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아플 만한 강도가 아닌데다가, 내가 놈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뭐.
놈도 약간이나마 분을 풀기는 풀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이 상황도 대충 넘어갈 수 있을 테고.
“이 샊······!”
탁!
내 뒷머리를 때리자마자 송유백이 다른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악!”
푸하하! 때린 놈이 고통스러워하는 꼴이라니.
“크, 큰 오라버니, 늑골 하나가 부러진 것 같으니 조심하시라고 제가······.”
송유하가 얼른 송유백을 부축하며 그렇게 말했다.
나 또한 송유백한테 맞은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나를 향해 송유백이 인상을 구긴 채로 말했다.
“너 이 새끼, 너, 일부러 그랬지!”
“오, 오해십니다, 형님. 몸이 휘청거리는데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형님을 붙들었던 겁니다. 무공도 제대로 안 배운 제가 어떻게 일부러 그러겠습니까.”
온갖 억울함을 담아, 호소하듯 대꾸해줬다. 이어서 곧바로 송유상을 향해 물었다.
“아니, 귀하가 보기에도 내가 일부러 그런 것 같았소?”
“그, 그게······.”
머뭇거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말에 동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송유상은 내 정면에 있었고, 내가 모든 과정에서 계속 당황하는 모습을 제대로 지켜봤으니까.
송유백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죄송합니다,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새끼야, 확······!”
놈이 마지막에 한 팔을 들어올리기에 나는 과장되게 움찔하는 척했다.
“윽······!”
놈이 팔을 내리며 다시금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러게 이놈아, 다쳤으면 조심을 해야지.
흐흐. 그래도 이놈아, 내가 쫄은 척 해주니까 기분은 좀 풀리지?
“그래가지고 가족 모임은 어쩝니까. 장남이 다쳤으니 아무래도 취소를······.”
“이 새끼야, 뭐 이딴 걸로 취소까지 해!”
“아니, 방금 전에는 몸이 안 괜찮다고 하시기에······.”
내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시선을 피하자 송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오라버니, 시간상으로는 슬슬 출발할 시각이에요.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으시는 게······.”
“시끄러! 어른들이 오랜만에 옥산까지 오시는데 어떻게 안 가? 천천히라도 어떻게든 가야지!”
“그러면 잠시 잠룡관의 의원에 들러서 응급처치라도 받고 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든가······!”
송유하의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송유백이 기어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들 내가 다쳤다는 건 어른들한테 말하지 말고!”
꼴에 또 장남이라고 오랜만에 뵙는 어른들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우리 사남매의 목적지는 옥산의 번화가.
가족 모임 때문이다.
오늘이 바로 송가장주와 부인, 그리고 총관이 옥산으로 오기로 한 날이었다.
옥산에서 가장 큰 무원객잔의 삼 층 귀빈실을 예약해 놓았다는데, 이는 원래 송유백 내지는 송유상의 승반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알고 있다.
결과 발표가 된 날 일단 축하를 하고, 만약 송유백이 정반으로 승반한 경우에는 곧바로 장원에서 잔치를 열 계획이었다나.
잔치는 텄고.
승반하라는 두 형제는 승반을 못하고 애먼 송유하만 두 단계나 승반을 해버렸으니, 이따가 소식을 듣게 될 어른들의 분위기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참고로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가문에도 알렸다.
나흘 전에 송가장에서 잠룡관에 사람을 보내왔었다.
어른들이 옥산에 나온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우리 사남매의 방학 시기 계획을 미리 조사해가기 위함이었다.
그때의 인편을 통해 내 상태를 전했던 것이다.
어차피 가문의 어른들과 곧 만나게 된다면, 이쯤에서 내 상태를 알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아까 일부러 큰 오라버니가 다치게끔 만드신 거죠?]
옆에서 걷던 송유하의 전음이었다.
[에이, 설마. 누이가 오해가 크네.]
[다른 사람들 눈은 속여도 제 눈은 못 속여요.]
[그러는 누이도 아까 형의 가슴팍을 세게 꾹꾹 누르던데.]
송유하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설마요. 제가 어찌 감히. 오라버니도 오해가 크시네요.]
정곡을 찔려서 흠칫할 거면 애초에 잡아 뗄 생각을 하지 마, 요것아.
그 즈음 앞서서 걸음을 옮기던 송유백이 뒤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너 이 새끼.”
“예.”
“이따가 의절 얘기 같은 거 꺼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사실 나는 상관없는데.
그래도 장남이라고 집안 분위기를 생각해서 저리 말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얘기가 나오면 어른들이 잘잘못을 따질 텐데, 내가 직접 항변하면 어차피 송유상의 잘못이 밝혀지게 될 테니 미리 저런 말을 하는 거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송유상을 보호해 주려고.
거기에 더해서 장남이 뭘 하고 있었느냐는 식의 책임 추궁까지 당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저들의 입장에서는 의절 이야기가 안 나오게 하는 게 좋은 거다.
가뜩이나 둘 다 나란히 승반에 실패한 마당이니까.
“왜 대답이 없어?”
“그리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해줬는데도 송유백은 한동안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몸만 성했으면 당장에라도 내게 달려들 기세였다.
아서라, 이놈아.
그러다가 다음에도 오늘과 비슷한 사고가 나면, 네놈의 사타구니만 또 횡액을 당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