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8
다시금 가족이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송천광이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당연히 단목세가에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은 채, 송천광의 상상이 앞서가지 않게끔, 사실에만 기초하여 대꾸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천광은 기분이 좋은지, 앞으로도 관계를 잘 유지하라며 나를 열심히 독려했다.
송가장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역시나 단목세가가 남긴 여파도 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아까 송유백과 송유상이 자랑했던 친우 관계들도 단목세가에 비하면 초라해지는 수준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를 바라보는 동난향과 그녀의 두 자식들은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저 표정을 보니 고소하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도치 않게 그 사촌남매의 도움을 받은 상황이라, 이걸 가지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인맥도 능력이긴 하나, 더 대단한 사람과 친해질수록 내가 더 대단해지는 것처럼 인식되게 만드는, 송가장의 이 천박한 가풍에 어울려주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다.
가족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송유백은 오늘 밤 옥산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내일 남창으로 출발한다고 했고, 송유상 또한 이삼 일은 옥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그 친구들을 데리고 장원으로 가겠다는 모양이다.
나와 송유하는 잠룡관으로 복귀해야 한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제갈수광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니까.
어른들에게 인사한 후, 송유하와 둘이서 잠룡관을 향해 걸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중에 송유하가 말했다.
“오늘 가족들을 보니 어떠셨어요? 오라버니의 입장에서는 가족들과 처음 만나는 느낌이었을 테니 궁금해서요.”
“아주 별로더군.”
“푸흐흡.”
“누이의 어머님은 좋은 분이시더라. 딱 봐도 나를 염려해주시는 게 느껴졌어. 이 총관님, 그러니까 숙부님도 괜찮았고. 아버지는 인맥에 너무 연연하려는 느낌이시더라. 솔직히 눈살이 찌푸려지더라고.”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송유하가 말했다.
“어떻게든 가문을 키우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송가장을 무가로 키워서 장차 강서 땅에서라도 송씨세가로 인정받게 만들고 싶은 거죠. 그래서 과도하게 인맥에 집착하시는 거구요.”
“송씨세가는 무슨. 저런 식이어서는 턱도 없어. 애초에 송가장 급의 가문이 세가로 발돋움하려면 몇 세대에 걸친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해. 저런 식으로 알맹이 없이 인맥으로만 해결하려 하면서 세가는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세가야.”
“푸흡!”
“부유한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편하게 자라셔서 그런지,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고생을 안 해보셨으니 가문을 키우는 것도 인맥 같은 걸 이용해서 편하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
“할머니가 얘기하시는 걸 가만히 들어보면 아버지가 편하게 자라신 건 확실해요.”
잠시 말없이 걷던 중에 송유하가 말했다.
“아까 가족들 앞에서 단목 공자가 오라버니에 대해 했던 말, 정말 공감이 갔어요.”
“에이. 그건 단목 공자가 가족들 앞에서 내 체면 살려주려고 과하게 금칠을 해준 것에 불과해.”
“아뇨. 기억을 잃은 후의 오라버니는 정말 그러셨어요. 상대방이 대단한 배경을 지녔든, 힘이 많든, 어른이든, 전혀 구차하게 굴지 않으세요. 항상 특유의 당당함을 유지하시죠. 뭐라고 할까, 연연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송유하가 바로 말을 이었다.
“실제로 다른 오라버니들 앞에서도 그랬고, 아까 가문의 어른들 앞에서도 그런 식이셨잖아요. 분위기상 일부러 맞춰준다는 느낌은 있어도 기세는 굴하지 않으셨어요. 가문이라는 테두리에조차 전혀 연연하지 않으시는 거죠. 마치 그 틀에서 벗어나 동떨어지게 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하하, 그런가? 기억을 잃어서 내가 막나가나 보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막나가는 느낌과는 확실하게 달라요. 지금의 오라버니는 왠지 스스로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그 기준을 굳게 믿고 나아가는 느낌이에요.”
송유하가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남들의 눈에 별 볼일 없는 계반 관도로만 보이겠죠. 한데 제게는 이상하게도, 지금의 오라버니가 누구보다 듬직하게 느껴져요. 근거를 대라면 댈 게 없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송유하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그녀에게서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고 난 후에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게 있어. 그걸 지키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뿐이야.”
걸으며 나를 바라보는 송유하의 눈동자에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야. 누이도 알고 있는 것들이야. 단지 나는 좀 더 마음 깊이 각오를 다졌을 뿐이지.”
“뭔데요?”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하며 살 수 있게끔 나를 만들자. 남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우뚝 서자.”
사실 이건 내 각오라기보다는 이쯤에서 송유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항상 주변 환경에 휘말리거나 얽매이는 인생을 살게 되겠지. 나는 가문이라는 테두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을 살기도 싫고, 반대로 가문의 결정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기도 싫거든. 그게 가문이든 남이든 주변 환경이든 간에.”
송유하는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내가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삶. 혹여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도 선택지가 많고, 내 선택이 우선시 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우뚝 서야겠다고 각오한 거지.”
송유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많다. 시기가 너무 늦었다. 재능이 부족하다. 환경이 안 받쳐준다. 그런 말들에도 연연하지 않으려고 해.”
송유하를 향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서른 살 넘어서 무공을 배웠는데도 최고 고수 반열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중대한 신체장애를 극복하며 고수가 되는 사람들도 있잖아? 반면 어려서부터 영약을 밥 먹듯 먹으며 영재교육을 받았는데 평생 절정에도 못 오르는 사람들도 많고.”
송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말고, 똑바로 앞을 보고 가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내가 어떠한 각오로 어떻게 노력하는가. 그게 중요한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닫았다.
송유하에게 내가 해주고 싶었던 말은 끝났다.
내 삶이 내 것이듯, 송유하의 삶도 송유하의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어떻게 살겠다고 결정하든, 나는 오라비로서 가까운 조언자의 역할만 할 것이다.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지만, 인생에 대한 그녀의 결정만큼은, 내 역할을 넘어서까지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내게는 매우 고마운 존재이기에, 송유하가 가문의 뜻에 휘둘리며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때문에 일부러 방금 전의 말들을 해준 것이다.
최소한 가문의 결정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스스로 우뚝 서라는 의미에서.
송유하는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송유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걸었다.
“오라버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한참을 말없이 걷던 송유하의 대꾸였다.
“저 강해질래요. 교관님들이 말하는 것처럼 협을 행하고 의를 수호하겠다는 식의 거창한 목적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일단 강해질래요.”
“의와 협 같은 건 개나 주라고 해.”
“푸흡!”
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송유하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이해한다. 얘도 일단은 백도에서 자랐고, 지금도 백도의 교육기관에서 배우고 있으니까.
“강해져도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백도에서도 천 명에 대여섯 명이나 될까 말까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의와 협의 범위는 본인, 본인의 가족, 본인의 문파나 세가, 본인의 지인, 지인의 지인 정도까지라고. 그 이상은 거의 확장되지 않아. 즉, 뭐다?”
나는 씩 웃으며 바로 답을 말해줬다.
“다들 자기 편하게, 안전하게 살려고 강해지는 거다.”
눈을 살짝 크게 뜬 것이, 내 말이 여전히 놀라운 모양이다.
하긴 그렇겠지. 이 아이의 주변에서 누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적나라한 얘기를 해줬겠어.
“그러니 의와 협 같은 말들에 얽매일 필요 없다고. 지금 누이가 각오한 것처럼, 누이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강해지면 되는 거야. 목표한 만큼 강해지고 나면 그 후에는 알아서 하면 돼. 협을 행하든 뭘 하든, 누이의 선택에 따라 살면 된다고.”
내 말을 들은 송유하는 또다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오라버니와 함께 있으면 왠지······, 제가 어렵게 생각하던 문제들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오라버니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기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그 문제를 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뭘, 그렇게까지.”
“무공 수련할 때도 그랬잖아요. 근래 제 무공이 체감될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오라버니가 다른 시각에서 제 무공을 바라봐준 덕분이었잖아요. 저는 틀에 얽매인 채로 그냥 반복만 하고 있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얘야, 무공의 경우에는 다른 시각이 아니라 그냥 고수의 시각이란다.
일반적인 고수도 아니고 천하제일고수에게서 사사한 고수였단다. 총애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오라버니를 따라 다니면서 수련하려구요.”
“내 수련에도 누이가 필요하니 서로 도움도 되고 좋지.”
밤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송유하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뿐사뿐 걷는 그녀의 발걸음도 더 가벼워진 것 같다.
* * *
동부지맹 잠룡관의 관주실.
두 명의 사내가 탁자를 앞에 둔 채 마주 앉아 있었다. 탁자에 놓인 찻잔 두 개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아이고, 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십대 중후반의 인상 좋은 청의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백의사내가 대꾸했다.
“허허. 관주는 자네인데 나더러 관주라니? 내가 이곳의 관주 일을 그만 둔지가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
대꾸한 백의사내는 예순에 가까워 보이는 초로의 인물이었다. 옷도 백의인데 머리도 백발이었다.
“허헛. 송구합니다. 전대 관주님이셨을 때 그 호칭이 너무 입에 붙었나 봅니다. 지금은 당주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는데.”
“당주는 무슨. 되었네. 그냥 선배라고 불러주시게.”
그들의 말마따나 두 사내는 동부지맹 잠룡관의 전, 현대 관주였다.
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의 이름은 육남춘.
바로 현 동부지맹 잠룡관주다. 두뇌로 유명한 절강 항주육가의 가주이기도 하다.
내공이 높아 다소 젊어 보이는데, 그의 실제 나이는 현재 지천명을 살짝 넘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의사내는 선우훤.
전대 동부지맹 잠룡관의 관주가 그였다. 그는 호북 수주에 위치한 선우세가의 가주이자, 현 무림맹 본맹 집법당의 당주이기도 하다.
보이기에는 예순 즈음이지만, 선우훤의 실제 나이는 예순 중후반이었다. 고강한 내공 때문에 훨씬 젊어 보일 뿐.
선우훤이 말했다.
“오늘부터 방학이 시작되었다지? 오면서 보니 잠룡관이 썰렁하더군.”
“예. 어제가 승반 심사 결과 발표 날이었던지라.”
대꾸한 육남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부지맹에 일이 있어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레가량 동부지맹에 머무신다고······.”
“그렇게 됐네.”
“동부지맹에 오시자마자 이곳부터 찾아오시다니, 이곳에 대한 선배님의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내 인생에 있어 의미가 매우 깊은 곳이었지. 추억도 많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들의 총 책임자가 나였는데, 오히려 아이들과 지내면서 내가 배운 것들이 더 많았다네. 젊고 활기찬 기운을 받을 수 있어서 더 좋았고.”
“예.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저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허허. 자네도 이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나. 물론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들었네만.”
“잘하고 있기는요. 선배님이 맡고 계실 때에 비해 동부 잠룡관의 수준이 많이 떨어진 게 아니냐는 평가를 듣고 있는데요.”
육남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자 선우훤이 말했다.
“그 때는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내 역량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네. 알다시피 그때는 동부 잠룡관에 남궁세가의 두 형제가 있지 않았나. 그 형제가 사 년 터울로 입관한 덕에, 당시의 통합 잠룡대전에서도 꾸준히 좋은 성과가 났던 게지.”
통합 잠룡대전.
매 해, 호북 무창의 무림맹 본맹에서 열리는 후기지수들의 비무대회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지맹의 잠룡관에서 선발된 관도들이 모여 실력을 겨룬다. 백도 무림의 입장에서는 축제이기도 하다.
선우훤이 동부지맹의 잠룡관주였던 시절, 남궁세가주의 아들들인 두 형제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적을 냈다. 그 둘이서 우승 오 회에 준우승 삼 회를 차지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가 바로 동부지맹 잠룡관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선우훤이 말했다.
“통합 잠룡대전에서의 성과에도, 그 결과 때문에 왈가왈부하는 세인들의 평가에도, 너무 연연하지 말게나. 이런 내 말이 자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아이고 선배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육남춘의 말에 선우훤이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밖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자네는 잘하고 있네. 승반 심사에 관련된 소문만 들어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거든. 자네는 철저하게 공정함을 기한다더군. 외부의 입김에도 굴하지 않고, 청탁에도 휩쓸리지 않고. 실상 내가 후임으로 추천 받은 여러 인사들 중에 자네를 낙점한 것도 그런 면 때문이었다네.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그 공정함을 믿었거든.”
육남춘이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선우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우수한 아이들에게 더 기특한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지. 그러나 저 나이 대의 아이들은 저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잖은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경우가 많지. 그걸 잘 이끌어 줄 때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인재들이 튀어나오곤 하는 법이고. 그게 바로 백도 무림의 매력이자, 인재 양성 기관인 잠룡관의 매력이기도 하고.”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다시 한 번 명심하겠습니다.”
대꾸한 육남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선우훤의 말이 곧 그의 경험담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멸문지화를 당했던 선우세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핏줄이 바로 선우훤이었다.
때문에 선우훤은 갓난아이 시절부터 이모에게서 키워졌고, 그러다가 나이가 차서 잠룡관에 입관한 경우였다. 이모부의 집안이 강호세력과 관계없는 유가儒家였던 탓에, 입관 당시의 선우훤은 계반이었다.
노력의 화신이었던 선우훤은 계반에서부터 갑반까지 승반했고, 잠룡관 졸업 후에도 무공에 정진하여 초고수가 되었다. 그 후에 스스로 선우세가를 재건한 것이다.
한 마디로 살아있는 전설이라, 강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본인의 그러한 내력 때문에 잠룡관에 대한 애착도 매우 큰 것이고.
육남춘이 곧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들었습니다. 선배님의 맏손녀가 이번에 잠룡관 초년차로 입관한다지요? 그 어렸던 아이가 벌써 성장하여 잠룡관에 들어온다니, 세월 참 빠릅니다.”
“내 자식들 키울 때는 저게 왜 저렇게 안 크나 싶더니, 손녀손자들은 뭐가 저렇게 빨리 크나 싶더군.”
“허허. 그런 거군요. 대강이나마 짐작은 됩니다. 어쨌거나 그 아이를 가명으로 입관시킬 계획이시라고도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명을 써야 하는 입장이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나. 비밀로 해주고.”
육남춘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당연하지요. 선배님은 무림맹의 집법당주이신데다가 명성도 높으시니, 그 아이가 신분을 밝히고 들어오면 학관 생활이 매우 피곤하고 불편해질 겁니다. 관도의 정상적인 학관 생활 보장 차원에서 사유도 충분합니다.”
“아무튼 알지? 아무리 내 손녀라도 편애는 절대 안 되네.”
“무림맹의 집법당주님께서 이토록 엄포를 놓으시는데 제가 어찌 편애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선우훤이 고개를 끄덕이자 육남춘이 말했다.
“참고로 남궁세가주께서도 선배님과 비슷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선우훤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참! 그 집 늦둥이가 내 손녀랑 동갑이었지? 자네의 말을 들어보니 그쪽도 이번에 입관시키는 모양이로군? 가명으로?”
“그렇습니다. 사유는 선배님 쪽과 같습니다.”
“사실 뭐, 본명으로 입관했을 때 훨씬 더 피곤할 쪽은 그쪽이지. 내가 관주였을 당시에 그 오라비들도 그런 부분 때문에 많이 피곤해 했다네. 그때의 경험에 의한 조언이 있었나 보군.”
다른 곳도 아니고 대남궁세가다.
그곳의 직계 혈통임을 알면 당연히 온 관도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에서 의도를 갖고 접근할 테니 잠룡관 생활도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육남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배님의 손녀도 그렇고, 남궁세가주의 늦둥이도 그렇고, 둘 다 여아임에도 실력이 뛰어나다고 들어서, 저 또한 관주의 입장에서 기대 중입니다.”
“실력이야 뭐, 남궁세가의 여식 쪽이 훨씬 뛰어나겠지.”
“선배님의 손녀에 대해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요? 허허허.”
“어쨌거나 남궁세가의 금지옥엽마저 가명으로 입관한다니, 몇 년간은 재밌어지겠군. 헛헛헛.”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선우훤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일하러 가봐야겠네.”
“오랜만에 오셨는데 추억이 깃든 이곳 잠룡관을 차분히 돌아볼 새도 없으신 모양입니다. 그리 바쁘셔서 어쩝니까.”
“무림맹에서 맡고 있는 소임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야지. 최대한 이번 일을 빨리 끝내 놓은 후, 며칠 후에 와서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볼 계획이네.”
“그때 미리 연락 주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육남춘의 말에 선우훤이 양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닐세, 아닐세. 몰래 다니며 요즘 아이들이 지내는 모습을 엿보는 맛이 있거든. 자네와 함께 드러내놓고 다니면 생생한 현장을 못 보지 않나.”
“아이고, 이거 제가 시험받는 것처럼 긴장됩니다, 허허.”
“그 후에 술이나 한 잔 하세.”
“그때가 바로 평가의 시간이겠군요.”
“허허허헛! 평가는 무슨. 교육에 대한 토론쯤 되겠지. 아무튼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보세나.”
“살펴 가십시오, 선배님.”
고개를 끄덕여 보인 선우훤이 관주실을 나섰다.
* * *
처음 이틀간은 송유하와 함께 근무하기로 했다.
그 편이 제일서고에 적응하기에 서로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도 처음이지만 송유하도 그곳은 처음이니까.
제일서고에 와 보니 시설부터가 제삼서고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간이 전체적으로 넓고 깔끔했으며 책들도 깨끗했다.
서가도 훨씬 많았고, 그런 만큼 서책들 또한 모든 분야에 걸쳐 다양한 종류가 비치되어 있었다.
서고 안의 곳곳에 넓은 탁자와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어, 서책을 읽기에도 최상의 환경이었다.
그야말로 제삼서고의 환경과는 천지 차이.
내 입장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환경이었다.
갑을병정 반의 관도들이 이용하는 서고가 이 정도면, 거처 쪽의 시설들이 어떨지도 짐작이 간다.
이 놈들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데서 지내며 공부하고 있었네?
얼핏 승반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나는 당분간 계반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남들 시선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내기에 계반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교관들마저도 신경을 쓰지 않는 곳이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이틀간 서고에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방학 초기다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간 승반 심사에 매진했을 테니 그 직후의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시기일 것이다.
이틀간은 송유하 앞에서 책을 읽는 모습만 보여줬다.
둘러보니 관심이 가는 책들이 많았다. 일단은 제삼서고에서 접하지 못한 무공서적들 위주로 읽었다.
내 무공이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에 대한 구실은 여전히 필요하고, 송유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이틀만 지나면 오전 나절과 오후 나절을 교대해서 근무하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보장된다. 그렇기에 보여줘야 할 때는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 * *
제일서고의 관리인으로 근무한지 엿새째가 되었다.
오후 나절이 되어 송유하와 교대해주고 근무를 시작했다.
지난 닷새간 제일서고에 드나든 관도가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참 편했다.
오늘도 편하게 지나가겠거니 싶었는데 웬 걸, 미시정(오후2시)쯤에 한 명이 서고에 찾아왔다.
약관쯤으로 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청년.
차분한 인상에 기도도 안정되어 있다. 이 정도만 봐도 왠지 그럴듯한 문파나 가문의 후예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