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77
제갈수광이 선실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린 후, 나와 단목강도 선실을 벗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갑판 위의 한곳에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횃불로 인해 그들이 모여 있는 쪽이 어렵지 않게 확인이 되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의 가운데에 인영 하나가 눕혀져 있었다.
한데 눕혀져 있는 인영에게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인 것이다.
제갈수광이 그들 사이로 파고들며 물었다.
“웬 시쳅니까?”
“밤이라서 저속으로 운항하고 있는데 뭔가가 둥둥 떠내려 오는 겁니다. 그래서 살펴봤더니 사람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일단 건진 건데 이렇듯······.”
제갈수광이 자세를 낮추더니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도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다가가서 시체의 모습을 살폈다.
얼핏 보기에도 사인은 목을 꿰뚫은 검상이었다.
“무인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복장은······.”
제갈수광이 고개를 갸웃하자 선원 중 한 명이 말했다.
“가슴에 새겨진 ‘진강’이라는 글자는 아마도 강소의 진강상단을 뜻하는 말일 겁니다. 진강상단의 주된 사업 분야 중 하나가 장강을 오가는 여객선 사업입니다. 깔끔한 제복인 것으로 보아 고급 여객선의 선원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갈수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죽은 지 오래 되지 않았소.”
내 생각도 같다.
죽은 지 오래 되지 않은 시체가 상류에서 떠내려 왔다는 건, 상류에서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제갈수광이 선원들에게 즉시 지시했다.
“일단 운항을 멈추시오.”
책임자로서의 옳은 판단이다.
상류 쪽에서 위험 상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관도들을 데리고 그런 곳으로 무작정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예!”
선원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잠시 후, 한 쪽에서 선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에 사람······! 아니, 시체로 보입니다!”
“건져 올리시오.”
선원들이 그쪽의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을 즈음, 다른 쪽에서도 선원의 외침이 들렸다.
“이쪽에도 사람입니다! 시체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검대의 무인들도 그쪽으로 가서 선원들을 도왔다.
잠시 후에 두 구의 시체가 원래 있던 하나의 시체 옆에 나란히 눕혀졌다.
하나의 시체는 처음 발견했던 시체와 복장이 똑같았다. 진강상단 고급 여객선의 선원인 것이다.
다른 하나의 시체는 청의 무복을 입은 시체였다.
제갈수광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아 있던 사람이 그 시체의 옷깃 이곳저곳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보십시오, 여기에 ‘북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대답한 이는 국충곤이라는 사람으로,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고 있는 동검대의 무인들 중 선임이다.
제갈수광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렇다면······.”
“예, 북검대의 무인입니다.”
동부지맹의 정예 무력 조직이 동검대이니, 북검대는 북부지맹의 정예 무력 조직이다.
제갈수광의 양미간에 골이 깊게 패었다.
나 또한 놀라운 한 편으로 의문스러웠다.
어찌하여 북부지맹 소속의 정예 무인이 시체가 되어, 이 밤중에 장강을 동동 떠내려 왔단 말인가.
국충곤이 제갈수광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시체들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또다시 선원들의 외침이 들려왔고, 우리는 시체 두 구를 더 수습했다.
네 번째 시체는 앞서와 같은 선원의 시체였고, 다섯 번째 시체는 또다시 북검대원의 시체였다.
갑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미 교관들이고 무인들이고 관도들이고 모두 집결해 있는 상태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느끼고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선원들까지 서른 명 남짓의 인원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판 위에서는 깊은 침묵이 흐르는 중이다.
고민하고 있는 제갈수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침묵이다.
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 등이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다.
제갈수광은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다.
잘 봐 두자.
한심한 중년이 멋있는 중년으로 변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니까.
어쨌거나 제갈수광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북검대는 북부지맹 소속이니 무림맹의 동도다.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면 같은 무림맹 소속으로서 당연히 도우러 가는 게 옳다.
하지만 제갈수광은 관도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자이기도 하다.
북검대를 도우러 가면 관도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그걸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제갈수광이 고개를 내렸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눈동자만 더 돌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내 주변에 몇 사람이 있긴 하지만, 분명히 그의 시선은 지금 내게로 향해 있다. 느낄 수 있다.
이보쇼. 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내가 부담스럽잖소.
그리고 당신이 뭘 고민하고 뭘 걱정하는지도 잘 알겠는데, 어차피 답은 이미 나와 있잖소.
당신은 백도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도 백도니까.
결정을 내린 모양인지, 제갈수광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인다.
곧 제갈수광이 한쪽에 모여 있는 선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쾌속 전진합니다. 살아 있을지도 모를 아군을 돕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니 쾌속 전진 시에 시체는 수습하지 않습니다.”
역시 저 결정을 내릴 줄 알았다.
그리고 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게 제갈수광의 입장이기도 하다.
“예!”
선원들이 한 목소리로 대꾸한 후 빠르게 이리저리 흩어졌다.
제갈수광이 이번에는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어떠한 비상 상황이 벌어져도 여러분의 최우선 임무는 관도 보호임을 잊지 마십시오.”
“예!”
제갈수광이 이번에는 동검대의 무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수많은 실전 경험을 겪은 정예들입니다. 여러분의 경험과 상황 판단을 믿겠습니다. 단, 작전을 펼칠 시에 보고만큼은 제게 꾸준히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교관님.”
선임인 국충곤이 각오가 담긴 어조로 대답했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교관님들과 동검대 여러분은 서둘러 전투 준비에 착수해 주십시오.”
“예!”
어른들이 동시에 대꾸한 후 이리저리 흩어졌다.
관도들만 남은 상태에서 제갈수광이 말했다.
“너희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결정이라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면 너희들이 위험해질 일도 없겠지. 나는 너희들이 다치는 게 너무 두렵다. 그렇기에 더더욱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관도들 몇 명의 목울대를 타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게 있었다. 너희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위험에 처한 동도들을 외면해도 된다고 인식하게 되는 일이다. 너희들이 그걸 당연시하는 비겁자들이 되는 일이다. 장차 백도 무림에서 큰 역할을 해야 할 너희들이.”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무인으로서의 너희들 개개인, 가족, 세가와 문파. 그 모두가 사마외도로부터 보다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림맹이라는 커다란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본맹뿐만 아니라 동서남북의 각 지맹이 있기 때문이며, 무림맹의 수많은 동도들이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체로 떠내려 온 저 북검대의 무인들 또한 남이 아닌, 우리의 동도다.”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우리 잠룡관을 대표하는 최고의 관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그 실력을 갖고도 동도를 외면하는 법부터 배우기를 원치 않는다.”
제갈수광이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말했다.
“모두가 동부지맹 잠룡관을 꼴찌라며 놀린다. 근래까지의 통합 잠룡대전에서의 성적을 보면 그렇게 여겨질 만도 하지. 그렇다고 치자. 실력은 우리가 꼴찌라고 치자. 꼴찌면 뭐 어떤가. 그러나 이쯤에서 너희들에게 묻고 싶다. 너희들, 용기와 기백마저도 꼴찌이고 싶나?”
“아닙니다······.”
“아, 아닙니다.”
관도들이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대답 소리 들어보니 딱 꼴찌들의 모습이군. 그런가?”
“아닙니다!”
관도들이 이번에는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꾸했다.
제갈수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억해라. 용기가 있는 자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기백이 있는 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관도들의 눈동자에 각오가 담기고 있다.
제갈수광이 주의사항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너희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나를 비롯한 교관들과 정예 무인들이 같이 있다. 그러니 전투가 벌어지면 처음부터 굳이 뭔가를 하려하지 말고 차분히 전황을 살피며 적응부터 해야 한다. 너희들은 모두 뛰어나니, 그러다 보면 어찌해야 할지도 알아서 감이 올 것이다. 알겠나?”
“예!”
“실전에서는 결코 호기롭게 나서서는 안 된다. 초보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초보가 섣불리 나서면 동선이 겹쳐서 그 주변 전체가 위험해진다. 즉, 여럿이 함께 싸우는 상황에서는 동료의 위치를 인식하고, 엄호해주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도움을 줬든 도움을 받았든, 곧바로 다음 대응을 준비한다. 알겠나?”
“예!”
제갈수광이 말했다.
“가서 증명해 보이자. 용기와 기백만큼은 우리가 모든 잠룡관 중에서 최고라는 걸. 그리고 무림맹에 가서 당당하게 말하는 거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동도들을 구했노라고. 동부지맹 잠룡관의 기상을 감히 당신들 수준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관도들의 눈동자에 담긴 각오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고 나서 통합 잠룡대전에서도 증명해 보이자. 우리는 기상만 높은 게 아니라, 그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다는 걸. 다들 할 수 있나?”
“예!”
“나도 너희들을 믿는다.”
곧 우리도 전투 준비를 위해 흩어졌다.
배가 쾌속하게 나아갔다.
* * *
어둠 속에서 불빛이 보이고 있다.
배가 불타고 있는 불빛이다.
그쪽에서 고함, 비명, 각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등이 가득 들려오고 있다.
우리 배도 그쪽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전장의 상황이 확인되었는데, 불타고 있는 배는 제법 규모가 큰 여객선이었다.
선원들이 말했던 진강상단의 그 여객선인 듯하다.
아직 완전히 불탄 건 아니었고, 돛을 비롯하여 갑판 위의 시설 이곳저곳에 불이 붙은 모양새였다.
불이 붙지 않은 부분의 갑판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다.
여객선의 주변으로 여러 척의 배가 보였는데, 그 배들은 불타지 않고 있다. 수로채의 배들인 것 같다.
제갈수광은 우리 배를 불타고 있는 여객선의 근처로 이동하게 했다. 생존자들을 돕기 위해서다.
참고로 제갈수광은 활을 들고 있다.
배의 창고에서 봤던 활들 중 하나다.
그의 옆에는 화살 더미들이 잔뜩 쌓여 있다.
명궁 솜씨 한 번 보겠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제갈수광이 외쳤다.
“우리는 무림맹의 무인들이다! 이 흉악한 짓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공력이 담긴 음성이 일대에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 배가 다가갈 때부터 전장에서도 이미 우리를 인식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리가 근접하며 무림맹이라는 걸 밝히기까지 하자 전장의 분위기도 살짝 소강상태가 되었다. 물론 먼 쪽에서는 여전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중이다.
여객선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무림맹이라니······!”
“우리도 북부지맹 사람들이오! 도와주시오!”
시체들을 통해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북부지맹의 무인들인 모양이었다.
제갈수광이 우리 배를 여객선의 근처에 대도록 지시했다.
그 즈음, 나는 눈매를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불쾌하게 하는 특유의 기운들.
사파인들의 기운이다.
그냥 느껴지기에도 수가 많다.
안력을 돋워보니, 아니나 다를까 적도들은 태화지부에서처럼 다들 복면을 착용한 상태였다.
산채와도 연계했던 놈들이니 충분히 수로채와도 연계할 수 있다.
그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추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즉시 회회심공을 통해 기척들을 더 자세히 감지했다.
역시나 사파인들 중에는 그 십대들의 특유의 기운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쌍한 아이들아, 또 너희들이었구나······.
우리의 배가 여객선의 갑판에 더 가까워진 순간, 나는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라?’
북검대의 무인들을 도우며 싸우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실력이 제법이다. 딱 봐도 일류의 중간은 된다.
그들은 복장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제법 여러 명이 우리의 또래들이었다.
‘설마······.’
저 어린 고수들은 북부지맹의 정예인 북검대와 동행중이다.
가뜩이나 우리처럼 무창 방향으로 가던 이들이다.
그렇다면 북부지맹의 잠룡관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