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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마교있다-27화 (27/416)

내 안에 마교있다 27

체내에서 백년음양선과의 기운이 모두 사라진 걸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그 후에도 세 차례 더 운공을 했다.

눈을 뜨자마자 희열이 몰려왔다.

단전이 매우 충만했고, 온 몸에도 활력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머리가 맑다.

시야도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다.

내공 증진의 효과다.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장시간 정좌하고 있었으니 일어설 때도 조심해야 한다.

매우 뻐근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덜했다.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운기조식을 취했기에 체내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사십 년에서 살짝 빠지는 정도의 공력이다.

백년음양선과를 통해 이십오 년 상당의 공력을 얻은 것이다.

“크으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하여 몸이 한 차례 떨렸다.

고수였던 연승휴도 이십 년 남짓의 공력을 얻었다고 했다.

한데 하수인 내가 이십오 년 정도의 공력을 얻은 것이다.

회회심공 덕분이다.

회회심공의 자연치유력은 몸이 영약 등의 기운을 흡수하는 효율도 상승시켜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기대는 했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다.

무공 경지라는 게 내공의 경지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무공의 성취도까지 종합해야 한다.

내공만으로 경지를 따지는 건 편의 때문이다.

누군가의 경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무공의 성취도를 보여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내공 경지를 엿보고 이를 통해 대강이나마 수준을 짐작하는 데서 나온 분류법이다.

요즘은 대강 삼십 년쯤이면 일류의 초입으로 치며, 삼십오 년 정도면 무조건 일류라고 여긴다.

고로 나는 일류의 초중반인 셈이다.

그간, 일단 이십 년 공력부터 모으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회회심공을 수련했었다.

실제로 공력이 빠르게 축적되고 있긴 했으나, 그래도 언제 이십 년 공력에 다다르나 싶어 답답했었다. 빌어먹을 송유겸의 공력이 애초에 너무 보잘것없었던 탓이다.

한데 이렇듯 이십 년, 삼십 년을 훌쩍 넘어 사십 년에 가까운 공력을 쌓게 된 것이다.

너무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다.

다시금 연승휴의 비석에 대고 절을 두 차례 했다.

무인에게 있어 생명이나 다름없는 공력을 이렇듯 안겨주었으니, 당연히 극진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

우측의 석함을 열었다.

씨앗을 보관해 둔 목함을 다시 집어넣은 후, 기다란 목함에서 검을 꺼냈다.

챙겨가서 거처에 둘 생각이다.

틈틈이 실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러 손에 익게 만들어야 할 테니까.

마침 외부에 출타한 것처럼 전언을 적어두고 왔으니, 나간 김에 마음에 들어서 사왔다고 하면 될 일이다.

좌측의 석함에 들어있던 단검을 꺼냈다.

중앙의 화단으로 와서 단검을 이용하여 백년음양선과의 뿌리 주변을 넓게 팠다.

뿌리의 털 하나마저 소중하게 여기며 백년음양선과를 캐냈다.

캐낸 줄기와 뿌리를 조심스럽게 들고는 중앙의 석단에 새겨진 글귀의 후반부를 재독했다.

<과실에는 음양의 기운이 공존하나, 줄기와 잎은 양의 기운만을, 뿌리는 음의 기운만을 띤다. 음양은 조화를 이뤄야 하기에, 양은 음을 찾고, 음은 양을 찾아야 한다. 때문에 양의 기운이 담긴 줄기와 잎을 사내가 복용해 봐야 효과가 없고, 음의 기운이 담긴 뿌리를 여인이 복용해도 효과가 없다.

당연히 우리 가문에서는 줄기와 잎을 꼭 여인에게 복용시켰다.

아홉 개의 잎을 따고 줄기는 아홉 등분하여,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건조시켜야 한다. 일주일 정도 건조시킨 후, 잎사귀 하나와 줄기 한 조각을 뜨거운 물에 우려 차 마시듯 마셨다. 최소 반각 이상은 우린 후에 마시길 권한다. 생으로 복용하는 편보다 이런 식으로 복용하는 편이 효과가 훨씬 좋았다.

하루에 한 번씩 마신 후에 서너 차례 운기를 취하면 조금씩이나마 내공 증진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홉 번을 모두 마신 후에 점검을 해 보면, 우리 가문의 여인들은 오 년 전후의 공력을 얻곤 했다.>

오 년 공력도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다.

그거 축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사내가 복용해봐야 효과가 없다고 하니, 여인 중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뿌리는 일주일 정도 건조시킨 후에 최대 다섯 번쯤 달여서 마시면 된다. 효과는 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백년음양선과를 복용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반감된다. 때문에 우리 가문에서는 과실 복용자가 취하지 않고, 형제나 후손이 취하게 했다. 참고하기 바란다.>

아니요, 선배님. 송구하오나 뿌리도 제가 취하겠습니다.

효과가 반감된다 해도 이삼 년 공력이니, 저걸 복용하면 사십 년 공력을 살짝 넘기게 될 터였다.

온갖 것들이 들어 있는 좌측 석함에는 방수포로 만든 주머니도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건조시킨 후, 나중에 방수포로 싸매서 갖고 나가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았다.

즉시 공간을 벗어나 어두운 통로로 나섰다.

공간 근처에 도랑 형태로 지하수 줄기가 흐르고 있음을, 아까 오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야명주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공력을 일으켜 안력을 돋우자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었다.

좋다. 너무 좋다.

곧 물줄기에 도달하여 조심스럽게 줄기와 잎과 뿌리를 씻었다.

다시 공간으로 돌아와, 중앙 석단의 측면 쪽을 소매로 깨끗하게 닦았다.

그 위에 잎사귀를 떼고 줄기를 구등분하여 널어놓고, 그 옆에 뿌리도 널어놓았다.

석함 내부는 보존 진법이 걸려 있기에 피했다.

할 일을 마쳤으니 검을 챙겨 들고는 곧바로 공간을 나섰다.

수면 위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호흡이 전혀 가쁘지 않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건 마찬가지이나, 아까와 같은 정도의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내공 만세, 연승휴 만세다.

수중에서도 이미 느꼈지만 사위가 아직 어두웠다.

재빨리 산길로 접어든 후,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별자리를 확인했다.

‘어어······?’

이 정도면 아직 묘시초(오전 5시)가 되지 않은 시점이다.

내가 어젯밤에 수중 관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이 술시정(오후 8시) 무렵이었다.

그 중 통로 이동 시간, 백년음양선과의 뿌리와 줄기를 처리한 시간, 그 외의 시간 등을 합하면 반시진에서 약간 모자를 것이다.

하면 내가 운기조식을 취한 시간은 네 시진(8시간)가량이라는 뜻이 된다.

연승휴도 다섯 시진이 걸린 운기조식을 나는 네 시진에 끝낸 것이다.

역시 회회심공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든다.

거처에 돌아와서 방문을 열어 보니, 내가 나갈 때 두었던 종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쓸모가 없어졌다.

얼른 젖은 옷을 벗고 몸을 닦은 후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집이 젖었기에 물기를 털어내고, 마른 천으로 검도 한 차례 닦았다.

이후에는 검집에 검을 넣지 않은 채, 두 개 다 벽장의 측면 구석에 세워 두었다. 검집을 말려야 하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몸에 활기가 넘친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새벽 구보 시간이다.

유등을 켠 후 송유하를 기다리며 고천비룡결을 빠르게 훑었다.

연승휴는 이게 빼어난 심법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는다.

그는 본인의 가전 무예가 다시금 빛을 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게 이런 어마어마한 고마움을 안겨 준 사람의 부탁이니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

한데 어차피 나는 회회심공 때문에 이걸 못 익힌다.

결국 송유하에게 익히게 해야 한다.

어차피 송유하가 현재 익히고 있는 무공은 송가장에서 초빙했던 일류고수 무공사부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아무리 백 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해도, 연승휴의 가전 무예와 송가장 무공사부의 무예는 비교대상이 될 수가 없다.

당시에 빼어났다던 고천비룡결이 현재의 강호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일지 궁금하다. 게다가 송유하의 현 수준에서도 익힐만한 난이도일지 확인해 봐야 한다.

심법서 자체가 두껍지 않기에, 쓱 한 번 훑어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후, 책의 뒤표지를 덮는 내 눈은 커져 있었다.

나는 사부님 덕분에 무학의 이치에도 밝은 몸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고천비룡결은 현재의 강호에서도 충분히 최고수준으로 통할 심법이었다.

내게 회회심공이 없었다면 나라도 무조건 익혔다.

지금의 송유하에게는 약간 어려운 수준일 것이나, 잠깐의 어려움쯤은 각오할 생각으로라도 갈아타는 게 옳다.

당분간은 계속 고천비룡결만 연구하여, 어떻게 하면 송유하에게 보다 쉽게 가르쳐줄지 생각해봐야겠다.

그 즈음, 제법 멀리에서부터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공 상승으로 인해 감각 인지의 영역도 넓어지고 귀도 밝아진 탓이다.

동이 틀 무렵이라, 여느 때처럼 새벽 구보를 위해 송유하가 오고 있는 모양이다.

얼른 고천비룡결을 다시금 벽장에 넣어 두었다.

곧 밖에서 송유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문을 열고 방을 나서며 대꾸했다.

“어, 왔어? 바로 출발하자.”

함께 구보하기 시작한 후로 송유하는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회회심공 수련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저 기특한 아이는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린다.

곧바로 거처를 나서서 걷기 시작하는데 송유하가 말했다.

“엊저녁에는 안 계셔서 혼자 구보했어요.”

“잘했어. 어제는 잠시 내가 밖에 볼일이 좀 있었거든. 서고 근무 끝내고 곧바로 나갔던지라.”

“아, 출타하셨던 거예요?”

“어.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어.”

“혹시······.”

송유하의 표정을 보니 뭘 의심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핫. 안 마셨어.”

“아니요. 제가 참견하려는 게 아니구요. 근래 오라버니가 워낙 술을 멀리하셨잖아요. 그래서 간만에 한 잔 드신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드실 수도 있는 거구요.”

“아무튼 안 마셨다는 거.”

“네.”

천천히 뛰어 거주구역을 벗어난 후,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기초체력 향상을 위한 구보이니 우리는 당연하게도 내공을 쓰지 않고 달린다.

“헉! 헉! 헉!”

쉬지 않고 달리다가 중간 지점쯤에 가까워지자, 아니나 다를까 송유하의 호흡이 매우 가빠졌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저 상태도 많이 좋아진 거니까.

같이 구보하기 시작했던 초창기부터 나는 계속, 송유하가 적응할만하면 속도를 높여 항상 어느 정도는 버겁게 만들었다. 함께 달리다보니 호흡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속도를 조절하기도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버거워했지만 송유하는 어떻게든 쫓아오려고 노력했다. 이런 면에서 애가 제법 독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보면 볼수록 기특하기도 하다.

같이 구보하는 내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서라도 더 독하게 따라오려는 것이겠지.

어쨌거나 초창기에 비하면 지금은 구보 속도가 매우 빨라진 상태다.

송유하의 기초 체력도 상당히 좋아졌다는 증거다.

중간 지점에서 호흡을 고른 송유하가 말했다.

“이곳에 항상 있던 단목세가의 두 분이 없으니까 허전해요.”

그 사촌남매는 방학 기간 동안 세가에 갔다.

단목세가는 절강의 천목산에 위치해 있기에 동부지맹에서 그리 멀지 않다. 삼 주 남짓의 방학 기간 동안 넉넉하게 다녀올만한 거리다.

“그러네. 보려면 아직 이 주 남짓 더 기다려야겠네.”

내가 대꾸하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송유하가 말했다.

“가족 모임 때 말인데요. 단목 소저가 잘 차려입고 치장한 모습이 너무 예쁘더라구요.”

“그렇긴 하더라.”

“단목 소저가 들어선 순간부터 첫째 오라버니랑 셋째 오라버니가 정신을 못 차리더라구요. 대놓고 빤히 쳐다보지 못할 뿐, 계속 힐끔거렸어요.”

놈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사내로서 그 심정을 이해는 한다.

사내의 입장에서 단목지 정도의 미녀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면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이제부터 저도 외부에 나갈 때는 좀 꾸미고 다닐까 봐요.”

특별한 날이라서 치장하고 나왔던 단목지를 보고 나름 부러웠던 모양이다.

저 심정도 이해는 한다.

평소 그다지 꾸미고 다니지 않는 송유하지만 얘도 이팔청춘이다. 남들 앞에서 더 예뻐 보이고 싶은 게 당연하다. 가뜩이나 원판이 빼어나지 않은가.

하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 단목세가와 우리는 처지가 다르다는 걸 자각할 필요가 있어.”

“네······?”

“그날 누이는 평상시의 모습으로 나갔는데도 객잔의 계단을 오르내릴 때 온 사내들의 시선이 집중됐었어. 길거리를 오갈 때도 그랬지.”

송유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때 사내들이 어땠는지 알아?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데도 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거나 눈치껏 힐끔거리는 법 없이, 대놓고 계속 바라봤다고. 그 의미가 뭘까?”

잠시 밝아졌던 송유하의 표정이 곧바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게 무슨 말씀······.”

“단목세가와 함께 있었던 단목 소저에게도 사내들이 그랬을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놓고 계속 바라봤을까?”

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리 없지. 시선 처리를 했겠지. 대놓고 바라보다가 혹여 단목세가의 심기를 거스르면, 누군가는 본보기로 호된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거든. 그 누군가가 재수 없으면 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거든. 단목세가니까. 한데 누이를 향한 사내들의 시선은 어땠다? 대놓고 시선 고정이었다. 그게 뭘 뜻할까?”

송유하는 이제야 내 말을 이해한 눈치였다.

그러나 내게 대꾸하지는 않았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답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답이 말해주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유하는 저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 쪽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이 없었다.

충격이 되긴 되었을 것이다.

송유하가 어떤 심정일지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나, 나는 그녀의 오라비다. 설령 송유하가 듣기 싫은 말이라 해도 그녀가 알아야 하는 것이면 말해줘야 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송유하에게 잠시 시간을 줘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오늘은 섣달그믐이다.

서고 근무도 오늘부터 사흘간은 휴무라서 여유가 있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송유하가 여전히 시선을 계곡물 쪽에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요. 사내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이런 현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누구도 오라버니처럼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그러니까 이런 용모를 하고 있는 제가, 어떤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내 말을 알아듣고 현실을 파악한 것 같으니 이 정도면 됐다.

다시 구보를 이어가자고 말하려는데, 송유하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더 얘기해 주세요. 이참에 제가 이 현실을 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게요.”

풀이 죽은 줄 알았는데 그렇기는커녕, 송유하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의외의 반응이라서 놀랐다.

얘도 가만 보면 참 특이한 애라니까.

“아니 뭐, 당사자인 누이가 현실을 인식했으면 된 거지, 굳이 뭘 더······.”

“오라버니라면 더 냉정하고 더 가혹하게 현실을 알려주실 수 있잖아요. 오라버니 말고는 이런 얘기 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얘가 평소 나를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건지가 의심스러워지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을 거면 이런 때 한 번에 확실하게 충격을 받아야 해요. 그래야 제대로 마음속에 각인돼요.”

안 좋은 소리를 더 해달라고 부탁 받기는 또 처음일세.

“아니 뭐, 누이도 알잖아. 힘도 없고 배경도 약한 미인의 삶은, 조금만 잘못돼도 급속도로 기구해질 수 있다는 걸.”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송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우리의 그 배경, 그러니까 그 허술한 울타리는 개선될 여지가 없어. 누이도 알다시피.”

“하면 결국 제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수밖에 없는 거네요.”

“응. 양들은 울타리가 꼭 필요하지만, 범은 울타리가 필요 없다고 할까.”

내 말에 송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

“가요, 오라버니.”

송유하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또렷해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구보를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누이.

머지않아 울타리가 필요 없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처럼만 열심히 해.

일단은 천천히 뛰기 시작한 상태에서 물었다.

“누이, 혹시 궁술 수업은 들어본 적 있어? 과목에 있다고 알고 있어서.”

“첫 학기에 배웠는데, 궁술 교관님 말씀으로는 제가 소질이 많은 편이래요. 이론을 듣고 실제로 처음 쐈을 때부터 남들보다 더 잘 맞추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학기 때도 배웠어요. 점수 얻기도 좋고 해서.”

애가 성격이 차분하고 무던해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그건 왜 물으신 건데요?”

“아, 아냐. 앞으로도 꾸준히, 열심히 익혔으면 해서.”

“음······, 다음 학기부터는 안 배울까 했는데,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계속 배워볼게요.”

송유하를 향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서서히 구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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