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84화 (84/416)

내 안에 마교있다 84

“삼청산 산장에서의 사건도, 태화지부의 사건도, 모두 면밀하게 알아봤다. 중간에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린아에게 물어보기도 했지. 두 사건 공히, 네가 없었으면 다들 무사할 수 없었을 상황들이었더구나.”

“제갈 교관이 든든하게 버텨준 덕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손녀 분을 포함한 여러 동료들의 역할도 컸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선우훤이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린아를 잘 보호해준 점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구나. 선우세가의 가주로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 선우세가는 결코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손녀분의 실력이 기본적으로 워낙 뛰어나서 제가 보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조심하라는 조언 한두 마디 해줬더니 알아서 잘 하던데요.”

적당히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한 말이다. 손녀인 유은무를 칭찬하여 선우훤의 기분도 더 띄워줄 겸해서.

선우훤이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린아한테 들었겠지만, 내가 그 아이를 계반으로 입관시킨 건 너 때문이었다. 이왕 잠룡관에 들어갈 거면 그 아이가 보다 의미 있게, 보다 즐겁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왠지 네 주변에서 지내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들어보니 역시나 내 기대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손녀 분이 워낙 착하고 정이 많아서 저 또한 여러 도움들을 받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미소를 띤 채 선우훤을 향해 대꾸해준 후,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이쯤 되니 당주님에 대한 우려가 좀 생깁니다.”

“우려? 뭔데 그러느냐?”

“저를 높게 평가해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나, 실상 저는 당주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못된 놈입니다. 이런 저를 당주님께서 너무 신뢰하시는 듯하니 그게 우려된다는 말씀입니다.”

“푸허허허!”

선우훤이 너털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애초에 네가 이타적이고 착한 아이라서 흥미가 생겼던 게 아니다. 그런 아이들은 이 백도 안에 차고도 넘친다. 네가 그런 아이였다면 굳이 린아에게도 너와 어울려보라고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훤이 말을 이었다.

“내가 제일서고에서 봤던 너는 약삭빠르고, 치밀하고, 맹랑하고, 당당했다. 그런 면모들을 두루 갖춘 아이는 백도 무림에서 찾기가 매우 어렵지.”

선우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네 말마따나 네가 못된 아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너는 적어도, 못된 아이일 수는 있어도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정말로 나쁜 아이들은 애초에 너처럼 책임감이 강할 수가 없느니라.”

강호에서 닳고 닳은 노인들을 상대하는 일은 이래서 쉽지가 않다. 나는 천마신교의 장로들을 상대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린아와는 그저 지금처럼만 잘 지내다오. 그러면 된다.”

이후에 선우훤은 한동안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의 미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변했다.

“너의 가문은 전통적인 무가가 아니라고 들었다. 네 가문을 무시하려는 말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그런 배경에서 너와 같은 아이가 나오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모종의 기연이 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지.”

“경험에 의한 추론이십니까?”

선우훤도 어렸을 적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의 힘으로 고수가 된 사람이다. 널리 퍼진 이야기이기도 하니 그렇게 되물은 것이다.

“헐헐. 고얀 녀석 같으니. 웬만해서는 그냥 답해주는 법이 없구나.”

선우훤의 저런 면이 좋다.

선우훤은 백도 무림의 구성이며, 그의 입장에서 나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내 이런 태도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버르장머리 없다는 둥의 훈계를 할 법도 하다. 보통은 그렇다.

한데 선우훤은 그런 게 없다.

물론 그가 내게 호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동등한 위치의 대화상대로 대해주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저런 면을 보면 그의 손녀가 왜 그렇게 잘 큰 건지도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래. 내 경우에는 크고 작은 여러 기연들이 있었느니라.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사람들은 모종의 기연들이 없이 이렇게 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

내가 엷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하나는 알겠더구나. 다들 기연을 운으로만 인식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내 경우에도 물론 운으로 얻은 기연도 있었으나, 노력으로 인해 닿은 기연이 더 많았다. 기연이라는 게 대단한 비급, 영약, 명검 등을 얻는 일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거든.”

내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내 기연은 굳이 환생을 포함한 그 이후의 일만을 따질 게 아니다.

전생의 나 또한 큰 기연을 얻은 몸이었다.

일반마인에서 시작하여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부님의 제자가 된 일 자체가 기연이었다.

그건 단순히 운으로만 얻은 기연이 아니라, 그만한 내 노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던 기연이다.

“내가 기연 얘기를 꺼냈던 건, 네가 무슨 기연을 얻었는지 캐묻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런 걸 따져 묻지 않는 게 강호의 불문율이기도 하지. 그저 네가 대견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선우훤이 바로 말을 이었다.

“네가 큰 기연을 얻었다 해도, 네 나이에 그 정도의 실전 실력을 갖추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전 실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즉, 실전에서 그 정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네가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역시나 이 노인네, 핵심을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실전 실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송유겸의 몸으로 펼치고 있는 이 실전 실력은, 전생에 내가 서무욱의 몸으로 수도 없이 흘린 피와 땀의 산물인 것이다.

“실은 너에 관한 일로 제갈 교관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이곳에 온 길이다. 대화중에도 제갈 교관은 최대한 너를 드러내지 않게끔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선생이더구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네가 다치는 것에 대한 걱정도 많이 하더구나. 나 또한 보고서를 읽고 많이 걱정했었다. 물론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항상 조심했으면 좋겠다.”

“염려 감사합니다. 더 조심하겠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게 무림맹의 일이라, 이런 말을 하면서도 네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어떻게 무림맹이 이 넓은 중원 전체를 다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당장 손녀 분께서 위험한 상황에 말려들 일도 없었겠지요.”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우훤을 향해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쭙는 건데, 흉수들에 대한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사파인들에 의해 지난번에는 산채가 움직였고 이번에는 수로채가 움직였습니다. 배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기밀 유지를 위해 모든 작전과 조사가 비밀리에 진행되는 중이다. 그러나 놈들이 점조직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어 배후를 캐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조만간 그 일에 대한 경과 발표가 있을 것이다.”

“아······.”

선우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구나. 이렇듯 무림맹에서 너를 보게 되어 반가웠다. 네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앞으로도 시간을 내어 종종 찾아올까 한다.”

“바쁘실 텐데 그렇게까지······.”

“너와 대화를 나누면 내가 즐거워서 그런다.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내가 빙그레 웃어 보이자 선우훤이 말했다.

“그럼 쉬거라.”

선우훤이 그 말을 남기더니 내 방을 나섰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제갈수광이 전달 사항이 있다며 관도들을 집합시켰다.

“통합 잠룡대전의 일정이 약간 미뤄졌다. 다들 알다시피 출전해야 할 북부지맹 관도들의 부상이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이 미뤄질지는 아직 확실히 결정되지 않은 모양이니, 일단은 그리 알고 있도록.”

우리 동부지맹의 관도들은 부상을 당했어도 경상 수준이나, 북부지맹 관도들의 부상은 다르다.

무림맹의 의료진이 세심하게 돌보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당장 모용리의 부상만 해도 며칠 내에 완쾌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데 그 정도의 부상을 입은 북부지맹의 관도들이 두어 명 더 있다.

때문에 통합 잠룡대전의 일정 자체를 약간이나마 뒤로 미룬다는 결정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통합 잠룡대전을 관전하기 위해 이미 수많은 백도인들이 무창에 와 있는 상태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통합 잠룡대전이 미뤄진 탓에 숙박료 등의 체류 비용이 갑자긴 늘어나게 된 셈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무림맹 또한 출전 관도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이번 통합 잠룡대전에는 단체전도 추가되었다.”

관도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개인전으로만 진행되던 통합 잠룡대전에 갑자기 단체전이 생겼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오래 기다리게 된 만큼, 더 많은 비무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상하겠다는 뜻이다. 본맹의 제안에 네 곳의 지맹이 모두 동의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관도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다.

개인전만 있을 때는 삼십이강에서 탈락한 사람의 경우 그걸로 대회가 끝이다. 삼십이강에서 십육강에 진출하는 인원들은 열여섯 명뿐이니, 출전자들 중에서 반은 비무 한 판 치르고 대회가 끝나는 것이다.

상위 실력자의 경우에도 대진운이 좋지 않아서 최상위 실력자를 만나면 삼십이강에서 바로 탈락할 수가 있다.

한데 단체전이 생기면 실력을 보일 기회가 한 번이라도 더 생긴다. 다들 본인의 실력을 보여주고자 통합 잠룡대전에 참가한 만큼,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체전은 당연히 각 지맹 간의 대항전이다. 준결승에서 이기면 결승, 결승에서 이기면 우승이다.”

“단체전은 어떤 방식으로 치러집니까?”

동부지맹의 예선에서 사 등을 차지한 목태월의 질문이었다.

“어제 갑자기 결정된 사안이라 방식에 관해서는 아직 논의 중이라고 한다. 길어도 사흘 안으로 확정한다는 모양이다. 그러니 모두 단체전까지 염두에 두고 더 열심히 준비하도록.”

“예!”

관도들의 목소리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단체전이 생기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나뿐인 것 같다.

* * *

이틀이 더 지났다.

동부지맹의 아이들은 저마다 대회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강하령에게서 들어보니 수련하는 열기가 작년보다 훨씬 뜨겁다고 한다.

단체전이라는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긴 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방식대로 무림맹 본맹에서의 생활을 즐기는 중이다.

좋은 점은 내가 제갈수광의 수행 부관이라는 사실이다.

덕분에 나는 제갈수광을 졸졸 따라다니며 본맹의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백도 무림의 주요 인사들도 여럿 봤다. 천마신교에서 내가 접했던 정보들과 비교하며 그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오후에 제갈수광과 함께 중앙 대로를 걸을 때였다.

편안하게 걸음을 옮기던 제갈수광이 모종의 위험이라도 감지한 것처럼 갑자기 주춤했다.

의아해서 제갈수광을 바라보니, 그가 전방의 한 곳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히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파악하려는데 제갈수광이 곧바로 신형을 돌리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교관님······?”

내가 불렀음에도 제갈수광은 대꾸조차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갈 뿐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피하는 낌새다.

그 직후였다.

“선배! 제갈 선배!”

우리가 향하고 있던 전방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그것도 여인의 목소리다.

다시금 전방을 바라보니, 여인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갈 선배애애애!”

분명해졌다.

저 여인이 부르고 있는 사람은 제갈수광인 거다.

본인을 부르고 있는데도 제갈수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멀어져갈 뿐이었다.

즉, 도망치고 있는 거다.

여인이 달려오고 있다는 걸 파악했는지, 제갈수광도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윽-

뭔가가 바람을 일으키며 내 옆을 스쳐갔다.

나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이 신법을 펼쳐서 내 옆을 스쳐지나간 건데,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속도만큼은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한데 그런 내가 느끼기에도 여인이 신법을 펼치는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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