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90화 (90/416)

내 안에 마교있다 90

이윽고 남궁벽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이제야 인사할 틈이 생겼기에 나는 서둘러 남궁벽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대남궁세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저는 동부지맹의 잠룡관도인······.”

“송유겸 공자겠지. 계반에 삼 년차고 강서 광풍현의 송가장 출신이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 이름을 비롯한 나에 관련된 정보들이야 남궁찬이나 남궁설한테서 들었을 수 있다.

한데 남궁벽의 입장에서는 나와 대면하는 게 처음인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딱 알아봤으니 놀란 것이다.

내가 놀란 이유를 알겠다는 듯 남궁벽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개막식 때 단상 앞에 앉아 있는 동부지맹의 출전자들을 유심히 살펴봤네. 열 명 중에서 여덟 명이 사내였고, 잘생겼다고 생각될만한 청년은 네 명이었지. 아, 송 공자가 잘 생겼다는 얘기를 이전에 들었거든.”

“아······.”

“그 중에서 종금무와 주경명이는 작년에도 본 얼굴이고, 나머지 한 명은 딱 봐도 단목세가주와 닮았더군. 하면 그가 바로 단목세가의 소가주인 단목강 공자였겠지. 그래서 남은 한 명인 공자가 그 송유겸 공자일 거라고 생각한 걸세.”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짧게 목례해 보였다.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남궁벽이 눈매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남궁찬과 남궁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얘들아, 니들 말만 듣고 큰돈을 덜컥 걸긴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냐? 송 공자말인데, 전혀 안 강해 보이는데?”

이, 이보쇼! 대놓고 그런 소리 하기요?

남궁벽도 결국 나 때문에 내기를 한 거다. 예상이야 하고 있었지만.

이게 뭐하는 거냐고, 이 인간들아.

남궁찬이 물었다.

“얼마나 걸었는데 그러세요?”

“아니 뭐······, 서문세가와 신창양가의 늙은이들이 내 말을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치부하잖아. 사천당가주 그 독사 같은 놈이 계속 내기를 부추기고. 이미 큰소리는 빵빵 쳐놨는데 막상 돈은 적게 걸면 다들 내가 쫄아서 그러는 줄 알 것 아니냐. 그래서 좀······.”

아니, ‘쫄아서’라니요?

천하제일세가주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게 뭡니까?

현재의 천하 세가 서열로 따지면 동부지맹에는 십대세가에 드는 세가가 남궁세가 말고는 없다.

동부지맹 내에서 세가 서열 이 위로 통하는 단목세가가 전체 서열에서는 십이 위기 때문이다.

혼자만 동부지맹 소속으로 서부, 남부, 북부지맹의 내로라하는 세가들에 둘러싸인 상황이니, 나름의 고충이 있을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얼마나 거셨는데요?”

남궁찬이 재차 묻자 남궁벽이 슬며시 두 자식의 눈치를 살피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니들 엄마가 알면 나는 죽은 목숨일 정도······?”

남궁찬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니! 걸어도 좀 적당히 거시지! 아버지도 진짜!”

남궁찬이 그렇게 외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쇼! 당신도 엄청 걸었으면서 무슨 당신 부친 탓을 하고 있소? 양심은 대체 어디에 팔았소?

남궁찬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많이 걸었단 말이에요! 혹시 그 돈 잃으면 아버지한테 몰래 손 좀 벌리려고 했던 건데, 아, 진짜! 엄마한테는 손 못 벌린단 말이에요! 손 벌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다 아시면서, 진짜!”

“야, 이놈아! 너 이놈은 부당주 봉급이 적지도 않을 텐데 그걸 다 털어서 홀랑 건 거야? 니가 정신이 있는 놈이야?”

남궁벽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놈아! 너는 그렇게라도 니 엄마 따라가서 선이라도 봐야 할 놈이야, 이놈아! 장남이라는 놈이 여태 장가도 못 간 주제에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진짜!”

“아, 진짜!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라고요!”

“이 놈아, 그 나이쯤 되면 이제 못 간 거나 다름없어지는 거야! 확 그 돈 다 잃으라고 할 수도 없고! 으휴우우, 진짜.”

충격적이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천하제일세가의 가주와 소가주 간의 대화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남궁설이 자신의 부친과 큰 오라비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그래, 나도 딱 저 심정이다.

이윽고 남궁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아, 진짜. 아부지랑 큰 오라버니 땜에 내가 못 살아, 진짜.”

‘진짜’라는 추임새는 저 집안사람들이 답답할 때 내뱉는 공통적인 말버릇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천하제일세가도 사람 사는 곳이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나와 사부님의 관계도 저랬었다.

천마였기에 남들은 사부님을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여겼겠지만, 내게 있어 사부님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분이셨다.

나는 사부님에게 농담도 많이 했고, 과하지 않게 눈치껏 투정을 부리기도 했었다. 사부님은 대부분 웃으며 받아주셨다.

사부님 본인 또한 내 앞에서는 종종 허술한 모습도 보이셨다.

피는 안 이어져 있어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였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이겠지.

남궁벽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았다.

“크흠, 흠!”

이보쇼, 이제 와서 점잖은 척하셔야 늦었소.

“어쨌거나 만나서 반갑네, 송 공자.”

“말씀드렸듯 저야말로 반갑고 영광입니다.”

“일전에 위기 상황에서 우리 설아를 여러 모로 보호해줬다지? 덕분에 설아가 무사할 수 있었고.”

“저는 한두 마디 조언해준 것에 불과한데, 따님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알아서 잘 극복한 겁니다.”

남궁벽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내 눈에는 저 미소가 헤벌쭉 웃는 것으로 보였다.

딸 칭찬을 해주니 저러는 거다. 딸바보인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어쨌든 내 딸을 지켜줘서 정말 고맙네.”

내가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남궁벽이 매우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돈을 지켜주게.”

컥!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그거였소?

그딴 소리는 근엄한 표정으로 하지 말란 말이오!

남궁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부지! 그런 말씀 좀 그만 하세요! 내가 창피해서 진짜.”

남궁설이 그러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가요, 송 오라버니. 슬슬 시합 준비해야 하잖아요.”

남궁설은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기색이라, 나는 얼른 남궁벽과 남궁찬을 향해 예를 취해 보인 후 방을 벗어났다.

* * *

남궁설이 송유겸과 선우린을 데리고 방을 나서자, 남궁벽이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실의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가 창문을 열더니 말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장난스러운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궁찬도 부친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 없었다.

한동안 유지되던 침묵을 깬 건 역시나 남궁벽이었다.

“정말이더구나?”

“뭐가요?”

“송 공자 말이다. 무슨 저런 아이가 다 있지?”

남궁찬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부친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 의도를 대강은 눈치 챘기 때문이다.

남궁벽이 뒷짐을 진 채로 신형을 남궁찬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송 공자에 대해서는 설아한테도, 너한테도, 선우 대협한테도 들었지. 그 말을 의심한 건 아니었다. 한데 처음 봤을 때는 의아했어. 무인으로서의 분위기 자체는 너무 평범하게 느껴져서, 탁월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

남궁찬이 미소만 지어 보이자 남궁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 사람한테서 미리 들은 게 없었다면 나조차도 송 공자한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들은 게 있으니 살피고 또 살펴봤던 거고, 그러다보니 겨우 알겠더구나.”

잠시 말을 멈췄던 남궁벽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적어도 기도 하나만큼은 지금껏 내가 봐 온 저 나이대의 모든 아이들 중 최고였다. 단순히 안정되어 있는 수준이 아니야. 깊은 바다처럼 고요한 느낌이었다.”

“그렇죠?”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남궁벽이 물었다.

“저런 아이가 됨됨이마저 괜찮다고?”

“아까 보셨잖아요. 과례도 없지만 그렇다고 예에 어긋나지도 않고, 비굴함이 없이 당당하고.”

남궁벽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찬이 말했다.

“유겸이는 제 정체를 알게 된 후에도, 저한테 뭔가를 바라는 기색을 비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이에요. 오히려 그런 정도를 넘어 선 아이예요. 아버지도 설아한테도 들으셨을 것 아녜요.”

“들었지. 뭘 믿고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사에 누구한테든 아쉬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이, ‘싫으면 됐고, 아니면 말고’ 식이라지?”

“네. 설아하고 린아한테 들어보니, 유겸이가 걔들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 지금까지도 항상 그런 식이래요.”

“허······.”

남궁벽이 어이없다는 듯 반응했다.

대남궁세가의 직계와 적잖은 친분을 쌓았음에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뭐라도 바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천하제일세가니까.

어지간한 청탁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남궁찬이 물었다.

“그런 태도가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존의 이 강호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확신인 거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벽이 말했다.

“매우 탐나는 아이구나.”

남궁찬은 부친이 말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가깝게 지낼수록 세가에 무조건 도움이 될 존재.

송유겸이 최소한 그런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다.

“왠지, 평지에서 큰 산이 하나 솟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송유겸이 미래의 이 강호에서 커다란 한 축이 될 거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남궁찬이 ‘역시’하는 표정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송유겸을 제법 자주 봤고, 같이 시간도 많이 보냈었다. 제갈수광에게서 들은 바가 많기에 송유겸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부친이 송유겸과 마주한 시간은 방금 전의 잠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송유겸의 미래 가치를 제대로 알아 본 것이다.

부친은 역대 남궁세가주들 중에서 무공 경지가 낮은 편에 속하나, 세가를 이끄는 역량만큼은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호의 판세를 제대로 읽고 적절하게 대처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부친의 그 역량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 판단에서 송유겸을 가까이 두고 싶은 것이다.

“유겸이는 보통이 아니에요. 섣불리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에요.”

“내 느낌도 그래.”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는 게 상책이에요. 설아가 있으니까, 지금은 그 애에게 맡겨놓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거예요. 그러다가 적절한 계기가 생기면 우리가 조금씩 걸음을 크게 해서 다가가는 식으로요.”

“그러는 게 좋겠지.”

남궁벽이 그렇게 대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네가 동부지맹에 있으니, 저 아이에 대한 일은 알아서 잘 대처하거라.”

“예.”

뒷짐을 진 채로 신형을 돌린 남궁벽의 시선이, 창문 밖의 먼 하늘로 향했다.

* * *

두 소녀와 함께 훈련동 쪽을 향해 걸었다.

두 소녀는 다시금 면사가 둘러진 모자를 쓴 상태다.

남궁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진짜 쪽팔······, 아니 창피해서 내가 못 살아.”

얘야, 그냥 쪽팔리다고 해. 굳이 더 나은 말로 고칠 필요 없어. 니 언어 습관도 대충은 알거든.

“잊어버려요, 송 오라버니. 아부지랑 큰 오라버니가 좀 주책이 없어요.”

“나는 자연스러워서 보기 좋던데, 뭐. 억지로 점잖은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어. 행복한 가정이구나 싶고, 천하제일세가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고.”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긴 한데, 아무튼 다 잊어버려요.”

발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하하, 알았어.”

* * *

삼십이강과 십육강은 대회가 많기에 두 곳의 실외 연무장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부연무장과 보조연무장이다.

대연무장 근처의 독립된 공터에는 외곽에 경계선이 둘러져 있어, 그곳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통제구역이다.

통합 잠룡대전의 운영 본부로 사용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본맹의 무인들이 외곽에 서서 경계를 서고 있다.

공터 안에는 십여 개의 폐쇄형 천막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출전자들이 대기하는 천막들도 그 구역에 설치되어 있다.

당연히 각 지맹별로 나뉘어 있는데, 서로 마주칠 일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외곽에 듬성듬성 나뉘어 있다.

동쪽에 있는 천막이 동부지맹에서 사용하는 천막이다.

두 소녀와 헤어져서 우리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바깥에는 우리와 함께 왔던 동검대의 무인 세 명이 대기 중이었다.

그들과 짧게 인사하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 보니 세 사람뿐이었다.

교관 한 명과 관도 두 명이다.

인솔 교관들 중 막내인 양소열, 절강목가 출신의 육 년차 목태월, 복건 무이문 출신의 육 년차 형가섭이었다.

나머지는 아마도 대회를 치르고 있거나, 그 대회를 구경하고 있는 모양이다. 교관들은 교관들대로 바쁠 테고.

“유겸이 왔구나.”

양소열이 나를 맞는데, 목소리에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쓱 보니 목태월과 형가섭도 축 처진 모습이다.

내 기억에 저 두 사람의 시합은 삼십이강전의 초중반에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시합이 끝났을 시간이긴 한데, 저렇듯 축 처진 모습을 보니 결과를 대강은 알 것 같다.

얼른 양소열에게 전음을 보내어 확인했다.

[목 공자와 형 공자, 탈락한 겁니까?]

[응······. 그렇게 됐어.]

여덟 명 중에서 두 명이 벌써 탈락한 거다.

그 즈음, 목태월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교관님, 저는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있겠습니다.”

그러자마자 형가섭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양소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사람, 너무 상심하지 마라. 이번에는 단체전이라는 기회가 한 번 더 있잖아. 잘 추슬러서 단체전에서 더 열심히 하자.”

“예······.”

두 사람이 힘없이 대꾸하고는 막사를 벗어났다.

형가섭은 동부 예선에서 육 위였고, 목태월은 사 위였다.

지역 예선에서 사 위 안에 든 관도들의 경우, 통합 잠룡대전의 삼십이강에서는 다른 지맹의 예선전 오 위 이하와 붙는다.

형가섭은 다른 지맹의 사 위 이상과 붙었을 테니 떨어질 법 했다고 쳐도, 목태월이 벌써 떨어졌다는 게 의외다.

동부 예선 때 목태월의 시합을 본 적이 있는데, 실전 감각과 응용력이 제법이었다. 변칙적인 수법도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준수한 실력을 보였었다. 게다가 작년 통합 잠룡대전 때는 십육강에 오른 전력도 있었다.

한데 올해에는 삼십이강에서 벌써 떨어졌다니. 가뜩이나 목태월은 다른 지맹의 오 위 이하 관도와 붙었을 텐데.

뭔가 냉엄한 현실과 마주한 느낌이다.

궁금해서 천막의 안쪽에 크게 붙어 있는 대진표 쪽으로 다가가, 두 사람의 삼십이강전 상대를 확인했다.

일단 형가섭부터였다.

<서문규, 남부지맹, 오 년차, 서문세가.>

뭐, 금방 납득이 된다.

서문세가는 십대세가 내에 드는 명문세가이며, 서문규는 남부지맹 예선에서 삼 위였다고 들었으니까.

이후에는 목태월의 삼십이강전 상대를 확인해봤다.

확인 후, 약간이나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악미조, 북부지맹, 사 년차, 산동악가.>

악미조는 북부지맹에서 오 위였다고 들었다.

가뜩이나 사 년차인 그녀에게 육 년차의 목태월이 진 것이다.

아까 충격을 받은 듯했던 목태월의 표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허어! 우리 창술미녀께서 실력이 보통이 아니셨네?

둘만 남은 김에 양소열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우리 쪽에서 십육강에 올라간 관도는 누가 있습니까?”

“가장 먼저 진출한 건 단목강이야.”

역시 단목강이고.

“이후에 종금무도 무난하게 진출했다고 들었어.”

역시 우리 쪽 일 위고.

“현재까지 확정된 건 그 두 사람이야. 아까 주경명의 시합이 시작됐다고 듣긴 했다. 한참 지났으니 슬슬 결과가 나올 때도 됐는데.”

양소열은 기대감과 간절함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합비주가의 주경명은 오 년차이며, 동부 예선에서 삼 위였다.

따라서 다른 지맹의 오 위 이하와 시합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주경명도 십육강에 진출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기대이기도 하다.

우리 쪽 사 위였던 목태월이 탈락한 만큼, 주경명은 반드시 십육강에 진출해 주는 게 좋다.

그래야 최소 우리 쪽의 일이삼 위가 십육강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나머지의 선전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마침 대진표 옆이었기에 주경명의 상대를 확인해 봤다.

<등조균, 서부지맹, 육 년차, 공동파.>

확인 후에 곧바로 양소열에게 물었다.

“공동파의 등조균 관도라고 되어 있는데, 그가 서부지맹 예선에서 몇 위였었죠? 갑자기 기억이 안 나서.”

“육 위.”

공동파면 구파일방에 들어가는 명문거파다.

북부지맹에 유명한 세가들이 몰려 있다면, 서부지맹에는 유명한 문파들이 몰려있다.

심지어는 구파일방 안에서만 따져도 다섯 곳이나 들어간다.

무당파, 화산파, 곤륜파, 종남파, 공동파다.

유명한 성수곡도 서부지맹에 속해 있으며, 그 외에는 항산에 있는 항산파와 오대산에 있는 오대파도 유명하다.

잘 알려진 문파만 해도 그 정도인데, 유명한 세가들마저 몇 곳이 존재한다.

제갈세가, 신창양가, 산서온가 등이다.

먼 과거에 무림맹주를 배출했던 종리세가마저 그 당시에 세가의 터전을 안휘에서 호북 중서부로 옮겼었다. 그래서 서부지맹 쪽에는 종리세가까지 추가되었다.

서부지맹이 이런 식이니 수준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거고, 그래서 관도들이 서부 예선의 팔 위 안에 드는 일조차 어려운 거다.

참고로 그 다음으로 수준이 높다고 평가되는 곳은 북부지맹이다.

어쨌거나 주경명의 상대가 아무리 서부지맹 예선의 육 위라도, 구파일방인 공동파의 제자다.

쉽게 생각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사옥연이었다.

양소열이 얼른 물었다.

“사옥연, 어떻게 됐어?”

그러자 사옥연이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죄송해요······.”

“아냐, 아냐.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수고 많았어.”

“그래도 교관님들이 그렇게 많이 신경 써 주셨는데 일회전도 통과 못하고······.”

나는 여전히 대진표 옆에 있었기에, 사옥연의 상대도 얼른 확인해 봤다.

그녀는 동부 예선에서 칠 위였으니, 상대는 다른 지맹에서 사 위 이상을 차지한 관도였을 것이다.

확인해 보니 바로 납득이 갔다.

<선의림, 서부지맹, 오 년차, 화산파.>

화산 제자인 선의림은 서부 예선에서 이 위였다.

사옥연의 대진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고 하겠다.

양소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이야. 게다가 사옥연 너는 첫 출전이고 내년에도 기회가 있잖아.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서 내년에 더 잘하자. 가뜩이나 이번에는 단체전도 있으니까 아직 끝난 것도 아니고.”

“예, 교관님.”

비록 일회전에서 탈락하긴 했으나, 사옥연의 경우에는 목태월이나 형가섭에 비해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다.

나도 그녀에게 한 마디 해줬다.

“고생 많으셨소, 사 소저.”

“고마워요. 이따가 송 공자 시합, 가서 응원할게요.”

“하하, 뭘 응원씩이나. 어쨌든 고맙소.”

내가 사옥연에게 대꾸하자 양소열이 내게 말했다.

“유겸이 너도 슬슬 가 봐야지? 곧 네 차례일 거야.”

“예, 그래야죠.”

내가 그렇게 말하며 천막의 입구 쪽으로 향하자 양소열이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한 시합, 한 시합 최선을 다하자 유겸아.”

양소열이 저렇게 말하는 의미를 안다.

내 대진운이 전체적으로 썩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뭐, 너라면 알아서 잘 할 것 같지만.”

양소열이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장강에서 내 실력을 봤기에 짓는 미소다.

나도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준 후, 천막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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