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63
노인은 방금 전의 느낌을 잊고 싶지 않다며 초식을 한 번 더 시전해보겠다고 했다.
팔 단계에서 이번에도 우레 소리가 났는데, 아까의 미세했던 소리보다 약간 더 컸다.
노인은 본인이 해내고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어떻게 이게 가능해졌는지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시오?”
이에 나는 각 단계별로 내가 파악한 것들을 말해줬다.
전체적인 흐름이 어떤지도, 왜 그 흐름 속에서 중간의 여러 단계들이 사족인지도.
“팔 단계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강’은 십 단계에 이르러 절제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쾌’가 더해지며 후반 단계로 넘어갑니다. 강이 절제되었음에도 쾌가 더해졌기에, 전반적인 위력 자체는 후반 단계에서 더 강성해지지요.”
강은 강맹함이며 쾌는 빠름이다.
“후반 단계는 전체적으로 ‘유’의 묘리가 깃들며 동작들은 간결해집니다. 그렇기에 창이 팔방을 누비는 와중에도 모든 면에서 더없는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유는 부드러움이다.
내 말을 모두 듣고 난 노인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노인에게 말했다.
“과거의 무학은 초식의 변화무쌍함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무학은 간결함 위주로 전체적인 속도감을 중시합니다. 허초를 최소화하고 실초 위주로 적을 압박합니다. 간혹 섞이는 허초라도 실초에 가깝게 구사해야만 그 간결함과 속도감이 유지됩니다.”
“아······.”
“그러려면 공력 운용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합니다. 저는 그 부분들에 중점을 두고 어르신의 창술을 살폈던 것뿐입니다.”
노인이 여전히 놀란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어르신의 가전 창술도 초창기에는 제가 말씀드렸던 아홉 단계 위주로 구성되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초식에 변화무쌍함을 주는 형태가 대유행하는 시절이 오자, 당시의 선조들께서 변화를 가미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그 변화된 창술이 충분히 통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때의 형태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거겠지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 세대가 변하며 전체적인 무학의 수준이 발전했음에도, 우리는 옛 것만 답습하고 있었다는 뜻이구려. 중간 선조님들처럼 시대에 맞는 변화를 모색하려 하지 않은 채.”
“선조들의 노고를 기리며 지키고자하는 후손들의 마음 자체는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조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 훌륭하다는 뜻이니,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노인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노인이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구려. 나는 이 장원의 주인인 정우립이라는 사람이오. 공자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송유겸이라 합니다.”
“송유겸. 송유겸 공자······.”
입속으로 내 이름을 되뇐 정우립이 내게 물었다.
“송 공자께서는 혹시 천재시오?”
“처, 천재라니요. 아닙니다, 그런 거······.”
“송 공자의 말을 듣는 내내 놀람을 금할 수 없었소. 정확한 기억력, 해박한 무학 지식, 명쾌한 추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탁월함이 절로 느껴졌소. 그런 사람이 천재가 아니면 무엇이오?”
“아하하. 저는 그냥 무학 연구가 취미라서······.”
아무리 변명을 해도 정우립의 눈빛에 담긴 경외심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정우립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다.
나 또한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려 했던 것이고.
정우립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먼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중반부의 우레 소리 말이오. 원래 우리 가전 창술을 제대로 익히면 그 소리가 나야 한다고 전해져 왔소. 그러나 지난 몇 대에 걸쳐 내 부친에 이르기까지, 그 우레 소리를 들었다는 분은 한 분도 없었소.”
정우립이 말을 이어갔다.
“나 또한 평생을 피나게 수련했소. 한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소. 그냥 선조들이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소. 그러다가 송 공자 덕분에 미세하게나마 그 우레 소리를 듣게 된 것이오. 나와 우리 가문 전체가 송 공자에게 더없는 은혜를 입었소.”
“은혜라고 하실 것까지는······.”
내가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유는, 정우립이 갑자기 나를 향해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인 탓이었다.
“저저, 정 장주님······!”
“이 정우립, 앞으로도 송 공자의 은혜를 뼈에 새기고 살 것이오.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아,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자세 좀 푸십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간청하듯 말했음에도 정우립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치없다는 걸 알고 있으나, 송 공자께 간청 드리고 싶은 게 있소. 이 창술의 연결 부분 보완을 도와주시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허리 펴십시오.”
정우립이 그제야 천천히 허리를 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이후에 정우립에게 말했다.
“약조했으니 성심껏 돕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도와드린다 해도 그 결과물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완벽한 무공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 점은 감안해주셔야 합니다.”
“완벽한 무공은 없다라······.”
정우립의 표정에 미소가 걸렸다.
저 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과연 천재는 생각하는 차원부터가 다르구려. 허허.”
“아니,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며 초고수들을 여럿 봤소. 한데 무학에 대한 지식과 안목 면에서 송 공자만큼 빼어난 사람을 본 적은 없었소. 우리의 가전 창술을 보완하는 면에서도 송 공자가 최고의 적임자임을, 나는 믿소.”
“장주님께서 제 역량을 너무 과신하시는 듯합니다.”
정우립은 미소만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정우립에게 말했다.
“하면 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지금 바로 초반 단계 쪽부터 시작해 보시겠습니까? 여러 형태들을 직접 눈에 담아놓아야 제가 나머지 시간에 구상을 이어가기에도 편할 듯합니다.”
“오! 그래주시겠소?”
정우립은 이러다가 밤을 새도 상관없다는 기세였다.
간절한 입장이다 보니 저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에 나는 정우립의 반복된 초식 시연을 계속 지켜봤고, 필요한 경우에는 내가 부분적으로 직접 창을 휘두르며 여러 동작들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 *
정가장에서의 사흘째.
오늘도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별채를 나섰다.
어제 정우립이 본채에 잠깐 들러달라고 부탁했었기에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본채의 뜰에서 정세건이 나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송 공자님. 할아버지께서 서재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정세건을 따라 정우립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도착해서 정우립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정세건의 모친이 차를 내어왔다. 그녀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에 정세건과 그의 모친이 서재를 나갔고, 나와 정우립은 탁자를 마주한 채로 앉았다.
곧 정우립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올렸다.
얇은 서책이었는데 표지에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청파심공靑波心功>
나는 곧바로 눈매를 좁히며 정우립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정가장의 가전 심법서입니까?”
“그렇소.”
“가전 심법을 저 같은 외인에게 함부로 보이시다니요?”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정우립이 노안에 미소를 지은 채로 대꾸했다.
“송 공자가 왜 외인이오? 은인이지.”
“아니, 그, 그래도······.”
정우립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늙은 구렁이가 미소를 짓는다면 딱 저렇지 않을까 싶다.
“내가 지금 매우 염치없게 굴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어제도 밝혔듯 나는 이미 변화를 위한 결심을 마쳤소. 송 공자 같은 귀인을 만난 이 기회를 꼭 잡고 싶소.”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 정우립, 결코 은혜를 가볍게 여기며 살아온 사람은 아니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서 송 공자에게 이 은혜를 갚으며 살 것이오. 내가 다 못 갚으면 내 아들과 내 손자를 통해서라도 꼭 갚게 할 것이오.”
강한 의지도 느껴진다.
“가져가서 쭉 읽어봐 주시오. 현대의 무학을 기준으로 수정할 수 있는 부분은 수정하고 싶소. 이후에는 우리가 그 묘리에 따라 제대로 심법 공부를 해나갈 수 있도록 점검도 해주셨으면 좋겠소.”
“심법서는 대개 난해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그런 구절들은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아무리 저라도 심법을 손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송 공자를 믿기에 가전 심법까지 보여드리는 것이오. 해석 또한 당연히 송 공자의 해석을 믿을 것이오. 송 공자께서 최선을 다해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오.”
나는 무학 이론에 밝으며, 무공 연구도 늘 하고 있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그리 부담되는 일은 아니다.
나 또한 의도가 있기에 저런 부탁들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쯤이면 슬슬 내 목적을 위한 발걸음도 한 걸음쯤은 떼어야 할 때다.
“저 또한 부탁드리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습니다.”
내 말이 정우립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오. 내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면 최선을 다해 들어드릴 것이오.”
“무공을 점검하고 수정, 보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심력 소모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조금만 잘못 수정돼도 그 결과가 크나큰 오류로 연결될 수 있다 보니, 온 신경을 집중하여 면밀하게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이런 일에 개입하는 걸 극도로 꺼립니다.”
“이해하오. 그게 어디 보통 일이겠소······?”
정우립이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일단은 정우립의 마음속 미안한 감정을 극대화시켜 놓을 의도로 꺼낸 말인데, 저 표정을 보니 충분히 성공했다.
“원래는 저의 이 역량을 드러내는 일도 없는데, 지금은 어쩌다가 장주님의 수련에 개입되어 도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장주님께서 알게 되신 제 역량에 대해서는 함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소? 당연히 함구할 것이오.”
“지인들이 무공 변화에 대해 질문하거든, 그냥 장주님이 하도 답답해서 심심풀이로 바꿔봤다고 하십시오. 우연히 그게 효과가 있어서 변형시켰다고 하시면 될 겁니다. 이게 첫 번째 부탁입니다.”
정우립이 나를 향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반드시 그리하겠소.”
정우립이 말했다.
“첫 번째 부탁은 실질적으로는 당부였구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보통 두 번째가 본론이지요.”
“지금부터 제가 드릴 말씀은 장주님에게는 민감한 문제일 겁니다. 그러나 다른 악의를 갖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송 공자는 나와 우리 가문의 은인이시오. 무슨 얘기를 꺼내실지 모르겠으나, 설령 내가 역정을 낼 문제라 해도 절대 감정적으로 임하지 않겠소.”
눈동자에 긴장감과 경계심이 살짝 엿보였으나, 그럼에도 정우립은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려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첫날 정 공자의 안내를 받으며 본채 근처를 지나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장주님께서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자, 빚, 원금, 상한기간, 압류 등의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 같더군요.”
내 말에 정우립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를 향해 곧바로 말을 보탰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염탐한 거 아닙니다. 정 공자에게 물어보시면 당시의 제 행적에 대해서는 확인이 가능하실 겁니다.”
커졌던 정우립의 눈동자가 서서히 본래의 모양을 찾아갔다.
정우립이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대꾸했다.
“의심하지 않소. 송 공자 같은 역량을 가진 분이 굳이 뭐 하러 우리 집안을 염탐했겠소. 어디 가서 그 역량을 밝히기만 해도 크게 중용될 분인데.”
내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정우립이 말을 이었다.
“그 일이야 뭐, 이 근방 사람들은 대강들 아는 일이라 딱히 비밀도 아니오. 내 입장에서는 좀 창피스러운 일이긴 한데, 송 공자께서 듣고 싶은 모양이시니 말씀해 드리리다.”
“감사합니다.”
정우립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왕 말씀드리는 거, 송 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곳과 우리 가문의 역사부터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구려. 이 또한 인근을 조금만 탐문해보면 알게 될 일이라 딱히 비밀도 아니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립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정가장이 아니라 포양창문이오. 송 공자의 세대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문파명이겠으나, 과거에는 적어도 창술과 봉술 분야에서만큼은 강서 제일로 통했소. 때문에 당시에 강서제일창이라는 별호도 수대에 걸쳐 우리 가문이 독차지했었소. 그때가 이곳이 가장 융성했을 때였지······.”
정우립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그의 말을 방해하거나 끊지 않은 채, 최소한으로만 맞장구를 쳐주며 차분히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