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87
개막전 전날, 신시정(오후4시) 무렵.
나는 호출을 받고는 동련각에서 우리가 쓰는 건물의 교관 회의실로 향했다.
“송유겸입니다.”
“들어와.”
막내 교관인 양소열의 목소리였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다섯 명의 인물들이 보였다.
인솔 교관 네 명 모두와 관도 한 명이었는데, 관도는 나와 함께 예비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광동 정호문의 엄상평이었다.
이 기묘한 조합은 뭘까.
얼핏 보니 통합 잠룡대전에 출전해야 하는 관도들만 쏙 빼고 다 모였다.
통합 잠룡대전 기간 동안 차질 없이 참가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대한 회의를 하려는 건가 싶다.
“너희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알려줄 것도 있고 그 일에 관련해서 조율해야 할 일도 있기 때문이다.”
제갈수광의 말이었는데, 그 말이 끝나자 교관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다.
뭐지? 문제라도 생겼나?
보아하니 엄상평도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다.
엄상평이 교관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가며 마주쳤을 때도 표정을 보니 염려스럽긴 했습니다. 역시나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엄상평의 어조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인솔 교관들 중에서 둘째인 장호산이 내게 말했다.
“아, 송유겸은 잘 모르겠구나. 실은 여길상에 대한 얘기다.”
여길상은 우리 동부지맹 잠룡관에서 선발된 관도로 안휘에 있는 여씨세가의 장남이다. 그는 동부지맹 쪽의 예선에서 팔 위를 차지해서 통합 잠룡대전에 출전하게 됐다.
“여길상 공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림맹에 온 후로 나는 관도들과 어울린 일이 없다시피 했다. 내 경우에는 제갈수광을 따라 돌아다느라 바빴고, 관도들은 모두가 수련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나는 관도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먼저 다가오는 이들이 아니면 딱히 내가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었다.
나와 달리 엄상평은 관도들과 계속 어울렸기에 뭔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장호산이 대꾸했다.
“지난 번 장강에서의 전투를 겪으며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은 모양이야. 그의 무기인 도를 쥐기만 해도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금세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공포가 느껴진다고 한다.”
“허······!”
내가 그렇게 반응하자 이번에는 막내 교관인 양소열이 말했다.
“여길상도 통합 잠룡대전 전까지는 어떻게든 극복해보고자 최선을 다했다. 다른 교관님들도 상담 등을 통해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주셨고, 특히나 내가 붙어서 최대한 도왔다. 한데 결국은 극복하지 못했어. 반 시진 전까지 여길상과 같이 있었는데, 출전은 도저히 무리일 것 같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더구나.”
어떤 종류의 증상인지 알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여길상의 정신이 나약해서 그러는 거라며 쉽게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폄하할 일이 아니다.
실전을 처음 겪은 무인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전생에 마인들 중에도 저런 증상을 겪는 이들을 여럿 봤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순간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 너무 강렬하게 박힌 경우에 주로 저런 공황 상태를 겪는다. 일부는 첫 살인의 충격으로 그런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실전 경험이 제법 있어도, 전투 중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경우에도 간혹 저런 상태에 빠진다.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겪는 건데, 웬만해서는 시간이 지나면 극복이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극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다른데, 단기간에 극복되기는 상당히 어렵다.
장강에서의 전투를 겪은 후 통합 잠룡대전까지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여길상도 결국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여길상이 출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만큼, 예비 명단인 너희들 둘 중에서 한 명이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 그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너희들 두 사람을 모두 부른 것이다.”
이에 나는 제갈수광과 교관들을 향해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이런 일이면 굳이 상의할 필요도 없잖습니까? 저는 혹여 이런 일이 벌어져도 출전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을 처음부터 계속 밝혀왔으니까요. 교관님들도 잘 아실 테고요.”
막내 교관인 양소열이 말했다.
“네 뜻이 그랬다는 거야 우리도 잘 알고 있기는 한데······.”
나는 미소를 띤 채로 다시금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이 상황에서 제 의사를 다시 물으신다 해도 제 뜻은 같습니다. 고민하실 필요도 없이, 엄 공자를 출전시키시면 됩니다.”
양소열이 곤란함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대꾸했다.
“그게 말이야, 지금 엄상평도 출전권을 네게 미루고 있거든.”
“예에?”
나는 놀라서 되물으며 엄상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엄상평은 나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곧바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엄 공자, 왜 그러시는 거요?”
“하하, 그게······, 나보다는 송 공자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에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더 적격인 건 당연히 엄 공자잖소. 동부지맹 예선에 참가했다는 건, 통합 잠룡대전에 선발되고 싶었다는 뜻이잖소. 그에 비하면 나는 통합 잠룡대전에는 관심도 없었소. 알다시피 심심풀이로 소규모 비무대회에 참가했다가 얼떨결에 예비 명단에 꼈을 뿐이잖소.”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쯤, 앉아 있던 제갈수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합의해서 결정하는 게 가장 공정할 테니,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게끔 우리 교관들이 자리를 비워주겠다. 저녁때까지 결정해서 알려주기 바란다.”
제갈수광이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서자 나머지 교관들도 그 뒤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교관들이 밖으로 나서자마자 엄상평에게 말했다.
“내게 양보하시려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되오. 그러나 엄 공자는 육 년차라 이런 기회도 마지막이잖소. 내가 처음부터 출전에 욕심이 전혀 없었다는 건 엄 공자도 잘 아실 테고.”
“송 공자가 짐작하는 그 이유 때문에 양보하려는 것이오.”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거잖소.”
내가 대꾸하자 엄상평이 미소를 보이더니 말했다.
“송 공자가 암기술에 뛰어나다는 소문 정도는 나도 접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좀 무시했었소. 한데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를, 장강에서의 전투 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이건 무공이 더 뛰어나고 덜 뛰어난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소. 통합 잠룡대전은 그냥 축제 같은 거잖소. 나는 애초에 이 축제에 관심이 없었던 데 반해 엄 공자는 기대하고 있었던 거잖소. 하면 이 축제를 기대했던 사람이 나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오.”
엄상평이 고개를 저었다.
“말이 좋아 축제지, 관중들에게나 축제잖소. 당사자인 각 지맹의 잠룡관들에는 그 이상의 의미라는 걸 송 공자도 알잖소. 가뜩이나 그 와중에 우리 동부지맹 잠룡관은 몇 년 째 계속 무시만 당하고 있는 입장이고.”
내가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엄상평이 바로 말을 이었다.
“송 공자는 제갈 교관님을 수행하느라 잘 몰랐겠지만, 그간 다른 지맹의 유명한 관도들 여럿이 이곳에 다녀갔었소. 무림세력끼리는 관계가 이리저리 얽혀 있으니, 그들은 지인에게 인사한다는 목적으로 방문했던 것이오.”
그럴 수도 있는 거라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한데 우리 쪽 관도들을 대하는 그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아시오? 참! 어이가 없어서. 동부지맹에서 팔 강에 들 수 있는 관도는 잘 해야 한 명 정도일 테니, 우리에게 나머지 일곱 명은 누구일지를 같이 예상해 보자고 합디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부지맹의 팔 강 관도 한 명은 당연히 종금무일 것이다.
“개인전 삼십이 강, 십육 강에서는 동부지맹의 관도를 만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단체전 첫 대전에서도 우리 쪽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디다. 당연히 동부지맹은 바닥에 깔고 간다는 분위기요. 무시당하고 있음을 아는데도 우리 관도들은 다들 억지로 웃어 보이더구려.”
엄상평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자존심은 상하는데, 농담 식으로 그리 말하니 발끈할 수도 없는 문제잖소.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세다는 소리나 들을 게 빤하니까. 삼 년째 출전하는 종금무 공자의 말을 들어보니 이전에도 그런 분위기였다고 하더구려. 그나마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나은 편이라고······.”
“다른 때보다 나은 편이다?”
“장강에서의 일 때문에 적어도 북부지맹만큼은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니, 그 덕분에 한결 낫다는 뜻이오.”
“아.”
잠시 후, 엄상평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실력의 내가 개인전에 나간다고 칩시다. 내가 과연 일회전이라도 통과할 수 있겠소? 객관적으로 어렵다는 걸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소. 그거야말로 지금 다른 지맹들이 바라는 상황밖에 더 되겠소?”
엄상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송 공자의 말대로 나는 육 년차요. 참가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아니오. 육 년차에게 그건 의미가 없소. 잠룡관 최고 연차로서의 역할은 바로, 결과를 보이는 일이오. 내가 결과를 보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참가에 의의를 두는 역할을 넘어서 더 나은 역할을 하고 싶은 거요. 가능성이 더 높은 후배에게 기회를 넘겨주는, 선배로서의 역할 말이오.”
엄상평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송 공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오. 하지만 충분히 상위권에 갈 수 있을 실력이라는 것만큼은 내 눈으로 직접 봤소.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오. 송 공자가 예비 명단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북부지맹 관도들도 다들 놀라는 기색이었소. 실력이 그렇게나 뛰어난 송 공자가 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 거요.”
엄상평이야말로 장강에서의 전투 당시에 내 활약을 많이 지켜본 관도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네 달쯤 후에 졸업할 사람이오. 이왕이면 우리 잠룡관이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보며 졸업하고 싶소. 혹여 최고의 성적을 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오. 그러면 나는 비록 예비 명단으로 함께했을 뿐이라도, 평생 이 추억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소.”
엄상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내 뜻일 뿐만 아니라 여길상 공자를 포함한 우리 관도들 모두의 뜻이기도 하오. 그러나 이런 일은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 또한 다들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저녁때까지 차분히 생각해 보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공자가 출전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우리가 더 이상 뭘 어쩌겠소. 그건 그것대로 송 공자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말을 마친 엄상평이 내게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조용히 회의실을 나섰다.
“후우우우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저녁 무렵, 제갈수광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제갈수광이 단정하듯 말했다.
“역시나 네가 참가 결정을 할 것 같았다.”
“무슨 근거로 그렇듯 확신하셨습니까?”
“근거 같은 거 없어. 감이거든.”
저러니 더 의아하다.
“아니, 저는 여태 교관님 앞에서 일관되게 불참 의사만 밝혀왔잖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이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 어찌 예상하셨단 말입니까? 설마 독심술도 익히셨습니까?”
“아니야, 인마. 그냥 내가 아는 너라면 그렇게 결정할 것 같았다. 그뿐이다.”
“허어.”
“알았으니까 나가 봐.”
“예······.”
내가 뒤돌아 걸어가서 방문을 열려 할 때였다.
“송유겸.”
“예?”
“네가 싸가지 없는 제자라는 건 너 스스로도 알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잖아, 네가.”
이, 이보쇼!
보낼 거면 그냥 보내줄 것이지 왜 갑자기 시비요?
웬 개수작인가 하는 표정으로 제갈수광을 바라보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저! 저거 봐라, 저거. 선생한테 짓는 표정부터가 저거, 으휴.”
하여튼 인간이 눈치도 비상하단 말이야.
“아, 아닙니다. 맥락도 없이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의아해서······.”
“가만 보면 네가 중요한 부분만큼은 항상 놓치지 않고 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다. 그러니 내가 네 선생 노릇하는 맛을 최소한이나마 느낀다는 뜻이고. 네가 그렇게까지 싸가지 없는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기특하다는 말씀을 열심히 돌려서 하신 거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나가 인마, 나가.”
* * *
저녁 생각이 별로 없었기에 벽곡단을 집어 들고는 그냥 방으로 올라왔다.
침상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니 단목강이 서있었다.
나를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다.
저 미소의 의미를 알기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들어오십시오.”
탁자를 마주하고 앉자 단목강이 말했다.
“출전을 결정했다고 들었소.”
“에휴······.”
“푸하핫! 통합 잠룡대전에 참가하게 됐는데도 그렇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송 공자밖에 없을 거요.”
“후우우우······.”
내가 재차 한숨을 내쉬자 단목강이 나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왠지 의미심장한 느낌이라, 곧바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조장님이 주도하신 겁니까?”
“하하. 아니오. 송 공자의 성격을 빤히 아는데, 내가 어찌 송 공자가 꺼려하는 일을 대놓고 주도하겠소? 그저 방법적인 측면에서 살짝 언질을 줬을 뿐이오.”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내가 눈매를 좁히자 단목강이 말했다.
“송 공자를 설득하는 방식 말이오. 엄상평 공자 또한 송 공자가 출전하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확고했소. 그래서 엄 공자에게 살짝 언질을 준 것뿐이오.”
“어떤 언질이었기에······.”
“송 공자가 겉보기에는 비협조적으로 보여도 실상은 동료 의식이 강한 사람이라고 했소. 그러니 동료 의식과 동부지맹의 자부심 쪽을 언급하며 설득하되, 혹여 송 공자의 반응이 시큰둥해도 절대로 서운하다는 분위기는 풍기지 말라고 했소. 강요나 강압의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결코 수락할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고.”
“하아······.”
너였냐.
단목강과는 태화지부에서도, 장강에서도 함께 전투를 치렀다.
그렇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안다.
함께 전투를 치른 것만이 다가 아니다. 같은 조라서 파견 임무기간 내내 함께했었다.
그런 이유로 나도, 단목강도, 어느새 서로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악의가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으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게 나는 계획에도 없던 통합 잠룡대전의 개인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