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92화 (92/416)

내 안에 마교있다 92

나름의 응급 상황이었던지라, 한참 지나서야 주심이 시합 종료를 선언했다.

“동부지맹 삼 년차, 송유겸, 승!”

이 몸이 이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에서는 환호하는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뭐, 내가 관중의 입장이었어도 환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이변을 일으켰어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환호를 하지.

우연히 통합 잠룡대전에 출전하게 됐으나, 나는 어쩔 수 없이 모종의 결과를 내야 하는 입장이다.

그 와중에도 실력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백도에서 주목을 받으면 사파와 천마신교에서도 주목을 받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내 상대들과 개싸움을 할 작정이다.

남들이 봤을 때는 전혀 멋지지도 않고, 실력을 인정해주고 싶지도 않은, 그런 개싸움 말이다.

권법과 함께, 금나술을 이용한 잡아채기 기술을 섞어서 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권법과 금나술은 기본적으로 근접해서 싸워야 한다. 그런 만큼, 방금 전처럼 뒤죽박죽 엉키다가 우당탕 끝낼 수가 있다.

관중들 중에는 고수들도 많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라도 내가 상대에게 초근접해서 싸울 경우, 그 모든 수법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운 좋게, 꺼림칙하게, 어영부영.

경지를 들켜도 최소한만.

그런 식으로 올라가는 게 내 목표다.

승자 수속을 밟고 천막을 나섰는데, 연무장 사무 구역의 출구 쪽에 남궁설과 선우린이 서있었다.

남궁설이 비틀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와! 송 오라버니 진짜, 사람들 앞에서 한심해 보이려고 별 짓을 다하시는구나. 그 정도면 진짜 기술자네요.”

야! 짓이라니!

남궁설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송 오라버니, 대전 상대의 사타구니 작살내는 데 무슨 집착 같은 거 있어요? 전에 소규모 비무대회 때도 상대 한 명이 그런 식으로 당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뭐야, 그걸 알고 있었어?

그러자 선우린이 말했다.

“내가 볼 땐, 상대가 뭔가 송 오라버니를 거슬리게 한 거야. 방금 점창파 사람도 뭔가 거슬리게 했던 거지.”

얘는 상냥하면서도 눈치는 예리하단 말이야.

얘들이 이렇게까지 파악한 걸 보니, 앞으로 사타구니 공격은 자제해야겠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 의도를 들키면 내가 사고로 위장하려 했던 모든 노력들도 물거품이 될 테니까.

남궁설이 물었다.

“송 오라버니, 부 연무장 쪽의 다른 시합, 보러 갈 거예요?”

“같은 조의 시합은 동시에 진행되니까 그쪽도 지금쯤이면 거의 끝나지 않았을까? 굳이 가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쪽 시합은 박빙으로 예상되는 시합이라 아직 진행 중일 수도 있어요.”

“나는 그냥 우리 지맹의 천막에나 잠시 들렀다가 숙소로 복귀할게.”

어차피 내 다음 상대에 대한 분석은 교관들이 하고 있을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나중에 봐요, 송 오라버니.”

두 소녀가 인사한 후 빠르게 멀어져갔고, 나는 대연무장 옆의 공터 쪽으로 향했다.

삼십이강전은 크게 여덟 개 조로 나뉘어, 한 조에 동서남북의 각 잠룡관도들이 한 명씩은 골고루 들어가게 되어 있다.

팔 조에서는 나와 남부지맹의 두원웅이 한 경기를 치렀으니, 다른 한 경기는 북부지맹과 서부지맹 관도의 대결이다.

삼십이강의 조별 시합은 두 개의 연무장에서 동시 진행되기에, 내가 보조연무장에서 시합을 치르고 있을 때 그쪽 시합은 부연무장에서 진행된 것이다.

팔 조에 속한 서부지맹의 관도는 상평운이라는 관도다.

곤륜파 출신으로 그도 육 년차며 서부 예선에서 오 위를 차지했다.

북부지맹의 관도는 언상요라는 관도다.

진주언가 출신으로 육 년차고 북부 예선에서 삼 위를 차지했다. 장강에서의 일 때문에 마주치기는 했으나 딱히 친분은 없다.

상평운과 언상요 중의 승자가 내 다음 상대인 것이다.

곤륜 제자와 진주언가 후손 간의 대결이라, 예선 순위와 상관없이 박빙으로 예상되는 모양이다.

내가 싸웠던 보조연무장 쪽에 관중들이 많지 않았던 이유도, 그 두 사람이 유명 세력의 후기지수들인 덕분이었다.

동부지맹의 천막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이 보였다.

양소열과 강하령이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양소열이 다가와서 나를 얼싸안았다.

“송유겸! 이 짜식, 잘했어!”

우리 쪽의 삼사 위인 주경명과 목태월이 십육강에 진출하지 못한 상황이라, 그 외의 진출자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쁜 모양이다. 교관 입장에서 당연히 그럴 만하다.

양소열이 포옹을 풀고 물러나자 한쪽에 앉아 있던 강하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송 공자님.”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좋아 보인다.

즉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강 소저께서도······?”

“맞아! 강하령도 진출했어!”

대답은 양소열에게서 나왔다. 매우 고무된 목소리였다.

강하령은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오오! 강 소저도 축하드리오!”

“고마워요.”

동부 예선에서 오 위였던 강하령의 삼십이강 상대는 태산파의 남군호였다. 그들은 칠 조다.

북부지맹에서 사 위를 차지했기에 남군호 또한 보통 실력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강하령은 사 년차고 남군호는 육 년차다.

그래서 솔직히 강하령이 승리할 가능성은 삼 할 가량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그 가능성을 뚫고 이긴 것이다.

대단하다.

강하령은 작년에 삼십이강에서 탈락한 것으로 성적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단 십육강에는 진출했으니 그 부담감도 어느 정도는 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잘 된 일이다.

그녀에게는 내년과 내후년이라는 기회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강하령과 내가 합류한 덕에 동부지맹의 십육강 진출자는 네 명이 되었다.

여덟 명 중에서 네 명이면 기본적으로 반타작은 된다.

동부지맹 잠룡관은 전체적인 수준이 낮다고 평가되기에, 그런 입장에서 이 정도면 나름의 준수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주경명까지 탈락했을 시점에는 초상집 분위기였을 텐데, 그런 와중에도 반타작은 했으니 양소열도 고무되어 있는 거다.

강하령은 지인을 만나기로 했다면서 천막을 벗어났다.

이후에 양소열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합 때문에 점심을 벽곡단으로 때웠더니 배고프네요. 저도 슬슬 동련각으로 돌아가서 배 좀 채우고 쉬어야겠습니다.”

“그래, 그래. 송유겸. 많이 먹고, 푹 쉬어.”

“예.”

그 후에 천막의 문을 벗어나려는데 제갈수광과 마주쳤다.

“어디, 가나?”

“동련각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배 좀 채우려고요.”

“같이 가지. 나도 출출하던 참이니까.”

“예? 예······.”

함께 스무 걸음 남짓 걸었을 때쯤 제갈수광이 말했다.

“참으로 너답게도 이겼더군.”

고개를 돌려보니 비아냥거리는 표정이다.

“제자가 승리했는데 축하는 안 해주시고 비난부터 하시깁니까?”

“축하는 무슨. 당연히 이겨야 할 시합을 이긴 걸 갖고.”

“교관님 때문에 마음 상해서 다음 시합에서는 콱 져버려야겠습니다. 예비 명단이 십육강에 진출했으면 할 도리는 다 한 셈이기도 하고.”

제갈수광이 흠칫했다.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러는 걸 보면, 남궁찬의 말마따나 돈을 많이 걸긴 건 모양이다.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제갈수광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교관님께서 제 실력 다 발설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뭐, 그 유명한 신룡대에라도 자원입대하죠, 뭐. 들어보니 거기 들어가면 신분 세탁도 어렵지 않은 모양이고.”

제갈수광이 더욱 흠칫했다.

“아무리 대단한 신룡대라도 저 같이 가능성 있는 어린 인재를 그냥 돌려보내진 않겠죠? 거기 들어간 김에 제마멸사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해보죠, 뭐. 백도 무림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니 의미도 깊고요.”

물론 마음에도 없는 얘기다.

참고로 제마멸사란 마(魔)를 제압하고 사(邪)를 멸한다는 뜻이다.

천마의 제자였던 내 입으로 저 말을 내뱉으니 사부님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도 살짝 든다.

“이거 왜 이래, 송유겸. 축하해. 축하한다고.”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요? 내기에 큰 돈 거셨다던데, 그 돈이 별로 안 아까우신가봅니다?”

“진짜 축하한다니까? 우리 사이에 왜 이래? 열심히 하자, 송유겸. 알았지? 넌 할 수 있어! 싸가지는 없······, 아니, 너는 싸가지도 있고 능력도 있는 제자잖아. 선생의 목숨 같은 돈이 걸려 있다고.”

중간에 이상한 소리가 들어간 것 같은데, 그건 그냥 넘어가주자.

“하긴, 교관님한테는 돈이 곧 술이고 술이 곧 목숨이니 맞는 말씀이긴 하네요.”

“이 자식······. 아니, 그렇지. 네 말이 맞지.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 알았지?”

“예, 뭐. 노력은 해볼게요.”

재수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렇게 대꾸해줬다.

간만에 상대적 우위를 점했으니 살짝 즐겨주자.

제갈수광이 나를 째려보는데, ‘으휴, 이 웬수같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잠시 말없이 걷던 중에 제갈수광이 말했다.

“네 십육강 상대, 곤륜파의 상평운이다.”

“박빙이라도 진주언가의 언상요 공자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곤륜은 곤륜이네요. 서부지맹의 수준이 높다는 것도 알겠고요.”

“말 그대로 박빙이었다고 하더군. 장 교관과 황 교관이 전력 분석을 했을 테니, 정보가 필요하면 두 교관에게 듣도록.”

“알겠습니다.”

중앙 대로를 지나 동련각 쪽으로 향하는데, 멀리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마주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가 우리 쪽을 보더니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춤했다.

제갈건이었다.

당숙인 제갈수광을 보고 주춤한 거겠지.

제갈수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물론 우리가 가는 방향이 제갈건이 있는 방향이다.

곧 제갈건의 앞으로 다가간 제갈수광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말하는 걸 들어보니 두 사람은 본맹에 온 후로 처음 만나는 모양이다.

“다, 당숙······.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제갈건은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래. 너도 못 보던 새 듬직한 어른이 되었구나.”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부 예선에서의 성적도 좋았다고 들었고, 아까 어렵지 않게 십육강에 진출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간 열심히 했구나.”

“가, 감사합니다, 당숙.”

제갈수광의 칭찬을 들은 제갈건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전체적인 제갈건의 분위기 자체가, 제갈수광을 매우 존경하는 기색이었다.

제갈세가와 제갈수광의 관계에 대해서는 들어서 대충 알고 있으나, 소가주인 제갈건과 제갈수광 사이에서만 오가는 또 다른 감정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제갈수광이 제갈건에게 물었다.

“어딘가 가는 길이었느냐?”

“아닙니다. 운기조식 좀 취하다가 산책 겸 나온 길입니다.”

“지금 동련각으로 식사하러 갈 건데, 함께 가겠느냐?”

그 말에 제갈건이 반색하며 얼른 대꾸했다.

“예, 당숙!”

제갈수광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송유겸, 이쪽은 내 종질인 건이야. 그리고 건아, 이쪽은 내 제자인 송유겸이다.”

제갈수광에게 대꾸했다.

“전에 오다가다 잠시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 공자께서 그 유명한 제갈세가의 소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갈건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척 그렇게 말했다.

이전에 제갈건이 제갈수광을 찾아왔다는 걸 감춰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제갈건이 곧바로 대꾸했다.

“아, 저도 지나다니다가 봬서 얼굴은 기억하고 있소. 반갑소, 송 공자. 제갈건이오.”

눈치 빠르게 잘 대처하네?

하긴, 괜히 제갈세가겠어?

“송유겸이오. 반갑소, 제갈 공자.”

제갈수광은 우리를 동련각의 식당으로 이끌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는 약간 이른 시각이기에, 식당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는 이따가 와서 식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신 듯하니 두 분이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눈치껏 빠져주려고 그렇게 말했는데 제갈수광이 곧바로 대꾸했다.

“아니야, 송유겸. 함께 먹어도 돼. 어차피 기회가 되면 서로 인사를 시켜줄 생각이기도 했고. 너는 일전에 나한테 이런저런 얘기도 들었고 하니까.”

뭐, 나야 제갈세가의 소가주와도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니 나쁠 일은 없다.

게다가 제갈수광이 애초에 인사 시켜줄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나름의 의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딱 봐도 제갈건은 사람도 괜찮아 보이고.

결국 나도 두 사람과 함께 원형 식탁에 앉았다.

“네 아버지에게는 아까 잠깐 인사를 드렸었다. 서로 시간이 많지 않아서 정말로 잠깐일 뿐이었지만.”

현 제갈세가주의 이름은 제갈신이다.

참고로 제갈신은 과거에 제갈수광과 윤단영의 관계를 일관되게 응원한 쪽이었다고 들었다.

한데 그 당시에는 제갈신이 가주가 된지 오래 되지 않은 시점이라, 세가의 어른들 사이에서 본인의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했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제갈수광도 현 가주인 제갈신에게만큼은 항상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일전에 들었던 내용이다.

송가장의 총관인 이청오가 말하길, 제갈수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촌임에도 불구하고 현 제갈세가주가 매우 아꼈다고 했었다. 사실이었던 거다.

“형수님도······, 그러니까 네 어머니도 잘 지내시지?”

“예, 잘 지내십니다. 당숙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약아도 잘 지내고?”

제갈건의 여동생인 제갈약을 말하는 모양이다.

“지금은 서부지맹 잠룡관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약아야말로 당숙을 엄청나게 보고 싶어 합니다. 이번에 당숙이 본맹에 오신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 아이도 무조건 아버지와 함께 왔을 겁니다.”

제갈약을 생각하는 듯, 제갈수광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야말로 당숙을 너무나도 뵙고 싶었습니다.”

“못난 당숙을 뭘 그리 보고 싶어 해?”

“그런 말씀 마세요, 당숙. 못 나시다니요. 당숙이야말로 제 영웅이신데요.”

“푸훗! 이 녀석이 다 컸으면서 아직도 그런 소릴 하고 있네.”

제갈수광이 피식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제갈건이 또렷하면서도 진지한 눈동자로 대꾸했다.

“지금보다 더 어른이 돼도, 당숙은 영원히 제 영웅입니다.”

얘, 뭐야?

이 정도면 거의 신앙이다.

둘 사이에 끈끈한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