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2
“야! 야······! 너, 진짜!”
하후영이 손가락으로 진운령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지만, 진운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상당히 두꺼운 서책이었어요······. 그 모서리 부분이 안면으로 날아오는데, 어떻게든 그걸 피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기 수준이 아니라 흉기였어요. 적어도 그때의 제게는······.”
진운령이 영혼을 담은 가증스러움을 보여준 후, 어깨를 떨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푸하하! 쟤 때문에 미치겠다.
“어이구, 그렇지. 그 정도면 흉기지. 큰일 날 뻔했네······.”
소충광이 고개 숙인 진운령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다.
우와! 저것들 손발 착착 맞는 것 좀 보소?
하후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만 뻥긋거릴 뿐이었다.
나는 곧바로 양손을 내밀어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자, 자! 원래 또 다른 제삼자의 의견을 참고하려던 것뿐이오. 이쯤이면 참고할 건 다 참고했소.”
“참고하긴 뭘 참고했단 말이오? 그 기록지에 적은 건 모두 우리 쪽이 불리할만한 단면만 보고 적은 거잖소!”
위재흠의 말이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보고 들은 사실을 그대로 적었는데, 왜 자꾸 내가 단면만 보고 적었다고 우기시오? 가뜩이나 이건 보고용이 아니라, 개인 보관용일 뿐이오. 신경 쓰실 것 없소.”
“개인 보관용······?”
“어쨌거나 여러분은 다수고 나는 소수이며, 여러분은 강자고 나는 약자요. 혹여 이후에 여러분들 중에서 누군가가 이 일을 문제 삼으면, 소수이면서 약자인 나만 억울해질 게 빤하잖소. 그러니 나도 최선을 다해 내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을 남겨두려는 것이오. 그래야 혹시 모를 상황에서 덜 억울해지지 않겠소?”
다수 대 소수. 강자 대 약자.
이런 식의 단어들을 써가며 내 쪽에 유리한 틀을 미리미리 짜 놓는 건 매우 중요하다.
가뜩이나 명분을 중시하는 백도인들은 다수의 횡포와 강자의 핍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안휘 애들도 움찔하는 기색이다.
쫄리지, 이놈들아?
위재흠이 말했다.
“무, 문제를 삼기는 누가 삼는다고······.”
“물론 나도 이것이 쓸모없는 불쏘시개가 되기를 바라고 있소.”
위재흠 놈을 향해 대꾸해준 후,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차피 반 시진(한 시간) 후면 서고의 문도 닫아야 하고, 보아하니 여러분들도 더는 독서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소. 나도 서고를 정리해야 하니 오늘은 이만 퇴장들 해주시오. 양측 분들 모두, 다음에 뵙게 될 때는 제발 좀 정숙해주시길 부탁드리겠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진운령이 내 쪽으로 목례하며 말했다.
“의도치 않게 오늘 관리자님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송구합니다. 다음부터는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정숙토록 하겠습니다.”
안휘 쪽 애들에게 보란 듯이, 더없이 공손한 태도와 어조였다.
푸하하하!
이야아아! 진운령, 너는 진짜, 대단하다, 진짜.
한데 진운령 옆에 있던 소충광과 황성락도 나를 향해 절도 있게 목례하는 것이 아닌가.
“저희들도 명심하겠습니다.”
이야! 너희들도 보통은 아니구나?
세 사람을 향해 곧바로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이쿠! 그, 그러지들 마시오! 아까 들으셨잖소. 나는 일개 계반 관도에 불과하오. 이곳에서도 임시 관리자일 뿐이니, 여러분들은 그냥 규칙만 지켜주시면서 편하게 이용하시면 되오. 아무튼 어서들 가보시오.”
소충광이 내게 대꾸했다.
“임시 관리자라도 관리자인 건 맞고, 저희들이 폐를 끼쳤던 것도 사실입니다. 가뜩이나 이렇게 된 게 저희들의 탓이기도 하니 저희들도 정리를 돕겠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아까도 들으셨겠지만 오늘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내가 끝까지 중립적인 입장이어야 하오. 양측 어디든 사건 이후에 곧바로 친분이 생긴다면, 지금껏 내가 열심히 유지하려 노력했던 중립성에도 의심이 생길 소지가 있소. 그러니 그냥 가보시오.”
보아하니 근처의 탁자와 의자들이 흐트러져 있고, 서책 몇 개가 이리저리 나뒹구는 정도였다.
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도 아닌데다가, 어차피 오늘은 서고 전체 청소를 할 계획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안휘 애들이 아직 지켜보고 있으니 이렇게 처신하는 게 옳다.
“아······! 저희가 미안한 마음만 앞서서 거기까지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염치없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광동 쪽 애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고를 벗어났다.
잘 가라, 승리의 전사들이여.
“저, 정말로 도움 필요 없소?”
쭈뼛거리던 위재흠 놈의 물음이었다.
앞서 광동 애들이 하는 걸 봤으니 그냥 가기는 좀 애매했던 모양이다.
“방금 들으셨잖소. 내 중립성에 대해 의심을 사고 싶지 않다고. 게다가 정리할 것도 별로 없다고. 그러니 어서 가보시오. 다음에는 제발 좀 정숙해 주시고.”
아니.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으면, 너희들은 당분간 이곳에 오지를 마.
그리고 빨리 가라, 빨리 가.
내 마음 약해질 만한 소릴랑 꺼낼 필요도 없단다.
어차피 너희들은 내 눈밖에 났거든.
위재흠이 다시 말했다.
“그······, 소, 소란스럽게 한 것은 미, 미안했소.”
노력하는 건 알겠는데, 사과를 그딴 식으로 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어요, 이 한심아. 게다가 정작 너희들이 나한테 사과해야 할 건 그 부분이 아니잖아?
“말했잖소. 나는 이곳의 임시 관리자요. 귀하들은 규칙만 지키면서 이용하시면 되오. 이제 정말로 정리해야 하니 가보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놈이라면 그냥 가지 않고 내 기록지에 대해 언급할 것 같다.
“그 기록은······.”
역시, 그럼 그렇지.
등신들이 아까 지를 때는 막 지르더니 결국 쫄아서는.
“말했듯 보고용이 아니오. 내가 억울해질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개인 보관용일 뿐이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시오?”
“아, 아무래도······.”
이에 나는 탁자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각서들 작성하시오. 금일 미시에서 신시 경, 제일서고에서 누구, 누구, 누구와 함께 벌어진 일들은 온전히 귀하들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특히 당시의 제일서고 관리자 송유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립을 지키며 주어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곧바로 안휘 애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앞서 말한 내용들이 들어가야 하고, 이곳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성명도 내용에 들어가야 하오. 네 분 모두, 두 부씩 작성하여 두 장 모두에 수결하시오. 그러면 곧바로 이 기록을 넘겨드리겠소. 단, 내용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속 반려할 것이오.”
안휘 애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왜, 싫으시오? 그럼 마시오.”
“아, 아니오! 작성하겠소.”
아까 내가 기록했던 내용들에는 욕설을 비롯하여 별의 별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
당연히 저들로서도 그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보다는, 뭉뚱그려서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한 각서가 남아 있는 쪽이 나을 수밖에 없다.
“한데 왜 두 부 씩이나······.”
“내가 개인 보관용이라고 했는데 귀하들도 나를 못 믿어서 그 기록에 연연하는 것 아니오? 나 또한 귀하들을 믿지 못하겠소. 그래서 두 장씩을 맞대어 놓고 귀하들과 나의 간인까지 해서, 하나는 내가 갖고 하나는 따로 보관할 생각이오.”
안휘 애들이 각서를 작성하는 틈을 타서 주변의 흐트러진 것들을 적당히 정리했다. 우문직이 정리를 도왔다. 자신은 제삼자이니 도와줘도 상관없지 않느냐면서.
주변 정리가 금방 끝났기에 나는 서고 건물 바로 앞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나무통 두 개에 물까지 채워다가 관리자석 옆에 두었다. 그 후, 관리자석 뒤의 사물함에서 청소도구들까지 이것저것 꺼내 두었다.
저들이 가고 나면 바로 청소를 시작할 생각으로.
이후에 서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안휘 애들 네 명의 각서 작성도 끝난 모양이었다.
내가 각서들 각각에 간인을 하자 우문직도 본인의 서명을 적어 넣으며 간인에 동참했다. 제삼자인 만큼, 자신도 증인 역할을 하겠다면서.
각서에 관련된 사안이 모두 정리되자 안휘 애들이 내게서 기록지를 받아 챙긴 후 후다닥 서고를 나섰다.
잘 가라, 패배 원숭이들.
우문직과 나는 서고 건물의 입구로 나와서 멀어지고 있는 안휘 애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문직이 말했다.
“이야, 내가 오늘 송유겸 공자를 처음 뵀는데, 정말 감탄했습니다.”
“감탄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야 그냥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뿐이지요.”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저들 앞에서 대처가 치밀하시고 확실하시던데요.”
“어쩌다가 상황이 그렇게 맞아 떨어졌을 뿐입니다. 아, 참. 제가 우문 공자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우문 공자의 입장에서 촌사람 발언은 어땠습니까?”
“그 부분은 아까 청원표국의 황 공자가 마치 제 마음을 대변하듯 시원하게 일침을 가하더군요. 중원부심 오진다고. 그 뒤에 붙었던 욕설이 백미였지만 굳이 제 입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푸하하.”
참고로 그 뒤에 붙었던 욕설은 ‘머저리 새끼’였다.
우문직이 말했다.
“아까 그 상황을 기록한다는 생각도 정말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들이 꼼짝 못하더군요. 마지막에 기록지를 그런 식으로 처리한 것도 참 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
“그 기록지가 사실 뭐 별 것도 아닌 건데, 저들이 내가 그걸 갖고 딴 마음이라도 품을까 자꾸 의심하는 듯하여.”
“그 의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처리해버린 건 잘하신 일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문직이 물었다.
“아까 각서를 두 부씩 받으셨는데, 한 부는 누구에게 줄 생각이셨습니까?”
“딱히 누구를 생각하진 않았고, 그냥 확실하게 처리하는 느낌을 주려고 그랬을 뿐입니다. 뭐, 혹여 우문 공자께서 갖겠다면 드리고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우문직이 말했다.
“주십시오. 제가 갖고 싶습니다.”
“허!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잠룡관에 들어온지가 벌써 삼 년이 지났습니다. 그 삼 년을 통틀어 오늘이 가장 재미있는 날이었습니다. 송 공자 덕분입니다. 그래서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마침 간인에도 우리 두 사람의 서명이 같이 들어가 있잖습니까.”
이에 나는 관리자석 위에 두었던 각서 한 묶음을 우문직에게 내밀었다. 각서를 받아 드는 우문직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의미가 큰 모양이었다.
우문직이 말했다.
“그럼 저도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아, 참. 아까 서고 정리도 도와주시고 각서 일로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오늘 송 공자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방학 기간에 이곳에서 종종 뵙겠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청소 시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전체 청소를 해달라는 게 제갈수광의 부탁이었다. 원래 주 삼 회는 해야 하는데, 우리는 임시 관리자니까 대충 한 번씩만 하랬다.
엿새째인 오늘 청소할 계획을 세운 건, 내일부터 사흘간 잠룡관의 서고들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내일이 섣달그믐날이고 모레가 정월초하루라서, 글피까지 사흘간 휴무다.
송유하에게는 굳이 청소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 깨어났을 때부터 나 때문에 이래저래 고생했으니, 청소 정도는 그냥 내가 할 생각으로.
행주 여러 개를 물에 적셨다가 물기를 짜낸 후, 그것들을 대야에 담아 들고는 서고의 입구 안으로 향했다.
바닥 청소를 하기 전에 탁자와 의자들부터 닦을 생각으로.
한데 입구 안으로 들어선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웬 사람 한 명이 서고 입구 안쪽의 측면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금의 서고 안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야 정상이다.
한데 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떡하니 있으니 내 입장에서 어찌 안 놀라겠는가.
진심으로 소름이 돋고, 온 몸의 털이라는 털은 모조리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인생에 이 정도로 간 떨어질 뻔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토록 놀란 상태임에도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사사사사삭!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빠르게 서고의 입구 밖으로 벗어난 것이다.
무의식적인 위기 대처 행동이었다.
서무욱이었던 나는 흑풍대원으로서 적지 않은 실전을 겪었으며, 나중에는 절정고수에까지 올랐던 몸이었으니까.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안에서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미안하구나. 많이 놀랐겠어.”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내가 안에서 봤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적이 아니란다. 너를 공격하려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려무나.”
실제로 그는 양 손바닥을 펴서 들어 올린 채로 공격 의사가 없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방어 자세 또한 풀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백의를 입은 백발의 사내였다.
얼추 오십대 후반 내지는 예순 즈음으로 보였다.
한데 나를 바라보는 백발사내 또한 모종의 놀란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아니, 노인장! 나를 놀라게 만든 건 당신인데,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초로의 사내가 말했다.
“진정해도 된다, 아이야.”
실제로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고 있다.
그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자세를 풀었다.
동시에 눈앞의 백발사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워낙 유명해서, 용모파기 및 신상명세가 천마신교의 정보에도 세세하게 나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천성 선우훤······.’
현 무림맹 본맹의 집법당주이자 전대 동부지맹 잠룡관주.
호북의 수주에 있는 선우세가의 현 가주.
무공이 고강하여 저 나이로 보일 뿐, 실상 그의 나이는 예순 중반이 넘은 것으로 안다.
자천성이라는 별호 자체가, 스스로 하늘에 올라 별이 되었다는 의미의 말이 축약된 말이다.
저 별호에 왜 그런 의미가 담겼는지도 알고 있다.
십대 중반부터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여 잠룡관의 계반에서 출발한 그가, 종래에는 백도 무림의 구성이 되었기에 붙은 별호다.
대단한 역사를 만들어 낸 장본인인 만큼, 강호인들 사이에서 인기마저 높은 인물이 바로 선우훤인 것이다.
한데 그런 그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