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64화 (64/416)

내 안에 마교있다 64

문파가 융성한 시기에는 재정 상황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문도들이 많으니 입문비나 수업료를 통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재원 확보가 되는데, 사실상 주된 재원은 후원금이다.

잘 사는 문도들의 가문에서도, 지역 유지들한테서도, 적잖은 후원금이 들어온다. 잘 나가는 문파인 만큼 잘 보일수록 그들에게도 도움 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문도가 문파 생활을 마치고 상단, 전장, 장원, 표국 등의 무사로 취직하게 되면 그쪽에서 들어오는 후원금들도 적지 않다. 그들 또한 수준 이상의 무인들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해, 해당 문파와 꾸준한 호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문파의 평가에는 대표 고수의 무공 경지가 주된 영향을 미친다. 대문파 이상이 아니면 대표 고수는 대개 문주이거나, 문주의 자식 내지는 적전제자다.

대표 고수의 경지가 상대적으로 뒤처지기 시작하고 그 현상이 장기화되면 문파 또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문도들의 수가 줄면서 후원금도 하나둘씩 끊긴다.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상, 시간이 갈수록 그런 현상은 계속되며 가속화된다.

문파나 세가는 많기에, 굳이 쇠락하는 문파를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들어보니 포양창문 또한 수대에 걸쳐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정우립의 조부 시절까지는 그나마도 보유 현금이 남아 있어 근근이 버텼으나, 정우립의 부친 시절 후반부터는 적자로 돌아선 것이다.

소유한 대지가 넓다 보니 세금을 포함한 유지비만 해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초반에는 전장이나 상단 등을 통해 저리로 조금씩 대출을 받아가며 버텼으나, 별다른 수입원이 없는 터라 그 부채도 점점 늘어났다.

부채가 늘면 이자도 늘어나니, 유지비를 감당하는 일 또한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눈물을 머금고 장원 주변의 자투리 대지를 정리하여 그쪽의 부채는 해결했으나, 유지비로 인한 적자는 근원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이미 그쪽 업계에도 소문이 쫙 퍼진 상태라, 대지를 담보로 잡지 않는 이상 대출도 어려워졌다.

정우립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이 땅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들게 버티던 중, 매우 친했던 지인의 소개로 투자를 알선 받게 된다.

수익률이 좋다고 생각하여,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끌어 모아 그 투자를 했던 게 화근이었다.

지인은 애초에 정우립의 간절한 상황을 이용하여 한몫 챙기고 도주할 계획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결국 정우립은 그 지인의 채무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기본 유지비도 만만치 않은 상태에서 그 채무에 대한 이자까지 더해졌으니, 상황은 갈수록 악화일로였다.

무공을 수련하는 대신 뼈 빠지게 일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는 계속 늘어만 간 것이다.

알고 보니 채무와 연관된 곳이 하필이면 포양호 일대에서 규모가 큰 흑도 세력이었다고 한다.

사정을 빤히 알고 있기에, 그들은 아예 정가장이 소유한 좋은 대지를 집어 삼킬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정가장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외부에서 수없이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포양호의 수산 자원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단체를 구성하여 어획 활동까지 제한시키는 중이란다.

그야말로 정가장의 입장에서는 사면초가인 셈이다.

“송 공자 덕에 변화된 가전 무예라면, 나는 충분히 우리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러나 제대로 빛을 보려면 일정한 세월은 필요한 법이지요.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 결국 세건이 그 아이의 몫일 텐데······.”

정우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고로 그 아이는 내가 보기에 무공 자질이 좋소. 한데 녀석도 집안일을 돕느라 제대로 수련할 시간이 없소. 그래서 그 아이만 보면 너무 미안하다오.”

제대로 수련을 못하고 있는데도 그 나이에 그 정도 수준이라면, 정세건의 무공 자질이 좋다는 정우립의 말도 과대 포장은 아닐 것이다.

“그 아이의 무공이 상승하여 수준급의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최소 십오 년에서 이십 년 이상 걸릴 것이오. 그때까지 이 장원이 현재의 규모를 유지하며 버티는 건 불가능하오. 그 시점까지 내가 살아 있기도 어려울 것이고.”

정우립이 바로 말을 이었다.

“막상 그 아이가 이곳을 다시 일으킬만한 경지에 오른 시점에는, 중흥의 토대인 이 장원 자체가 크게 축소된 상태인 것이오. 그 또한 중흥의 걸림돌이 되겠지요. 송 공자 덕에 문파 재건의 실마리가 생겨서 좋아라했는데, 그 현실이 떠오르다보니 어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소.”

정우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며느님이 계시던데 아드님은 혹시······.”

“내 아들은 무공에 재능이 없어, 애초에 어려서부터 학문을 했소. 관직에 진출하여 가문을 도울 계획이었소. 분명히 학문 쪽 재능이 상당히 뛰어난데 향시만 치렀다하면 낙방이오. 내 탓이오. 내가 어렸을 때 아들놈을 과하게 다그쳐서, 중요한 일을 치를 때면 지나치게 긴장하며 주눅 드는 성격이 된 것이오.”

“아.”

“친분이 있는 사찰이 있소. 지금도 그곳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는 중이오. 아들놈의 이름은 정창극이오. 창술의 극을 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필극이라고 지을 걸 그랬소. 붓의 극을 보라는 의미로.”

붓은 학문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정우립은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은 걸 파악하고 농을 한 것이다.

아예 반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눈치껏 살짝만 웃어줬다.

정우립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장원의 재정 문제는 어찌할 계획이십니까?”

정우립이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현재의 부채만을 생각할 일은 아니겠지요. 손자 녀석의 미래까지 생각해서 장기적으로 버틸 생각까지 해야 하오. 집중적으로 무공을 수련시키려면, 나와 그 아이는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할 시간이 없을 테니까.”

당연한 판단이다.

미래를 위해서는 무조건 정세건의 성취를 높이는 일에만 모든 걸 걸 때다. 결국 정우립 또한 여생을 정세건을 단련시키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어설프게 일과 수련을 병행하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 후일을 도모하는 것조차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대부분의 부채는 아까 말씀드린 자들 쪽에 있지만, 연주상단의 남창지점 쪽에도 부채가 좀 있소. 관 지점장과 양 총관이 내 사정을 딱히 여겨 저리로 대출해주었소. 그들은 그 외에도 여러 모로 신경을 많이 써줬소.”

“아.”

“상단주도 아니고 고위 관리자일 뿐이니, 그들 또한 우리에게 대출해준 일로 곤란함이 많을 거요. 고마운 사람들을 계속 곤경에 처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우립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부분까지 더해서 대충 계산을 해봤소. 현재의 모든 채무관계를 정리하고 최대 이십 년간 버틸 생각을 하면, 현재 보유 중인 장원 대지의 절반 정도는 정리해야 할 것 같소.”

그 말에 나는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흑도 세력 쪽에 처분하지는 않을 것이오. 이왕이면 내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도와줬던 연주상단의 남창지점 쪽과 우선적으로 협상을 해보는 게 좋지 않겠소? 그걸로 흑도 세력 쪽의 빚도 해결할 생각이고.”

정우립이 바로 말을 보탰지만, 나는 이미 그전의 말에 꽂혀 있는 상태였다.

이쪽 시세는 정우립이 더 잘 알 테니 그의 계산이 대강 맞긴 맞을 것이다.

그 계산으로 장원 대지의 절반이라고 했다.

정가장의 대지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담장이 둘러져 있는 안쪽만 따져도 상당히 넓다.

몰랐을 때는 일개 장원 치고 대지가 매우 넓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과거에 남창 인근에서 잘 나가는 문파였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는 된다.

나는 처음부터 정가장에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정가장이 소유한 땅을 차지할 목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건 아니다.

입지가 좋은 게 부럽긴 했지만, 이런 땅을 차지하는 일은 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땅 주인이 팔 생각이 없으면 애초에 성사가 안 된다.

그때의 나는 정가장이 설마 이 정도로 어려운 상황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원래는 정가장과 친분을 쌓은 후, 이곳을 드나들며 인근의 대지들을 알아 볼 생각이었다.

이쪽 지역에 밝은 사람들을 통해, 어떤 땅에 어떤 유래가 있고, 실질적인 시세는 어느 정도인지를 면밀하게 조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조사 후 실제로 대지를 매입하게 되면 관리도 필요하다.

그곳에 건물이라도 지으면 더더욱 누군가의 관리가 필요하다.

나는 잠룡관도이기에 항상 그곳을 관리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정가장과 가까워진 후, 필요하다면 일정 수준의 지원을 해주며 그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 관리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데 정우립이 방금, 내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한 것이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나, 결과적으로는 이 또한 나의 갑작스러운 개입이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우직한 정우립은 선조들의 땅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써왔다.

버티고 버티던 중 나를 만나서 가전 무예의 발전 가능성을 직감했고, 미래를 위해 이 시점에 과감히 대지 처분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정우립의 입장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나, 내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이곳이 그 정도로 어려운 상황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빚을 안고 사는 이들은 많으니, 엊그제의 그 사람들도 흔한 빚쟁이들이겠거니 했습니다. 압류 등의 용어야 그런 자들의 입장에서는 경고 내지는 약간의 협방 용도로 흔히 내뱉는 말이기도 하고요.”

내 말에 정우립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대꾸했다.

“비밀까지는 아니나 송 공자 앞에서 이런 얘기를 털어놓으니 창피하긴 하구려. 어쨌거나 이야기를 다 해드렸으니 말인데, 이런 게 왜 궁금하셨소?”

이에 나는 정우립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말했다.

“하긴, 이제는 잠시나마 제 얘기도 해드려야 할 차례군요. 사실 제게는 꿈이 있는데, 그 꿈이 좀 큰 편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송 공자 같이 뛰어난 분이 꿈이 작다고 하셨으면 이 정우립, 속으로는 분명히 실망했을 것이오.”

“제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고, 귀한 친우들도 많습니다. 그들과 계속 교류하며 더 큰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오오!”

“의와 협을 위한다는 둥의 거창한 마음은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듯 제게도 저 자신과 제 주변인들의 행복이 우선입니다. 단, 평소에는 평온하게 살더라도 강호에 혹시 모를 위기가 닥치면 친우들과 함께 나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고지식한 어르신들일수록 명분은 중요하니, 적당히 듣기 좋은 말 정도는 섞도록 하자.

어차피 나는 사파와도 싸워야 하고 언젠가는 천마신교와도 싸워야 하니까.

“그러려면 친우들과 계속 교류하며 지낼만한 저만의 거처도 필요합니다. 마침 포양호는 장강을 통해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좋으니, 포양호변에 그 장소를 알아보는 중이었습니다.”

정우립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제 교관님께서 말씀하시길 포양호변에는 이런저런 이권들이 개입되어 있다더군요. 그러다가 마침 엊그제 이곳 본채에서의 작은 소란을 듣게 된 겁니다. 혹여 그 일이 교관님이 말씀하신 이권 등에 연관된 건 아닌가 하여, 정보 조사 차원에서 여쭸던 겁니다. 그런 정보들을 좀 알아둬야, 저 또한 고려할 건 고려하며 포양호변의 부지를 물색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정우립을 향해 바로 말을 이었다.

“제가 마침 정 장주님의 가전 무예를 수정 보완하는 일로 도움을 드리고 있으니, 저는 정 장주님을 통해 이쪽의 정보를 얻고, 부지를 알아보는 쪽으로도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 여쭸던 건데, 어쩌다보니 이곳 정가장의 형편까지 낱낱이 듣게 되었군요.”

“아하.”

정우립이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진실을 섞어 포장한 덕분이다.

이후에 정우립은 한동안 말없이 고민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정우립이 말했다.

“우리 장원 부지의 절반을 처분한다 해도, 나머지 절반의 공간에도 약간의 여유 공간 정도는 나올 것이오. 송 공자께서 이 근처에 거처를 원하신다니 내가 약간의 공간을 내어드리겠소. 우리의 은인이신만큼, 원하시는 기간 동안 비용 없이 사용하시오. 그 정도가 현재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일 것 같소. 그 공간에서만큼은 어떤 건물을 짓든 어떻게 꾸미든 관여치 않겠소.”

비용을 받지 않고 일정 공간을 장기간 사용하게 해준다는 게, 결코 아무에게나 선뜻 제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가장의 힘겨운 사정까지 생각하면 더욱 어려운 제안이다.

말로만 은인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나를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도 나를 이곳에 들이면 얻는 이득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걸 우선시하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저 마음까지 알고 나니, 그도 좋고 나도 좋을 방법이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내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정우립이 말을 이었다.

“미안하오, 송 공자. 우리의 사정만 좋았더라면 비용 없이 더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드렸을 것이오. 한데 절반을 팔고 나면 우리로서도 공간적 여유가 조금 빠듯해서······.”

내가 작은 거처를 살 정도의 비용은 있어도, 이 장원의 절반을 살 정도의 비용은 없을 거라는 전제 하에 하는 말이다.

이 몸이 아직 어리니 당연히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정우립에게 말했다.

“그게 얼마나 큰 배려이신지 잘 압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미안하지요. 마음 같아서는 이보다 더한 걸 해드리고 싶은데······.”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쩌다가 정가장의 사정을 듣고 나니 제 생각도 좀 바뀌었거든요.”

“응? 생각이 바뀌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장원 대지의 절반을 매매하는 일에 대한 우선 협상, 지금 당장 저와 먼저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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