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86
[그렇소. 보아하니 다른 지맹의 잠룡관도인 것 같은데, 우리 교관님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시는 거요?]
제갈건의 정체를 파악했지만 모른 척 그렇게 물었다.
[아, 그게 좀······, 교관님과 원래 아는 사이인데 마침 이곳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확인 차······.]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라 네 당숙이잖아?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고 이를 중시하는 게 무림세가들이다. 그렇기에 당숙과 종질從姪(사촌형제의 아들)의 오촌 사이도 상당히 가까운 관계다.
한데 의아한 건 제갈건의 저 태도다.
당숙인 만큼 제갈수광에 대해 편하게 수소문해도 될 텐데, 왜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운 태도인 걸까.
뭔가가 있구나 싶다.
제갈건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혹시 지금 안에 계시오? 아, 공자도 출타했다가 들어오는 길이니 잘 모르시려나······?]
방금 전까지 제갈수광과 같이 있다가 왔으니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안다.
그러나 제갈수광의 사생활이라는 것도 있으니 곧이곧대로 대꾸해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제갈건의 분위기를 보니 더더욱 그렇다.
[교관님께서는 개인 용무로 출타하셨다고 알고 있소. 교관님이 돌아오시면 공자가 찾아왔었다고 말씀드리겠소. 누구시라고 말씀드리면 되겠소?]
[아, 저, 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갈건은 약간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소. 제갈 교관님에게는 내가 왔었다는 얘기를 하지 말아주시오. 그냥 내가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소.]
말을 마친 제갈건이 나를 향해 살짝 목례하더니 돌아서서 사라졌다.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숙을 보러 온 것뿐인데, 그걸 갖고 뭘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한단 말인가.
뭐, 어쨌거나 제갈세가의 가정사일 테니 신경 끄자.
* * *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와서는 천섬무와 회회심공의 묘리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있던 중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제갈수광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서며 한쪽 팔로 내 목을 조였다.
“너 이 자식······!”
아까의 일에 대한 작은 보복 같은 거다.
“켁! 켁! 숨 막힙니다!”
“웃기고 있네. 네가 고작 이런 걸로 숨이 막혀? 엄살 부리기는.”
곧 제갈수광이 내 목을 졸랐던 팔을 풀더니 내 침상에 가서 대충 몸을 눕혔다.
마치 본인 침상에 눕듯 자연스러운 태도다.
나는 문을 닫고 탁자 옆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으휴, 술 냄새.”
그냥 앉지 않고 잔소리도 한 마디 해줬다.
우리 사이에서는 잠시 침묵이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에 제갈수광이 말했다.
“윤 교관과의 일로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더니 아무 말도 안 하는군.”
“남녀 사이의 문제잖습니까. 게다가 제가 교관님과 윤 교관님의 관계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요.”
제갈수광이 누운 상태에서 잠시 천장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윤 교관과는 서부지맹의 관도였던 시절에 만난 사이다. 참고로 윤 교관과 나는 나이차는 다섯 살 차이인데 잠룡관에서의 연차는 삼 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교관님이 되게 늦게 입관하셨던 모양이네요?”
“아니, 나도 너처럼 열일곱 살에 입관했다.”
“어? 그렇게 되면······.”
“그래. 윤 교관이 열다섯 살에 잠룡관에 입관했던 거다. 나이를 속이고 들어온 건데, 그렇게 어렸을 때 입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윤 교관의 무공은 매우 뛰어났다. 그렇다보니 딱히 나이가 어리다는 의심을 받을 일도 없었지.”
윤단영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최고의 여제자로 통한다.
괜히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어려서부터 탁월했던 거지.
“내가 오 년차 때 윤 교관은 이 년차였다. 당시 통합 잠룡대전에 같이 참가하면서 가까워졌고, 이후부터는 그 이상의 관계가 된 거다. 그녀도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녀를 좋아했지.”
제갈수광은 오 년차에 통합 잠룡대전에서 준우승이었고 육 년차에 우승을 차지했었다.
그 실력이었으면 오륙 년차 때의 제갈수광은 서부지맹 잠룡관에서 한창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최정상 실력의 인기 많은 남자 선배와, 미모도 뛰어나고 실력도 뛰어난 여자 후배가 서로를 좋아하게 된 셈이다.
흔한 일이다.
제갈수광도 청춘이었다는 거지.
“한데 화산파에서 그걸 알고 우리의 관계를 반대했다. 윤 교관이 사실 화산파에서 크게 기대 받는 여제자였거든.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빼어난 여제자였던 거다. 그런 귀한 제자가 제갈세가의 직계도 아니고, 방계와 연결되기를 원치 않았던 거지. 내가 잠룡관을 졸업할 시기쯤의 일이었고.”
“아······.”
“한참 후에야 하게 된 생각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던 일이다.”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화산파도 우리 세가도, 백도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매우 큰 세력들이다. 정치적인 관계도 있다 보니, 우리 세가의 입장에서도 그런 일로 화산파와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결국 우리 세가 또한 나와 윤 교관이 맺어지는 걸 반대할 수밖에 없게 된 거다. 가문의 어른들 중에는 나를 응원해줬던 분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대하셨지. 그게 대세였고.”
이 뛰어난 사람도 방계라는 이유로 힘든 일들을 겪어왔구나 싶다.
제갈수광이 회한 깃든 표정으로 말했다.
“당시에는 나도 어렸다. 그 상황을 정면으로 헤쳐 나갈 자신이 없었어. 당시의 상황들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했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윤 교관에게도 헤어지자고 말했지. 윤 교관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잊으라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내게 있어 우리 세가는 내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자부심이었지. 내가 열심히 했던 이유 또한, 나로 인해 우리 세가의 위상이 더 높아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데 그 일을 겪고 나니, 지금껏 나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가치관적 기반이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
제갈수광이 코로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세가에서 뛰쳐나온 것도 그때의 일이었지. 이후에는 만사에 불합리함을 느낀 채로 방황했다. 그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고, 그 후에 동부지맹 쪽으로 와서 교관이 됐던 거다.”
제갈수광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방황하던 중에도 간간이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후에 혼기가 어느 정도 찼는데도 전혀 혼인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 화산파에서 아무리 혼사를 주선해도 결코 주선 자리에조차 나가는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 내가 잠룡관의 교관이 된 후에도 들었는데, 그후에도 계속 그랬던 모양이고.”
윤단영이 왜 그랬겠는가.
제갈수광 때문일 수밖에 없다.
그 오랜 세월동안 제갈수광을 기다렸다니 윤단영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본인이 여인으로서 가장 예쁠 수 있는 시기에 혼인하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제갈수광을 기다린 거니까.
제갈수광에게 물었다.
“결국 교관님도 그렇고 윤 교관님도 그렇고 두 분 다 아직도 혼자인 거군요?”
제갈수광이 말하는 걸 보니 눈치가 그랬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에 다시 물었다.
“하면 화산파와 제갈세가에서 지금도 반대합니까?”
이쯤 되면 화산파든 제갈세가든 반대하는 걸 포기했을 법도 하다.
제갈수광이나 윤단영 모두 혼기를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둘 다 반대 따위가 의미가 없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양쪽의 반대도 없으니 이제 두 분이 행복해지면 되는 거잖습니까. 그런데도 왜 아까 윤 교관님을 발견하자마자 도망치셨던 겁니까? 아까 보니 윤 교관님은 여전히 교관님을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설마 교관님에게 다른 여인이 생겼다거나······.”
“아니야, 인마.”
한숨을 내쉰 제갈수광이 잠시 후에 말했다.
“이 년 전부턴가 우리 둘의 혼사 얘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했었는데, 내가 그 때마다 자리를 피했었거든.”
“왜 피하신 건데요?”
“우리의 혼사를 좀 더 미루고 싶어서.”
“물론 무인들 중에는 혼인을 아주 늦게 하는 경우도 많죠. 그래도 두 분의 경우에는 충분히 혼기가 찬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더 미루고 싶다니, 그쯤이면 그냥 교관님 쪽에서 하기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이 자식이!”
“아니면 아니지 뭘 그리 역정을 내십니까.”
“그냥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이 좀 있어, 인마. 게다가 내 개인적으로도 무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 당분간은 이쪽에 더 집중하고 싶은 것도 있고.”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무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이유에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사실, 전생의 나도 서른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하지 않았었다.
당시의 나는 오로지 무공만을 생각하고 무공만을 수련하며 살았다. 무공의 성취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게 내 성향인 건지, 솔직히 지금도 연예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기도 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무인들 중에는 그런 이유로 혼인을 미루는 사람들도 많고,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당장 사부님만 해도 혼인을 하지 않고 무공에만 몰두하여 천하제일인이 된 경우다. 그 유명한 남궁찬 또한 아직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다.
무인들은 이렇듯 혼인에 대한 관념, 또는 혼기에 대한 기준 등이 일반인들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하겠다.
그 부분에 관해서 더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니, 나는 은근슬쩍 다른 걸 물었다.
“방황을 시작했을 때 세가에서 나오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세가와 잘 지내십니까? 들어보니 방황을 끝낸 후에는 곧바로 동부지맹 잠룡관의 교관이 되셨다고 하셔서······.”
아까 제갈건을 봤기에 물어본 것이다.
당숙을 찾아온 건데 왜 그렇게 조심스러운 태도였던 건지가 궁금해서.
“방황하던 시기에 가졌던 세가에 대한 불만 같은 건 이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가와 잘 지내는 건 아니지. 이후에 내가 세가에 찾아간 일이 거의 없거든. 물론 세가에서는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고 말하고 있고.”
제갈수광은 뛰어난 무인이다.
저 실력을 제갈세가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사실 제갈세가의 후손들은 두뇌로는 주목받지만 무공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해왔다. 그런 만큼 제갈세가에서도 제갈수광처럼 무공에도 뛰어난 후손이 세가에 있어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다.
무림세가라는 집단에 있어, 무공이 뛰어난 혈족의 존재는 가세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 쪽에서 내키지가 않아. 세가에서 나와서 산 세월이 하도 오래 돼서 그런지, 딱히 세가라는 울타리가 그립지가 않다고 할까? 결국 내가 데면데면하게 대하고 있는 거지. 물론 세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고.”
당연한 얘기다.
저 실력에 제갈세가라는 울타리고 나발이고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제갈수광이 방황하는 동안 제갈세가에서 딱히 신경을 써줬던 것 같지도 않으니까.
어쨌거나 분위기를 대충은 알 것 같다.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제갈건이 아까 왜 그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었는지도.
제갈수광이 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원래 주절주절 이런 얘기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 한데 송유겸 네가 마침 윤 교관과 얽혔고,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까지 다 봤지. 네가 보기에는 여러 모로 의문스러운 부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말해준 거야. 이왕 알게 되었으니 떠들 거면 제대로 알고 떠들라는 의미로.”
“예. 여러 모로 궁금함은 많이 풀렸는데, 딱히 어디 가서 떠들 마음은 없습니다. 저를 뭐로 보시고.”
“나도 네가 남들한테 이런 거 떠들고 다니는 녀석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 차후에 나한테 떠들 때 말이다.”
아, 그거였소?
물론 내가 놀릴 생각이긴 했소.
하여간 눈치도 빠르시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제갈수광이 내 방의 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두 분의 사랑, 제자로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요.”
“아니, 넌 신경 꺼.”
제갈수광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대꾸했다.
“교관님이 아까 윤 교관님을 ‘영 매’라고 부르실 때, 달달함이 가득 느껴지더라고요.”
“저 자식을 그냥!”
이에 나는 양손을 펼쳐서 항복 의사를 보인 후에 말했다.
“살펴 가십시오.”
제갈수광이 방을 나섰다.
* * *
본맹에서의 평온한 나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단체전의 대결 방식이 결정되어 관도들은 더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제갈수광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무림맹의 분위기도 살피고, 내가 모을 수 있는 정보들도 최대한 모았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며칠이 훌쩍 흘러, 통합 잠룡대전의 개막이 내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