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49
다음 날 오전에 태화지부를 돌아보니 무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방비를 위한 최소 인원 정도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태화지부의 내각주 진극태가 우리의 막사에 와서 모두를 불러 놓고 그 일에 대해 설명했다. 내각주는 태화지부의 행정 책임자다.
“알다시피 태화의 남부는 온통 산지와 구릉지일세. 그런 지형이 엄청나게 넓고 깊게 펼쳐져 있지. 무이산맥과 남령산맥이 만나는 지역이기도 하고.”
산지가 매우 넓으니 산채들도 많다.
당연히 산적들의 활동들도 많다.
강호 초출들은 산적들을 한낱 산에서 활동하는 도적들 따위로 치부하곤 하는데, 제대로 된 산채의 산적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인근 산지의 지형들을 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어 거점 용도로 이곳에 무림맹의 지부가 설치된 것이기도 하다.
그간 관부와 백도 무림이 힘을 합하여 이쪽의 산채들을 두 차롄가 토벌했다고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피해가 제법 컸다고도 들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토벌해도 잠시만 잠잠해질 뿐,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산채들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근래 그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외각의 요원들 다수가 실종되었네. 수년간 이쪽에서 활동해온 빼어난 요원들이었지. 그들의 종적을 찾기 위해 무각의 소수정예가 투입되었는데 그들의 종적 또한 묘연해졌네. 그래서 며칠 전에 무각의 무인들이 대대적으로 그쪽으로 투입된 걸세.”
그 일로 인해 이렇듯 태화지부가 비어 있다는 말이었다.
당연한 조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누가 목숨 걸고 태화지부를 위해, 또는 무림맹을 위해 일하겠는가.
“물론 동부지맹에도 보고했네. 즉시 조치하겠다는 답신도 받았지. 한데 제대로 된 지원이 올 수 있을지······.”
근래 동부지맹에 남아 있는 전력이 적다는 걸 진극태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물론 본맹 측에 연락해서 그쪽의 지원도 요청했네. 회신은 받았으나 그쪽에서 오는 길은 좀 오래 걸리겠지.”
간단한 설명만 들었음에도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겠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인지 표정들이 심각하다.
나는 이상함마저 느끼는 중이다.
아무리 지형적 이점을 안고 있다 해도, 산채들 수준에서 감히 백도 무림맹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인다고? 백도 무림맹에 소속된 무인들을 상대로?
산채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
무림맹이 이곳의 산채들을 상대로 이렇듯 방비만 하는 건, 결코 산채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토벌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이전의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큰 의미가 없는 일에 무의미한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한데 이렇듯 대놓고 도발을 해오면 당연히 무림맹의 입장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본맹의 정예들을 투입하여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게 빤하다.
산채들도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도발을 한 것이다.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없다.
“아까 근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혹여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잦았습니까?”
제갈수광의 질문에 진극태가 대꾸했다.
“아닐세. 물론 상대가 산적들이다 보니 자잘한 사건들이야 자주 발생하지. 그러나 설령 우리 요원들 두세 명이 산적들에게 붙잡혀도 이삼일 후면 풀어주는 게 불문율이었네. 산채들의 입장에서는 경고의 의미로 잠시 구금하는 정도인 거지. 상대가 우리 무림맹이니까.”
“아.”
“내가 이곳에서 일한지가 이십 년이 살짝 넘었는데, 이렇듯 다수의 인원들이 오랫동안 실종된 경우는 토벌시기 이외에는 없었네. 근래 우리가 그들을 위협한 일도 없었고.”
딱히 서로간의 분란 거리가 없었는데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
즉, 최근에 산채들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의미다.
그러니 더 이상하다.
몇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강력한 누군가가 이쪽 산채들을 완전히 통일하여 장악했을 가능성이다. 그 경우, 내부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기 위해 평소와 다른 실력 행사를 할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외부 세력과의 결탁 가능성이다.
정황상 강대한 외부 세력일 것이다. 그들의 꾐에 넘어갔을 수도 있고, 힘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조종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천마신교 또한 그런 식으로 산채나 수로채 등을 이용하기도 했었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쨌거나 이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차분히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태화지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우리 조의 역할도 태화지부에 인접한 현들만 순찰하는 정도였다.
제갈수광과 담당 무인들도 안전할만한 곳들로만 우리를 이끌고 다녔다.
첫날의 순찰이 끝나고 태화지부로 복귀하는 중에 장우혜와 유은무에게 말했다.
“누이들, 태화지부에 머무는 동안에는 수련을 해도 공력 사용을 자제하고 몸 푸는 정도로만 해. 체력 관리도 마찬가지야. 알았지?”
장우혜가 궁금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태화지부가 썰렁하잖아. 혹시 모를 일이 생기면 이곳을 방비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고.”
그러자 유은무가 내게 물었다.
“설마 태화지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좀 과한 염려 아닐까요? 이곳 무각 소속의 무인들 다수가 산지로 투입됐잖아요. 그런데도 산적들이 전력을 나눠서 이곳을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장우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까요? 가뜩이나 동부지맹에서도 지원 전력이 이미 출발했다고······.”
이에 나는 빙그레 웃어주며 두 소녀에게 대꾸했다.
“역시 우리 누이들, 똑똑하네. 나도 그 말에 동의해. 그래도 일단 대비하고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뭐, 그거야 옳은 말씀이긴 한데······.”
“저, 어쨌든 송 오라버니 말씀대로 할래요.”
둘 다 논리적으로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순순히 내 말에 따를 모양이다.
저런 거 보면 둘 다 참 귀엽긴 하다.
우리 조가 태화지부에 머무는 일정은 원래 육박칠일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후에 동부지맹으로 가서 일주일쯤 평상 임무를 수행하다가 잠룡관으로 복귀하게 될 거라고 들었다.
한데 이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에 태화지부에서의 일정도 사박오일로 축소되었다.
나흘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조는 태화지부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 * *
자던 중에 매우 불쾌한 기운을 느끼고는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아무리 전생의 경험이 있다 해도 수면 중에 이런 걸 느끼기란 쉽지 않다.
혹시 모를 위험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밤까지 긴장 상태로 수면을 취했기에 가능했던 거다. 흑풍대 시절의 훈련 덕분이다.
아직 사위가 매우 어둡다. 시간은 잘 모르겠다.
머리맡에 놔뒀던 비룡검의 검집을 움켜쥔 후, 잠시 집중하며 그 기척들을 살폈다.
일일이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기척들이 많다.
그 중에 사파인들 특유의 기척들도 다수 섞여 있다.
태화지부에서 지내는 내내 우려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는 이곳 산채들의 최근 움직임이 사파와 연관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일전에 산장에서 사파의 십대들과 직접 마주했기에 가능했던 의심이다.
그때의 십대들이 사파의 계획에 의해 키워진 애들 중 일부라고 가정하면, 사파 세력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저변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 경우라면 이쪽 산채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점에 대해서도 설명이 될 수 있다. 사파 쪽에서 손을 뻗었다면 산채들도 뒷배를 믿고 저럴 수 있으니까.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심정적으로는 내 억측이길 바랐었다.
그래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이곳에서의 일정을 마칠 수 있기를 매우 간절히 바랐었다.
한데 결국 이렇게 되다니.
이 상황에서 내 신경을 더욱 자극하는 건, 저 사파의 기척들 중에 내가 산장에서 느꼈던 종류의 기척들이 적잖게 섞여 있다는 점이다.
확인해 봤을 때 그들이 정말로 십대라면, 내 추측 속에만 머물러 있었던 많은 부분들이 현실성을 더해가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것들을 빠르게 챙긴 후 신발을 신고 있는데 단목강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 또한 일어나자마자 검부터 챙기더니 의복을 입으며 준비를 하고 있다. 저 기척들을 느낀 것이다.
역시 육룡의 일인답다.
이 방에는 남자 조원들만 자고 있는데, 다른 애들은 여전히 일어날 기미가 없다.
그때 우리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제갈수광.
그 또한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모습이었다.
제갈수광이 낮게 외쳤다.
“기상! 기상! 비상 상황이다! 유등 켜지 말고 빠르게 전투 준비를 마친다!”
말을 던진 제갈수광이 방 문 앞에서 사라졌다.
옆에 있는 방들로 향하는 것이다. 여자 조원들이 자고 있는 방과 무인들이 자고 있는 방이다.
남자 조원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할 즈음, 호각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삐익! 삐이이익!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잠시 후, 제갈수광이 우리 방의 문 앞으로 오더니 누군가를 향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방향을 보니 단목강 쪽이었다.
* * *
[잘 들어, 단목강.]
교관 제갈수광의 갑작스러운 전음에 단목강이 얼른 대꾸했다.
[예, 교관님.]
[곧 우리 모두가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나는 교관으로서 어떻게든 우리 조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열 명이 넘는 인원들이라, 나 또한 이리저리 움직이는 상황이 잦을 수밖에 없다.]
[예.]
[그 경우, 내가 자리를 비운 쪽이 위험해질 수 있다. 즉, 네가 상황을 잘 보고, 알아서 그쪽을 메워줘야 한다는 뜻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너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조원들이 우왕좌왕할 테니까.]
대부분 이런 상황이 처음일 테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도 한 사람만큼은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최적의 움직임을 보일 거다. 그를 믿고 움직임을 맞춰주면 웬만한 위기는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찰나지만 의문이 들었다.
누굴 말하는 걸까.
부조장 묘옥련? 아닐 것 같다.
하면, 무공 실력을 감추고 있는 장우혜?
몇몇 조원들을 혼내주던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으니, 아마도 그녀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갈수광이 마지막 전음을 남기고는 문 앞에서 사라졌다.
[그 조원은 송유겸이다.]
단목강의 눈동자가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온 탓이었다.
‘송유겨엄······?’
그와는 조 활동에 필요한 대화 이외의 사적인 대화는 조금도 나눠본 적이 없다.
「송유겸 공자님은 묘한 매력이 있는 분이세요.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분이기도 해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느낌도 강하구요.」
「상대에게 뭔가를 바라지도 않고,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인 태도가 비굴함이 없이 당당합니다. 그렇다고 정이 없다거나 그런 건 또 아닙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여동생과 사촌동생의 평가였다.
같은 조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가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동생들과의 친분을 언급하며 다가와서 사담이라도 걸 줄 알았는데, 저 송유겸은 일절 그러는 법이 없었다. 같은 조로 활동한지가 이렇듯 오래 되었는데도.
하지만 그뿐이었다.
동생들이 말하던 분위기처럼 뭔가 더 대단해 보이는 느낌은 없었다. 무공 쪽은 더더욱 그랬고.
한데 왜 제갈수광은 송유겸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한 걸까.
‘그러고 보니······.’
단목강의 눈매가 좁아졌다.
자신이 위험을 느끼고 상체를 일으켰을 당시, 송유겸은 이미 일어나서 신발을 신는 중이었다. 그 외의 준비는 모두 마친 모습이었다.
‘나보다 더 빨리 이 위험을 알아챘다고······?’
선뜻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정황상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빠르게 전투 준비를 마쳤다는 건, 저 기척들을 진작부터 느꼈다는 뜻이다. 계반인 그가.
게다가 이제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
교관 제갈수광이 괜한 말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 조원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온통 허둥대고 있는데, 송유겸은 이미 방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