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7
잠시 측간에 갔다 왔더니 방학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송유백은 친구들과 남창에서 방학을 보낼 모양이다.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에게 남창과 포양호와 여산 등을 안내해 주기로 했다나.
내가 볼 땐 방학동안 친구들과 함께 남창에서 실컷 놀겠다는 뜻이다.
송유상의 경우에는 친구들 몇 명을 방학 동안 송가장으로 초대한 모양이다.
두 사람의 계획을 들은 송천광이 내게 물었다.
“너는 왜 굳이 잠룡관에 머물려는 것이냐? 기억을 잃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장원으로 돌아와서 안정을 좀 취하다가 복귀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원래는 잠룡관의 서고에서 독서하며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한데 이제는 다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잠룡관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이에 나는 제갈수광이 부탁한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내 설명이 끝나자 송유하가 말했다.
“어쩌다보니 저도 그 일을 부탁받아서 장원에 못 가게 됐어요. 오라버니와 한 나절씩 서고 관리를 맡기로 했어요.”
그러자 송유백이 우리를 향해 말했다.
“제일서고면 너희들은 애초에 출입 자격이 없지 않나? 방학 때 무슨 딴 짓이라도 하려고 핑계 대는 건 아니지?”
인마, 그러는 너는 제일서고 출입 자격이 있고?
내가 제갈수광한테서 받은 증명서를 꺼내자 송유하도 같은 문서를 꺼냈다.
송천광이 문서를 받아서 빠르게 훑더니 이청오에게 넘겼다.
“제갈수광? 제갈세가의 인물인가? 기억이 잘 안 나네.”
송천광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묻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이청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더니 곧바로 내게 물었다.
“겸아, 이 제갈수광이라는 인물이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더냐?”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습니다만······.”
내 말을 듣고 증명서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이청오가 송천광을 향해 말했다.
“그 정도 연령대에 이 정도 명필이라면, 이 제갈수광이라는 인물은 아마도 현 제갈세가주의 사촌동생일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는데, 송천광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글씨 잘 쓰는 것에 비해 역량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가 보군. 제갈세가주의 사촌동생임에도 잠룡관의 제삼서고 같은 곳에서 관리자 역할이나 하고 있는 걸 보면. 어쨌든 그 정도 되는 자의 부탁이니 들어줘야하겠지만.”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제갈수광은 저처럼 학문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촌임에도 불구하고 현 제갈세가주가 아꼈다고 들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오, 그런가? 그 정도 인물이라면 잘 보여서 나쁠 건 없겠지.”
이청오의 말을 들으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별 볼일 없는 방계라던 그 한심한 장년 제갈수광이, 현 제갈세가주의 사촌동생이라고?
게다가 제갈세가주가 아낄 정도로 총명했다고?
아무리 방계라도 제갈세가 출신이면 무공도 제법 익혔을 터였다.
그럼에도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 건 그가 제갈세가의 인물임을 몰라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던 탓이다.
항상 숙취에 시달리며 탁자에 엎어져 있거나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모습만 봤으니, 자세나 기도 등을 통해 경지를 파악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백도는 참 신기한 곳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유명한 문파나 세가나 가문 등이 워낙 많으니, 대충 지나치는 관계 속에도 의외의 인물들이 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며 식사가 계속되었다.
송천광은 자식들이 잠룡관에서 새로 사귄 인맥들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리고 송유백과 송유상은 아주 신 나서 본인들의 친우관계를 자랑해댔다.
송유하 차례가 되자 그녀가 말했다.
“저는 그냥······, 여관도들과 두루두루 무난하게 관계를 쌓으며 지내고 있어요.”
그러자 동난향이 말했다.
“쟤 좀 봐? 잘 나가는 집안 출신에게 네가 먼저 열심히 다가서서 친분을 쌓으려고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들이 너를 떠받들어주기라도 하는 줄 아니? 잠룡관에 매일 붙어 있을 때 더 친해질 생각을 해야지, 거기 벗어나면 그럴 기회라도 생기는 줄 알아?”
본인 뱃속에서 나온 아들들이 친분관계 자랑을 할 때는 신 나서 맞장구를 쳐주더니, 송유하에게는 저렇듯 바로 태세 전환이다.
한데 송천광 또한 동난향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송가장의 어쩔 수 없는 입장과 어른들의 논리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너무 눈에 빤히 보이는 근시안적인 행태라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쨌거나 집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송유하도 참 피곤한 인생을 살았겠구나 싶다.
“누이의 경우에는 알아서 하도록 놔둬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불쑥 입을 열자 송천광과 동난향이 찡그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렇듯 나선 이유는 송가장 따위에서의 내 입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잃을 게 없는 입장이라 집안 어른들 앞에서도 거리낄 게 없다고나 할까.
“네가 뭘 안다고 나서?”
동난향의 물음이었고, 송천광도 동감이라는 듯 비슷한 눈빛이었다.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누이는 이미 잠룡오화로 유명해진데다가, 이번에 두 단계 승반한 일로 관도들 사이에서도 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이대로라면 나중에 갑을병정 반에 들어갈 가능성도 높잖습니까. 그 안에 들어가면 훨씬 더 좋은 인맥들이 자연스럽게 맺어질 테고요.”
송천광을 향해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이유로 세 분께서도 형이 갑을병정 반에 들어가기를 고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은 밉보이지 않는 선에서 주변 관계를 무난하게만 쌓아놔도, 그조차도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평가가 올라갈 텐데요.”
“그건······, 맞는 말이긴 하군요.”
이청오가 맞장구를 쳐줬다.
저 사람이라도 정상이어서 그나마 답답함이 덜하다.
“무공이라는 게 뭐, 시간만 지나면 알아서 쭉쭉 올라가는 거라니? 쟤가 갑을병정 반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그때 가 봐야 아는 거잖니.”
동난향의 말인즉, 사 년차를 채운 송유백도 갑을병정 반에 못 들어가고 있는데 송유하라고 해서 가능하겠느냐는 뜻이었다.
동의한다는 듯 송천광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해는 한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되는 게 당연할 테니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무공 경지가 계획하는 것처럼 딱딱 상승하는 건 아니지요. 그래도 입관 초년차에 세 단계나 승반한 경우도 흔치는 않으니, 무공 쪽의 가능성도 응원해봄직 하잖습니까. 당분간은 그쪽에만 정진할 수 있게끔 말입니다.”
“쯧. 남의 가능성이나 재고 있지 말고 네 가능성 생각이나 좀 더 하거라.”
아줌마가 또다시 상관없는 말로 딴죽을 걸었다.
“예. 명심하고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두가 알고 계신 말씀을 구태여 드린 것 같아 송구한 마음입니다.”
뭐, 내 할 말은 다 끝났으니 적당히 수그려주자.
나는 지금 송유하를 감싸주려 나선 입장이다.
여기서 내가 더 대서면 나에 대한 어른들의 감정도 불편해질 것이다.
나만 눈 밖에 나는 건 상관없으나, 내가 감싸려던 송유하에게까지 역효과가 미치면 그 또한 바보짓이다.
송천광이 말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 눈빛의 의미를 모르겠다.
방금 전의 내 이야기가 거슬리기라도 했나? 그 정도까진 아니었을 텐데.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이 살짝 열리더니 진양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송천광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아무리 봐도 이곳에 찾아 올 손님이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물론 나 또한 갑자기 무슨 손님인지 의아했다.
“유겸이의 잠룡관 친우라고 합니다.”
내 친구우우?
길초량이 떠올랐다. 아까 이 층에 있던 모습을 봤으니까.
의자에서 일어서며 송천광을 향해 서둘러 말했다.
“방해되지 않게끔 제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왜 그러냐? 어차피 잠룡관도인데 이참에 어른들께도 인사를 시키지 그래? 설마 친구가 부끄럽기라도 한 거야? 그러면 그 친구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것도 아니면 우리 집안이 부끄럽기라도 한 거야?”
송유백 놈의 말이었다.
저놈의 주둥이를 그냥 콱.
그런데 웬 걸, 그 말을 들은 송천광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네 잠룡관 친구면 잠시 들어오라고 하거라. 그렇지 않아도 네 친구 관계가 궁금하던 차였다. 너는 도통 네 친구들을 장원에 초대한 적도 없고, 그런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거든.”
“하핫. 괘, 괜찮습니다. 가족 모임에 괜히 방해가 되는 것도 그렇고······.”
길초량은 계반.
그가 일류고수라는 사실을 밝힐 수도 없으니, 괜히 길초량이 들어왔다가 기분만 상하고 가지 않을까 염려될 뿐이다.
“어허.”
송천광의 입에서 저 소리가 나왔으니 더는 거역할 방법이 없다. 송천광이 알아서 문 쪽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라 하게.”
“예.”
이윽고 문 안으로 들어와서 가림 막을 젖히며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내가 예상하던 길초량이 아니었다.
“어······?”
“아, 송 공자, 나요. 하핫.”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은 단목홍신이었다.
그의 뒤로 단목지도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 사촌남매가 갑자기 여기엔 어떻게 온 거지?
“두 분이 여길 어떻게······.”
놀랍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하다.
뒤에서 송유하도 일어서며 단목홍신과 단목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 두 분······, 이, 이렇게 뵐 줄은······.”
“송 소저도 안녕하시오.”
송유하와도 인사를 건넨 단목홍신이 약간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일단 어른들께 인사부터 올리는 게 좋겠지요?”
“예, 그, 그러시오. 가운데가 아버님이시고 그 양 옆에 계신 두 분이 어머님과 총관 어른이시오.”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에서 그렇게 대꾸하자 단목홍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나를 지나 어른들의 정면으로 나서자, 단목지도 그 옆에 섰다.
실내의 분위기를 슬쩍 보니 모두가 놀란 모습이었다.
어른들이 놀란 건 아마도 단목지 때문일 것이다. 그녀 또한 잠룡오화로, 흔히 볼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니까.
송유백과 송유상의 놀람은 다른 의미일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단목홍신과 단목지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겠지. 단목세가의 저 사촌남매가 이렇듯 내 친구를 자처하며 찾아왔다는 게 놀라운 것이고.
단목홍신이 포권하며 말했다.
“가족 모임 중이신데 결례를 끼쳐 송구합니다. 저희들은 잠룡관도로, 송유겸 공자와 송유하 소저의 친우들입니다. 저는 단목홍신이라 하고 옆은 제 사촌누나인······.”
“단목지라 합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매일 마주치며 친분을 쌓기는 했지만, 단목지의 육성을 듣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었던 탓이다.
그동안에도 단목지의 얘기는 모두 단목홍신이 대신 전해줬었다. 단목지의 전음을 들은 단목홍신이 그녀의 말을 우리에게 대신 전하는 그 방식으로.
한데 설마 그녀가 이런 순간에 목소리를 낼 줄이야.
단아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다. 발성도 좋고 발음도 또렷하여 듣기에 참 편안하다.
단목지마저 포권하며 그렇게 말했을 즈음에는, 송천광뿐만 아니라 어른들 모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져있었다.
“서, 성이 단목이라면······.”
“예. 누나의 부친이시자 제게는 백부님 되시는 분께서 현재의 세가주십니다.”
“어이쿠! 단목세가의 금지옥엽께서 이렇게 찾아와주다니!”
송천광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자 이청오가 말을 덧붙였다.
“단목홍신 공자 또한 무공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기재입니다.”
“그럼, 그럼! 이를 말이겠는가!”
어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란 상태였다.
비록 현재의 천하 십대세가에는 들지 못한다 해도, 단목세가는 이곳 동부지맹 안에서는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세가다.
송가장 수준에서는 관계를 쌓고 싶다 하여 쌓을 수 있는 주제조차 못 된다.
당연하다.
단목세가 정도 되는 이들이 뭐가 아쉬워서 송가장 따위와 관계를 쌓으려 하겠는가.
노는 물이 아예 다른,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서로 엮일만한 접점조차 없는, 그런 위치 차이다.
어른들이 저렇듯 호들갑을 떠는 것도 본인들이 그 사실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거고.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단목홍신이 대꾸하자 송천광이 물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찌 알고 왔는가?”
“아, 저희도 이곳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아까 이 방으로 들어가는 송 공자의 뒷모습을 누나가 우연히 본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임을 끝내고 나가는 길에 잠시 인사라도 드릴 겸 들른 겁니다. 문밖에 계신 부인께 여쭈어 확인했던 거고요.”
“아, 단목세가도 이곳에서 모였던 게로군. 말하는 걸 보니 벌써 끝나고 돌아가는 중인 모양이고.”
송천광의 어조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단목세가가 아직도 가족모임 중이었으면 이 일을 핑계로 당장 인사라도 하러 갔을 것 같다.
다행이다.
“예. 일찍부터 모였던지라.”
“그쪽 어른들은 강녕하시고?”
“예.”
“이 송 모가 안부 여쭙더라고 꼭 전해드리게.”
“그리하겠습니다.”
송천광이 나를 일견하더니 다시금 단목가의 사촌남매를 향해 물었다.
“한데 우리 유겸이와는 어떻게 친분이 생겼을꼬? 우리 유하와도 친우라고 하고.”
‘우리 유겸이’라니.
이 기특한 단목세가의 사촌남매 덕분에 내가 송천광의 입에서 저런 소리를 다 듣는다.
“아, 송유겸 공자와 먼저 알고 지내다가 이후에 송유하 소저와도 친해지게 된 겁니다. 송 공자와는 수련하는 길에 오가다 마주쳤는데, 잠시 이야기를 나눠본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서······.”
“우리 유겸이가? 허허. 무엇이 그렇던가? 친구들이 저 아이를 보는 모습은 어떠한지 궁금해서 그러네.”
“일단은 배려심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항상 당당했는데, 사사롭지 않은 그 당당함이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후에 알게 된 송 소저 또한 조용하지만 무리가 없는 성격이라, 모두가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된 겁니다.”
“오호, 그래애. 그렇단 말이지.”
“예. 잠룡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그 중에서 몇 안 되는 좋은 친우들입니다.”
“허허. 그런가. 허허허.”
나름 자제하며 웃으려는 모양인데, 송천광의 입은 또다시 귀에 걸리는 중이었다.
단목홍신이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말했다.
“아, 저희들이 장주님 가족의 소중한 식사 시간을 너무 방해한 것 같습니다. 인사도 드렸으니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아닐세, 아닐세. 방해라니. 무슨 그런 소릴. 더 있다 가게.”
“사실 저희들도 나가는 길에 잠시 인사하러 들른 터라, 어른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어이쿠! 그래, 그래. 그쪽 어른들을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 아쉽지만 어쩌겠나. 어서 가보게. 아 참! 언제 한 번 유겸이 저 아이와 함께 우리 장원에도 놀러와 주게나. 언제든 환영일세.”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단목홍신이 어른들을 향해 포권하자 단목지도 함께 포권했다.
“유, 유겸이는 뭐하느냐. 친구들이 생각해서 찾아와줬는데 예를 다해서 배웅해주지 않고.”
“예,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송천광의 말에 얼른 대꾸해준 후, 단목세가의 사촌남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단목홍신의 옆으로 붙어서며 말했다.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결례가 된 것은 아니지요?”
“결례라니요. 그저, 두 분이 찾아오신다는 건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라서.”
내가 대꾸하자 단목홍신이 말했다.
“송 공자,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오. 실은 어쩌다가 주워들은 게 있어서 말이오. 송가장에서 송 공자의 처지가 좋지 않다는 식의 말들을······.”
여러 가지가 궁금했지만 가장 궁금한 걸 먼저 말했다.
“다 떠나서, 상위 반인 두 분에게 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내가 들었어요. 여관도들 사이에서는 상위 반과 하위 반에 상관없이 여러 소문들이 금방 전해지곤 하거든요.”
단목지의 대답이었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다.
그나저나 이제 내 앞에서는 완전히 육성을 내기로 한 건가?
우리, 친해진 거야?
“하면 내 체면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셈이오. 실은 가족의 일이고 사생활이기도 한데, 송 공자의 생각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을 많이 했었소.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내가 기분 나쁠 게 뭐가 있겠소. 오히려 고맙지. 생각해 준 것도 고맙고, 내 체면 살려준 것도 고맙소.”
“그리 생각하신다니 다행이오.”
대꾸하는 단목홍신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단목홍신의 옆에서 걷고 있던 단목지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송 공자는 우리한테 빚진 거예요.”
생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데, 그녀를 제법 오래 봐 온 내 입장에서도 처음 접하는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예쁜 얼굴에, 저 표정에, 듣기 좋은 그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모습도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을 만큼.
“빚이라니, 너무하시오. 내가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이 빚을 어찌 갚는단 말이오?”
내가 농담으로 대꾸하자 단목지도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니 언젠가 능력 되실 때 받아낼게요.”
“보잘것없는 몸이라 평생이 걸릴 수도 있소.”
“오래 걸리면 그만큼의 이자 정도는 쳐서 받아내야겠죠.”
“어이쿠, 소저의 기세를 보아하니 이자 수준이 혹여 염왕채 수준은 아닐지 염려되는구려.”
“설마요. 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알겠소. 내, 앞으로 소저의 그 상식만 믿고 살겠소.”
“호호호홋!”
단목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니 더 예쁘다.
이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앞에서 두 사람이 멈춰 섰다.
단목홍신이 말했다.
“송 공자, 그만 들어가 보시오.”
“알겠소. 두 분, 오늘 고마웠소.”
그러자 이번에는 단목지가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빚이라니깐.”
“하하. 알겠소, 알겠소. 빚. 그럼 살펴들 가시오.”
사촌남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