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2
제갈수광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본인의 허리춤에 흰색의 띠 같은 걸 묶었다. 얇은 천으로 만든 띠였다.
그가 매듭짓고 남아 있는 끄나풀 부분 두 가닥을 대충 이리저리 당겨보고 있다.
아마도 끄나풀의 길이를 가늠하는 듯했다.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인 제갈수광이 매듭 부분을 본인의 허리 뒤쪽으로 돌렸다.
끄나풀 부분은 제법 길어서, 두 가닥의 끝부분이 땅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였다.
뭘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보고 있는데 제갈수광이 말했다.
“송유겸, 내 움직임을 잘 보도록.”
그 말이 끝난 직후.
샤샤샤샤샤샤샤샤샥-
제갈수광이 경신술을 펼치며 실내 연무장의 가상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그냥 반듯하게 달리는 게 아니라, 어떤 때는 갈지자[之] 모양으로 달리고, 어떤 때는 원 모양을 그리며 달리기도 했다. 중간에 살짝 도약하여 허공에서 종횡으로 회전하기도 했다.
속도는 일정했는데,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일부러 저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곧 내 앞으로 돌아온 제갈수광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곧바로 양손바닥으로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어으, 어으, 골 울려, 이씨!”
숙취 때문에 저러는 건데, 속으로는 웃음이 나오나 겉으로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다.
제갈수광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며 내게 물었다.
“송유겸, 유심히 봤나?”
“예.”
“하면 지금 네 경신술 수준에서 이 끄나풀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던가?”
잠시 고민이 되었다.
현재의 내 수준에서는 매우 쉽게 잡을 수 있는 수준의 속도와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끄나풀이 길기에 더 쉬울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걸 곧이곧대로 말해도 되나?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솔직히 말하도록.”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제갈수광이 그렇게 말하더니 지체하지 않고 허리춤에 묶었던 매듭을 풀었다.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가능한지에 대해 실제로 점검 같은 건 안 해보십니까?”
“왜 그래야하지? 가능하다면서.”
“그, 그래도······.”
“뭐 하러 이런 걸로 의심을 하나. 당사자가 가능하다는데 그러면 됐지. 혹여 거짓말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는 나중에 본인이 감당할 일인 거고.”
와아, 가차 없는 인간 같으니.
“한데 왜 저만······.”
“저 아이들에게도 이미 똑같은 걸 보여주고 물어봤어. 저 아이들은 너보다 한 식경(30분가량) 전에 불렀거든.”
“아.”
두 소녀도 가능하다고 대답했는지 아닌지가 궁금했다.
한데 제갈수광의 성격으로 짐작컨대, 이런 거 물어보면 왠지 한 소리 들을 것만 같다. 그걸 내가 왜 궁금해 하느냐는 식으로.
물어보지 말자.
“밥이나 먹으러 가지. 얼른 가서 해장 좀 해야겠어.”
제갈수광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그와 다시 연을 이어가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자.
다음 주에도 제갈수광과의 일대일 교습이 있었다.
이번에도 실내 연무장을 한 바퀴 돌기만 했으나, 이전보다 끄나풀 부분이 짧아졌고, 경공술을 펼치는 속도는 빨라졌다.
제갈수광은 이번에도 내게 끄나풀을 잡을 수 있는지를 한 차례 물어보기만 했다.
나는 가능하다고 대답했고, 교습 시간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러니 이걸 교습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의아할 뿐이다.
이 주차에도 제갈수광은 첫 주차처럼 나와 두 소녀를 데리고 한 차례 식사 시간을 가졌다.
* * *
개학 열흘 후.
제갈수광이 총교관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총교관 노양홍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아, 어서 오게, 제갈 교관.”
“안녕하십니까, 총교관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제자들을 다시 맡은 소감이 어떤가?”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차분하게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수······. 아······.”
뭔가를 떠올린 노양홍이 안타까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의 입장에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음을 알고 있네. 훌훌 털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지. 때문에 자네가 술독에 빠져 살고 있다는 것도 아네만, 그래도 몸을 소중히 여기시게.”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인 노양홍이 물었다.
“그래, 조에 속한 관도들은 더러 만나봤는가?”
“상위반과 중위반 관도들은 아직 만나지 않았습니다. 상위반이야 알만한 아이들이고, 중위반은 이전의 승반 심사 내용들만 참고해도 대강은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필요에 따라서는 담당 반의 교관들이나 승반 심사를 감독했던 교관들에게서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지침대로 하위반 아이들에게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랬군. 알겠네. 내가 보던 업무가 있으니 이걸 처리할 때까지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게.”
“예.”
제갈수광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귓전으로 노양홍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 두 아이도 만나봤겠지?]
[예. 첫 날 만났고, 이번 주에도 한 번 더 만났습니다.]
[어떻던가?]
[예상대롭니다. 열여섯 살 소녀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둘 다 매우 뛰어납니다.]
[모습은 잘 감추고 있던가? 발각될 염려가 없을 정도로?]
[예. 저라고 해도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알아채지 못할 수준입니다. 가뜩이나 둘 다 계반이라서 딱히 남들의 관심을 끌 일도 없는 상황인지라.]
[낭중지추라 했네.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최대한 평범한 잠룡관 생활이 되게끔 우리가 신경을 써 줘야겠지.]
[예.]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잠룡관에서 딱 세 명.
관주 육남춘, 총교관 노양홍, 그리고 제갈수광이었다.
[그래서 관주님께서도 자네에게 맡긴 걸세. 자네는 서부지맹의 잠룡관도로 수학하던 시절에, 제갈세가의 방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지. 그로 인해 주목을 너무 많이 받아서 잠룡관 생활이 불편했을 테니, 자네라면 그 두 아이의 입장을 이해할 테니까. 명문세가 출신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도 자네고.]
호북의 유명한 무림 세력인 무당파와 제갈세가는 모두 호북 서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 두 세력의 후기지수는 서부지맹으로 입관한다.
제갈수광도 그래서 서부지맹의 잠룡관도 출신이었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제갈수광이 대꾸하자 노양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자네가 맡은 조 또한, 그 두 아이의 실력을 고려해서 편성했음을 알 것이네. 드러나지 않은 실력자가 두 명이나 들어가 있으니, 드러난 면만 보면 조의 전력이 매우 약해 보이지. 거기에 교관인 자네의 역량까지 고려했으니 더더욱 약해 보일 거고.]
노양홍의 전음이 바로 이어졌다.
[모든 면에서 공정하게 전력을 배분했으니 실제로는 다른 조들과 전력차가 거의 없을 테지만, 조원들이 막상 조의 구성을 알게 되면 불평들이 가득하겠구먼. 허허.]
[누구나 때때로 드러난 면만 보고 평가하는 우를 범하곤 하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도 겪어봐야 각자 배우는 것들도 더 많아질 겁니다. 게다가 저는 현재 제가 맡은 조의 편성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호오, 따로 관심 가는 아이라도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냥 왠지 감이 좋습니다.]
실은 송유겸 때문이다.
송유겸이 제삼서고를 드나들기 시작한 시점부터 오랫동안 조용히 지켜봐왔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절대로 계반 수준일 리가 없는 아이.
아직 스물도 안 됐는데, 그 나이답지 않게 묘하게 믿음직한 구석마저 있는 아이.
정확한 경지는 알 수 없으나, 웬만한 중위반의 관도들과 비교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 아이가 바로 송유겸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인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굳이 내가 이곳에서 먼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게다가 전력 면에서도 잘 된 일이다.
노양홍이 각조의 전력 분배에 최대한의 공정함을 기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송유겸이라는 요소는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송유겸을 모르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별 것 아닌 계반 관도처럼 취급하며 자신의 조에 넣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제일서고의 임시 관리자 건으로 고마운 면이 있으니 자신이 한 번 맡아 보겠다는 이유로.
노양홍이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말했다.
“해적 퇴치 건이 교착 국면으로 접어드는 모양일세. 무인들을 추가 파견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는 바, 아이들의 훈련에도 좀 더 박차를 가해주시게.”
“그렇지 않아도 실력이 취약한 아이들 위주로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잠깐씩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래, 뭐. 제갈 교관이 알아서 잘 하겠지.”
두 사람의 대화는 이후에도 조금 더 이어지다가 끝났다.
* * *
삼 주차, 사 주차가 지나고 오 주차가 되어도 제갈수광의 교습 방식은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때마다 허리에 묶은 끄나풀은 계속 짧아졌고, 제갈수광의 속도도 계속 빨라졌다.
오 주차쯤 되었을 때에는 난이도가 상당히 상승한 상태라, 어찌 대답해야 할지도 제법 고민이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당연히 쉽게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내가 계반이다 보니 어느 수준으로 보이는 게 좋을지가 고민되었던 것이다. 제갈수광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가능하다고 대답해줬다.
돌이켜 보니 어차피 제갈수광은 처음부터 계반 관도들에게 전투력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했었다. 경신술만 보겠다고 했었다.
그러니 내가 그간 부지런히 경신술 위주로 수련하여, 전반적인 무공의 수준보다 경신술의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를 대도 될 것 같았던 탓이다.
실제로 무공의 경지가 낮은 이들은 경신술부터 집중적으로 연마하는 경우가 많다.
제갈수광도 내 대답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은 채, 오 주차의 교습을 끝냈다.
오 주차쯤 되었을 때는 겨울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 * *
제갈수광, 유은무, 장우혜 등의 세 사람과 얽히는 시간을 빼면 내 일상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송유하는 꾸준히 내 회회심공 수련을 도왔고, 나는 꾸준히 그녀의 고천비룡결 성취를 도왔다.
송유하의 고천비룡결은 극초반 단계를 넘어서서 성취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상태다.
송유하가 내 가르침에 일말의 의심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녀가 이전의 심법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유하가 미친 듯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반 성취에 많이 신경 써 준 덕분에 지금은 이성 수준인데, 머지않아 삼성 수준으로 올라설 것 같다. 그러면 곧바로 백년음양선과의 줄기와 잎을 복용시킬 생각이다.
그 후에는 딱히 신경 써주지 않아도 송유하가 알아서 열심히 할 것이다.
풍우비룡무도 슬슬 전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전하기 시작한 건 일단 보법과 신법, 즉 경신술이다.
다른 무공들을 익히기 위한 기본이 바로 경신술이기에, 경신술의 성취가 높을수록 다른 무공을 익히는 데도 더 도움이 된다.
게다가 유용하기까지 하니까.
섣달그믐날 모였던 인원들과도 약속대로 일 월말에 한 번, 이 월말에 한 번 만나서 친분을 이어갔다.
* * *
육 주차쯤 되니 삼월이 시작될 즈음이라, 날도 따뜻해지고 있었다.
제갈수광의 교육이 생각보다 내 수련에 방해가 덜 되어서 만족하고 있었는데 웬 걸, 그것도 육 주차에 곧바로 깨졌다.
제갈수광이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나와 유은무와 장우혜를 부르더니 이렇게 통보한 것이다.
“오늘부터 합숙이다.”
“예에에에에?”
나와 유은무와 장우혜의 입에서 동시에 그 소리가 나왔다.
저 인간의 예측불가한 성향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라니.
“해적 퇴치가 만만치 않아, 동부지맹 전력의 추가 파견이 결정되었다. 무림맹 본맹과 남부지맹에서까지 전력을 파견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갈수광이 바로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이로 인해 발생한 동부지맹의 전력 누수는 예비 전력인 잠룡관도들이 채워야 한다. 동부지맹의 무인들이 평소에 담당하던 임무를 우리가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급박한 바, 최대한 빠르게 준비시켜서 곧바로 동부지맹의 평상 임무에 투입시키라는 상부의 지침이다.”
해적들의 규모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그들이 치고 빠지는 전술을 워낙 잘 써서, 현재의 전황이 교착 상태라고 듣긴 했었다.
소충광 등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이렇듯 전력의 추가 파견이 결정된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윗반에 속한 우리 조원들은 이미 합숙을 마쳤다. 상위반의 조원들은 굳이 합숙이 필요치 않아서 넘겼으나, 무기경 반의 조원들은 오박육일, 신임 반의 조원들은 육박칠일이었다. 그래서 근래에는 너희들과 만나는 일정에도 조금씩 변동이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 인간이 농땡이를 부리느라 한 번씩 일정을 변경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계반인 너희들에게는 그간 경신술만 강조했다. 내 뜻을 알고 있으니 너희들도 경신술만큼은 집중적으로 단련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이번 합숙은 그걸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더욱 단련하는 목적이며, 필요하다면 무공 전반에 대한 다른 부분들도 점검할 계획이다.”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상태에 따라서 합숙 기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 일단은 최대 육박칠일을 상정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바란다. 반 시진 내로 준비해서 제삼서고 위쪽의 언덕으로 집합하도록.”
그 말을 마친 제갈수광이 연무장을 휙 벗어났다.
우리 조원들 중 합숙도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며칠간의 합숙마저 끝나면 왠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이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