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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마교있다-16화 (16/416)

내 안에 마교있다 16

사 층 건물인 무원객잔의 일 층으로 들어섰다.

옥산에서 가장 큰 규모라더니 실제로 보니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일 층에서 돌아다니는 점소이들만 해도 수십 명에 달했다.

근처에 무림맹 동부지맹과 잠룡관이 있으니 이렇게까지 큰 규모로 시작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광풍현 송가장에서 예약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깨끗하게 차려입은 점소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송가장의 귀한 자제분들이시라고 들었습니다요. 어른들께서는 이미 도착해 계시니, 제가 바로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요.”

송가장은 작은 현의 유지 가문 정도에 불과하나, 이곳 옥산의 바로 옆 고을이 광풍현이다. 그렇기에 옥산에서도 웬만하면 송가장을 아는 모양이었다.

점소이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서 보니, 넓은 개방형 공간인 일 층에 손님들이 거의 들어차 있었다.

이 층 또한 일 층만큼 넓은 개방형의 공간이었다.

다만, 탁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일 층과 달리, 이 층은 탁자들이 한적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장식도 일 층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공간의 곳곳마다 관상수가 배치되어 있어, 한 층 더 정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송유하에게서 들었는데, 삼사 층은 각각 귀빈들과 최고 귀빈들을 위한 곳이며 크고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실내도 고급스럽고 방음 처리도 잘 되어 있어, 그게 동부지맹을 찾는 귀빈들의 발길을 사로잡은 모양이다.

삼사 층을 통해 백도 무림의 유명 인사들을 확실하게 붙들고, 그들을 구경하러 일반 손님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게 하는 장사 전략이다.

이 층의 실내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삼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는데, 왠지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보였다.

지금의 내 위치에서 제법 떨어진 창가 쪽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그 두 사람 모두 죽립을 쓴 상태였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오른쪽 뒷모습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친한 인물.

바로 길초량이었다.

길초량의 맞은편에 한 사람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인물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 역시 죽립을 썼기에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얼굴은 눈언저리부터 그 아랫부분이었다.

한데 왠지 모르게 낯익은 모습이다. 그것도 상당히.

천마신교의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백도인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천마신교에 있을 당시에 알고 있던 용모라고 봐야 한다.

저 모습만으로 정체가 당장 떠오르지는 않으니 제법 오래전에 봤던 얼굴일 테고, 그럼에도 이 정도로 내 기억에 남은 용모라면 제법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다.

누굴까.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오라버니.”

내가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계단의 대여섯 칸 위에서 송유하가 나를 부르고 있다.

“아, 어. 알았어.”

마지막으로 죽립 사내의 얼굴을 뇌리에 담은 후,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삼 층으로 올라와서도 죽립 사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적으로 송유하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는데, 어느 방의 문 앞에서 송유하가 멈춰 섰다.

수수한 옷차림의 삼십대 중반 여인이 문 옆에 서있었는데, 그녀와 송유하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모가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인데, 그 얼굴을 보니 곧바로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진다.

딱 송유하를 연상하게 하는 이목구비였으니까.

송유하의 친모인 것이다.

역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구나.

송유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오셨어요.”

가만있자, 송유하의 친모 이름이······.

그래, 진양옥이었다.

“보아하니 잘 지낸 모양이네.”

“네. 어머니도 잘 지내셨죠.”

“응. 그럼.”

“어머니도 오실 줄 몰랐어요.”

“장주님이 허락해 주셔서.”

그 말에 송유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양옥도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들어가 봐. 다들 기다리고 계신다.”

“네.”

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진양옥을 바라보던 송유하가 이윽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죽립 사내 생각을 하다가 뒤쳐져 있었기에 내가 일행 중 마지막이었다. 송유하마저 문 안으로 들어서자 진양옥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내가 어색한 인사를 건네자 진양옥이 양손으로 내 왼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들었다. 기억을 잃었다면서? 괜찮은 거니?”

표정과 어조에 진심어린 염려가 담겨 있다.

나흘 전에 내 소식을 알렸으니 그걸 들은 거겠지.

“내가 누군지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

“방금 전에 누이랑 대화하시는 걸 보고 누이의 어머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양옥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건강에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눈에도 예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니 일단 다행이구나.”

진양옥이 바로 말을 이었다.

“소식 듣고 장주님도 크게 놀라셨어. 왜 그런 소식을 이제야 전했느냐며 화도 내셨다. 당장 잠룡관으로 가시겠다는 걸 마님과 총관이 말리셨어. 어차피 곧 보게 될 테고, 승반 심사도 목전이었으니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건데,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지금은 장주님도 그렇게 이해하시는 모양이야. 어쨌든 들어가서 처신 잘 하고······. 그래, 어서 들어가 봐.”

“예.”

분위기를 보아하니 진양옥은 동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진양옥에게 말했다.

“아, 참.”

진양옥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누이가 이번에 두 단계나 승반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저 또한 누이가 매우 대견스럽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진양옥에게 목례하고 돌아섰다.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녀가 마음껏 기뻐하길 바라면서.

진양옥의 양손에서 느껴지던 온기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서무욱이었던 나는 고아 출신이었기에 이런 종류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애틋한 느낌이 드는 포근한 온기.

나를 아껴주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온기.

송유하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잘 큰 건지 확실히 알 것 같다.

* * *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 개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방 안에 모인 인물은 나까지 총 일곱 명.

네 명은 우리 사남매니, 남은 세 명이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모두 원형 탁자의 안쪽에 앉아 있었는데, 처음 보는 인물들이나 그들이 각각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세 명의 어른들 중에서 중앙에 앉아 있는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당연히 송가장주일 것이다. 딱 봐도 사남매의 부친이라는 걸 알겠다.

그의 이름은 송천광이다.

송천광의 왼편, 내가 보는 방향에서는 오른편에, 마흔 즈음으로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딱 봐도 그녀가 송유백과 송유상의 모친이라는 걸 알겠다.

송가장의 안주인인 그녀의 이름은 동난향.

송유하의 친모인 진양옥의 차림새와 완전히 대비될 정도로,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이었다.

송천광의 오른편에는 사십대 초반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청수한 인상에 지적인 느낌을 주는 용모였다.

그가 바로 송가장의 총관인 이청오일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세 명의 어른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고 나자 송천광이 내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송구합니다.”

송천광의 표정이 충격이 담겼다.

“하오나 누구신지는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송천광은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여인, 동난향이 내게 말했다.

“당연히 내 얼굴도 못 알아보겠구나?”

“송구합니다. 물론 누구신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총관 이청오가 말했다.

“나도 못 알아볼 테지······?”

“예. 송구합니다. 그러나 총관 어른이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허어, 총관 어른이라니, 어찌 이런 일이! 겸아, 너는 나를 숙부님이라고 불렀었다······.”

그게 송가장 어른들과의 첫 대면이었다.

요리들이 차례로 나오는 가운데 대화가 오갔다.

대체로 쳐진 분위기였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송유백과 송유상의 승반 실패 소식이 전해진데다가, 기억을 잃은 나의 상황까지 더해지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기억을 잃게 된 상황과 그 후의 상황에 대해 어른들이 여러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 질문에 열심히 답했다.

그 때마다 어른들의 여러 반응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장주 송천광은 질책하거나 안도하기를 반복했고, 부인 동난향은 한심함 가득한 눈초리로 힐난하는 쪽이었으며, 총관 이청오는 타이르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들을 해주었다.

어른들은 모두가 심각한 분위기였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심각할 게 없었다.

보는 시선이 많으니 진지한 척만 해줬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내 옆에 앉은 송유하 때문에 놀랐다.

송유하는 실내의 일곱 명 중에서 분위기에 거의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젓가락질을 계속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소리 없이 잘 먹는다.

한데, 남들의 시선을 잘 안 끄는 게 신기했다.

어려서부터 고도로 훈련된 눈칫밥의 성과인 건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거리낄 게 없다는 자신감이 자연스러움으로 승화된 건가?

다치고 기억을 잃었던 나를 보살핀 것도 송유하고, 오라비들이 다들 승반에 실패했는데 유일하게 승반한 사람도 그녀다. 거리낄 게 없긴 할 것이다.

하여간 잘 먹는다.

기억을 잃은 내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묵묵히 요리를 입에 담아 넣고 있던 송유하를 향해 송천광이 물었다.

“유하가 보기에는 유겸이의 상태가 어떤 것 같으냐?”

송유하의 젓가락질이 드디어 멈췄다.

“네가 옆에서 돌보며 그 후에도 꾸준히 지켜봤다면서? 그러니 네 의견을 묻는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송유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은 게 물론 큰일이긴 한데요. 둘째 오라버니는 기억을 잃은 후에 모든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기억을 잃기 전과는 비교조차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어른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송유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기억을 잃은 후부터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어요.”

어른들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송유겸이 장기간 술을 마시지 않은 게 상당히 놀랄만한 일인 모양이다.

“매일 새벽과 저녁에 구보를 하는데, 날이 궂어도 쉬는 법이 없어요. 게다가 하루 종일 잠룡관의 서고에서 살다시피 해요. 매일 그래왔어요. 요새는 무공 수련도 열심히 하고요.”

어른들은 완전히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전의 송유겸을 생각하면 이게 저렇게나 놀랄만한 일인가 보다.

송천광이 내게 물었다.

“저 말이 사실이냐?”

“예. 기억을 잃기 전에 제가 어땠는지에 대해 들었는데,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과했구나 싶어서······. 어차피 이전의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김에,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선에서 뭐라도 부지런히 해보자는 정도입니다.”

동난향의 엷은 미소에는 모종의 가소로움이 담겨 있었고, 이청오는 대견해하는 표정이었다.

송천광은 지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인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저 눈빛에 적어도 나쁜 쪽의 감정이 담겨 있지는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고 화제도 전환되었다.

“갑을병정 반에 들어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차분히 준비해서 다음에 또 도전하면 될 일이지. 낙심하지 말거라.”

송유백을 향한 송천광의 말이었다.

“예, 아버지.”

송천광의 말마따나 제대로 된 무가도 아닌 송가장 출신으로 갑을병정 반에 들어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송유백도 그다지 기가 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송천광이 이번에는 송유상에게 말했다.

“유상이 네가 승반하지 못한 건 약간 의외이긴 하구나. 반이 위로 올라갈수록 승반하기가 까다로워지지. 그러니 아랫반일 때 미리 한 단계라도 위에 올라가 있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 텐데, 방심이라도 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소자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봅니다.”

송유상의 처지가 매우 애매해지기는 했다.

경반이었던 송유상은 기반으로 승반할 차례였는데 미끄러졌다.

대신 한 단계 아래에 있었던 막내 송유하가 두 단계를 승반하여 기반이 되었다. 송유상을 앞질러버린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서 내년 상반기 승반 심사는 제대로 치도록 하거라. 이번처럼 방심하지 말고.”

“예, 아버지.”

“얘, 주눅들 필요 없다. 너랑 같이 입관한 누구는 만년 꼴찌 반에 있는데, 뭘.”

마지막은 동난향의 말이었다.

저기요, 아줌마. 왜 갑자기 가만히 있는 나를 끌어들이는 거요? 승반 못한 건 댁의 아들들 탓이지 내 탓이 아니지 않소.

송천광과 이청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동난향의 말이 신경 쓰이는지, 약간의 측은함이 담긴 시선들이었다.

예전의 송유겸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동난향의 말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유치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젓가락을 놀려 큼지막한 돼지고기 한 조각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근래 체질 개선을 위해 맛있는 걸 참으며 살았더니, 고기 맛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단맛과 짠맛과 매콤함이 아주 잘 조화되어 있었다.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송천광과 이청오의 눈동자에 이채가 살짝 스쳐 지나갔다.

송천광이 송유하를 향해 말했다.

“유하는 잘 했다. 지금처럼 정진하거라.”

“예, 아버지.”

대꾸한 송유하의 입속으로 돼지고기 한 조각이 직행했다.

볼 때마다 얘는 살코기 위주로만 잘도 집어먹는단 말이야. 딱히 뒤적거리지도 않는데.

송유하를 칭찬하는 말은 매우 짧았지만, 송천광이 매우 기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들들을 배려해서 짧게 말했을 뿐이지, 그의 입은 거의 귀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송천광의 기분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첩이 낳은 여식을 잠룡관에 보내면서 무슨 대단한 기대를 걸었겠는가.

그래도 송유하가 용모는 뛰어나니 적당한 가문들과 얽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겠지.

한데 그런 송유하가 쭉쭉 승반하여 이미 여섯 번째 반인 기반으로 승반해 버렸다. 앞으로 두 단계만 승반하면 갑을병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송유백도 이번에 실패했으니, 갑을병정에 들어가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알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송유하는 아직 일 년차니까.

송천광의 입장에서는 송유하가 갑을병정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혼담이 오가는 상대의 수준이 달라질 테니까.

그런 행복한 상상을, 어느 정도는 하고 있겠지.

“생긴 것만 반반해서 어디에 쓰나 싶었는데, 그나마 잠룡관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 덕분에 저 생김새가 더 쓸모가 있어졌으니.”

동난향의 말이었다.

송유하가 저 여자의 뱃속에서 안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용모도 지금보다 덜했을 텐데 성격은 더 안 좋았겠지.

만약 송유하가 저 성격을 닮았으면 이미 의절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 아줌마 저거, 본인 뱃속에서 안 나온 자식이면 무조건 다 물어뜯고 있네.

좀 조용히 시키고 싶은데 기회가 있으려나.

“기억을 잃고 난 후에는 신체 단련도 하고 나름 무공 수련도 했다면서, 너는 왜 승반 심사를 치지 않은 것이냐?”

나를 향한 송천광의 물음이었다.

“기억을 잃은 후의 생활에 적응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해서, 일단은 안정적으로 적응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이번에는 동난향이 조롱 섞인 미소를 지은 채 내게 물었다.

“승반 시험을 쳐봐야 통과할 자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고?”

“말씀하신 면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습니다.”

내가 동난향의 말에 당당하게, 그것도 수긍하는 모양새로 대꾸하자, 동난향이 오히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전의 제 무공 수준도 보잘것없었다고 듣긴 했습니다. 기억까지 잃은 마당이니 저는 현재 무공에 있어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나마 의욕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호기롭게 승반 심사를 치렀다가 괜히 의욕만 꺾이지나 않을까 우려스러웠습니다.”

어른들을 향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해서 적응도 더 하고, 꾸준히 준비한 후, 어느 정도의 확신이 섰을 때 승반 심사를 칠까 합니다. 스스로의 동기부여를 위해서도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무공을 배우는 데도 다 시기가 있다던데, 그 나이에 아직 걸음마 단계면 언제 발전해서 또 언제 승반 시험을 친단 말이니?”

동난향의 말이었다.

아까 내가 열심히 한다는 얘기를 듣고 송천광과 이청오는 매우 반기는 분위기였었다. 그걸 좀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동난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줬다.

“아. 그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었으면 역시, 열심히 해 봐야 안 되는 거겠지요? 어차피 안 되는 거면, 음······. 굳이 노력을 해도 의미가 없을 테고, 음······.”

마지막에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척 그렇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보니 송천광의 인상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송천광이 동난향을 향해 말했다.

“부인, 다쳐서 기억마저 잃은 아이한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소?”

“아니, 쟤가 기억을 잃은 게 제 탓도 아니고······.”

“내, 참!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소!”

결국 송천광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그쯤 되자 동난향도 약간이나마 꼬리를 내리는 모양새였다.

“어찌되었든 이전과 비교하면 태도도 나쁘지 않잖소. 힘든 일을 겪고 난 후 스스로 알아서 뭔가 노력을 해보려는 모양인데, 굳이 그런 식으로 기운 빠지게 할 필요가 있소?”

“아니, 제가 꼭 그러자는 게 아니라, 저 아이가 현실적인 면을 알아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

“어허!”

송천광이 다시 한 번 언성을 살짝 높이자 결국 동난향이 꼬리를 완전히 내렸다.

어쨌거나 상황이 대충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오니 고소하다.

후후. 그래요, 아줌마. 지금처럼 조용히 좀 계셔.

송천광이 나를 향해 말했다.

“너도 이 녀석아. 사내 녀석이 마음을 다잡았으면 어떻게든 밀고 나갈 생각을 먼저 해야지, 주변의 평가가 박하다 해서 어찌하여 나약한 마음부터 갖는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저도 아직 저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저를 오래 지켜봐온 분들의 평가에 자연스럽게 귀가 기울여져서······. 앞으로는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송천광이 동난향을 한 차례 더 째려보았다.

그 시선을 외면하며 동난향이 열심히 젓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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