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93
내가 의아해하자 제갈수광이 말했다.
“별 거 아니다. 건이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통합 잠룡대전을 구경하러 왔었거든. 그때는 제갈세가에서도 많이들 오셨었고.”
즉시 제갈수광에게 물었다.
“혹시 그 때가······?”
“어. 내가 육 년차에 통합 잠룡대전에 출전했을 때였지.”
제갈수광은 육 년차에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했다.
당해의 전년도인 오 년차에는 준우승이었으니, 제갈세가에서도 기대감 때문에 많이들 응원하러 왔었나보다.
이번에는 제갈건이 내게 말했다.
“겨우 다섯 살에 불과했지만,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소. 당시의 기억이 각인됐다고 할까.”
“건이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참 예뻐했었다. 건이도 당숙인 나를 많이 따랐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우승하는 모습까지 본 거야. 어린 마음에 얼마나 멋져 보였겠어? 그래서 저렇게 영웅이네, 뭐네 하는 거야.”
잠시 회상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제갈건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 세가의 어른들도 기대야 크셨지만 실제로 당숙이 우승할 거라는 확신은 없으셨소. 송 공자도 아시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쉬운 상대가 없는 게 바로 통합 잠룡대전이잖소. 십육강도 만만치 않지만, 팔강 정도만 되어도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강자들만 남게 되오.”
“실제로 아까 십육강 대진을 봤소. 극히 공감하오.”
“그래서 당시에도 세가의 분위기는 우승은 어려울 거고 이 년 연속으로 준우승만 차지해도 대단한 성과일 거라는 얘기가 많았소. 실제로 당시에 당숙은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했던 게 아니셨소. 힘겹게, 힘겹게, 팔강과 사강을 넘어 결승에 가셨고, 결승에서도 치열한 접전 끝에 우승하셨소.”
“아하.”
“한 시합, 한 시합, 승패를 알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 당숙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 있었소. 그러면서 짜릿하게 승리하며 우승까지 하셨기에 당시의 일이 깊게 각인된 모양이오.”
말을 하면서도 제갈건은 그 날의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제갈건이 말했다.
“우리 세가의 경우, 대대로 직계 중에서도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일이 단 한 번밖에 없었소. 그것도 무림맹이 각 지맹으로 나뉜 초창기의 어수선한 시기였소. 이후에 매우 오랜만에 우리 세가에서 우승자가 나왔던 것이오. 당시에 온 세가가 축제 분위기였고 실제로 잔치까지 열었었소. 그래서 내게는 당숙의 존재가 더 크게 각인된 것이고.”
“아하.”
“한데 내가 여섯 살이 된 해에, 당숙은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세가를 떠나셨소.”
“아, 당시에 일에 대해서는 교관님한테서 대충 들었소. 윤단영 교관님과의 일 때문에 그리 되셨다고.”
내 말에 제갈건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제갈수광을 바라보았다. 제갈수광이 누군가에게 그 일을 밝혔다는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제갈수광이 제갈건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제갈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송 공자께서 대충 알고 계시다니 말하기도 편하구려. 당숙이 떠나셨을 때는 어린 마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소. 울기도 많이 울었소. 이후에도 나는 당숙을 닮고 싶어서, 당숙이 하셨다는 것들은 나도 다 열심히 했소. 그래서 나도 쌍검술을 익혔고, 궁술도 익혔소. 한데 역시 당숙처럼 되기는 어렵더구려.”
제갈건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세월이 지나고 당숙이 세가로 돌아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당숙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차있었소. 한데 당숙은 잠깐 인사만 하러 오셨던 거였소. 세가에 대한 애정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소. 그게 서운해서 당시에 제가 당숙에게 심한 말을 해서······.”
제갈건은 지금 생각해도 제갈수광에게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제갈수광이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때도 떠날 때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가뜩이나 너는 그때 열세 살 어린 애였고.”
“하지만 그때 그렇게 떠나신 후로 당숙께서 다시는 세가에 안 오셨기에······.”
제갈건이 열세 살 때면 제갈수광은 서른 즈음이었다.
그 나이의 제갈수광이 애를 상대로, 겨우 그런 일로 마음 상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 다 이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갈건은 그 일로 계속 제갈수광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제갈수광을 보지 못했었기에, 이곳에서도 편하게 다가서기가 어려웠던 거겠지.
그랬던 제갈건을 아까 제갈수광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며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고.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대강 끝나자 제갈건이 제갈수광에게 물었다.
“한데 당숙께서 송 공자와 많이 친하신 모양입니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신 것 같고······.”
“싸가지 없는 제자야. 웬수같은 녀석이지.”
이, 이보쇼! 인사시켜주려고 했다면서 그런 소리 하시기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도 제갈건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저 표현 자체가 매우 친해야만 할 수 있는 표현임을 알기에 저러는 것이다.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깝게 지낼수록 좋은 녀석인 것만큼은 확실하지.”
제갈수광이 확신하듯 그렇게 말하자 제갈건이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제갈건이 내게 말했다.
“미안한 말씀인데, 내가 사실 송 공자에 대해 잘 모르오. 어떤 분인지 알 기회가 없어서······.”
그러자 제갈수광이 알아서 나에 대해 간단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줬다.
모두 듣고 난 제갈건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진표에서 보니 점창파 두원웅 공자와의 대진이던데, 시합은 잘 치르셨소? 제가 팔 조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해서······.”
“아하하, 어찌어찌 십육강에는 진출했소. 운이 좋았소.”
그 말에 제갈건이 다시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본인의 예상과는 매우 다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누구나 저렇게 생각할 만하다.
“혹여 팔 조의 다른 시합이 어떻게 됐는지도 아시오?”
“아까 교관님이 말씀하시길, 곤륜파의 상평운 관도가 진주언가의 언상요 공자를 이기고 십육강에 진출했다고 하더구려.”
“아, 상 공자가.”
그건 예측했다는 투다.
제갈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 공자는 우리 지맹에 속해 있기에 정보를 알려드릴 수 없다는 점이 아쉽구려.”
“하하, 마음만 감사히 받겠소.”
“아무튼 십육강에서도 건투를 빌겠소.”
“제갈 공자의 건투도 빌겠소.”
참고로 제갈건의 십육강 상대는 북부지맹의 악미조다.
제갈수광이 제갈건에게 말했다.
“마침 십육강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만, 십육강 진출자는 현재 서부지맹 다섯 명, 동부지맹 네 명, 북부지맹 네 명, 남부지맹 세 명이다. 재미 삼아 묻는 건데, 네 예상에는 각 지맹별로 몇 명씩이나 팔강에 올라갈 것 같으냐? 십육강 대진을 대강은 알고 있을 테니 묻는 거야.”
나 또한 차세대 지략가를 대표하는 제갈세가의 소가주가 어떻게 예측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으음······.”
제갈건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현재의 대진을 보면, 남부지맹과 북부지맹에서는 딱 한 명씩만 팔강에 진출하게 될 겁니다.”
확신하는 어조였다.
“호오. 그럼 서부지맹과 동부지맹은?”
“송 공자의 시합 결과에 따라 바뀔 겁니다. 제가 송 공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보니 그 시합에 대한 예측은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송 공자가 지면 서부 넷, 동부 둘이 될 거고, 송 공자가 이기면 양쪽 다 세 명씩이 될 겁니다.”
“네가 나 듣기 좋으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제갈수광의 말에 제갈건이 바로 대꾸했다.
“당연합니다. 사안 예측과 당숙에 대한 존경심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는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건의 말인즉, 동부지맹에서 종금무와 단목강은 기본적으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단목강의 십육강 상대는 청성파의 국규민이라는 관도다.
청성파는 말이 필요 없는 구파일방의 한 축으로, 아미파, 사천당가와 함께 사천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이다. 사천은 남부지맹에 속한다.
국규민은 남부 예선에서 이 위였고, 단목강은 동부 예선에서 이 위였다.
누가 봐도 박빙으로 생각할 텐데, 제갈건은 단목강의 팔강 진출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단목강의 팔강 진출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지난 몇 달간 단목강의 성취가 크게 상승했음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예상이다.
한데 제갈건은 뭘 보고 그렇게 예상한 걸까.
단목강의 삼십이강전을 보고 그리 예상한 걸까?
용하긴 용하다.
과연 제갈세가의 소가주답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 사람은 그 후에도 한동안 통합 잠룡대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고 있자니 저녁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식당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제갈수광이 제갈건을 배웅해주려는 것 같았기에, 나는 그쯤에서 제갈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소.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겠소.”
“나도 반가웠소, 송 공자. 앞으로는 지나치다가 마주치면 인사 나눕시다.”
제갈수광과 제갈건이 건물을 벗어났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팔 조인 내 시합은 오후 시합이라, 나는 오전 내내 숙소에서 회회심공을 운용했다.
이른 시간에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는 숙소에서 한동안 속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내 시합은 오후의 시합 중에서도 두 번째 시합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시간이 되어 대연무장 옆 공터에 있는 동부지맹의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나 막내 교관인 양소열이 혼자서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관님.”
“어서 와, 송유겸.”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니, 단목강과 종금무의 시합 결과는 묻지 않아도 알겠다.
십육강에 진출한 네 명 중에서 두 명이 벌써 팔강에 진출했기에 저러는 것이다. 이미 반타작은 했으니까.
양소열이 내게 물었다.
“오전 시합들의 결과는 알아?”
“모릅니다.”
“하여간 송유겸 너는 정말 특이하다. 보통은 관도들이 훨씬 더 관심이 많은데. 게다가 다른 관도들은 여기저기 비무 구경하러 다니기 바쁜데 너는 그런 것도 없고.”
“제가 게을러서 그럽니다. 어쨌거나 교관님 표정 보니 단목 공자와 종 공자가 팔강에 진출했겠구나 싶긴 하네요.”
“맞아! 두 사람 다 진출했어! 우리 동부지맹에서 팔강에 두 명이나 진출한 게 얼마만인지······!”
양소열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일 조에서는 박빙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단목강이 여유롭게 올라갔어.”
내 예상대로이기도 했고, 제갈건의 예측대로이기도 했다.
역시 단목강이다.
“이 조에서는 예상대로 제갈건이 올라갔고.”
제갈건의 상대는 악미조였다.
악미조가 최선을 다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이긴 했다.
“삼 조도 예상대로 종금무가 무난하게 올라갔고.”
종금무의 상대는 모용리였다.
모용리가 삼십이강에서 이변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그래도 종금무는 동부 예선에서 일 위였다. 현실적으로 종금무가 패배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 조도 예상대로 추소륵이 무난하게 올라갔지. 뭐, 추소륵도 우승후보 중 한 명이니까.”
추소륵은 북부 예선에서 일 위였으며, 양소열의 말마따나 우승 후보로 꼽히는 네 명 중 한 명이다.
“추소륵 공자의 상대가······.”
내가 그렇게 말하며 멀리에 붙어 있는 대진표를 바라보자 양소열이 대꾸했다.
“서문세가의 서문규. 남부지맹의 오 년차고, 예선에서는 삼 위였고.”
중경의 서문세가는 남부지맹에 속하며, 현재 십대세가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명문 세가다.
상대가 소림의 추소륵이라면 아무리 서문세가의 후손이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문득 남궁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뭐······, 서문세가와 신창양가의 늙은이들이 내 말을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치부하잖아.」
신창양가의 양벽종은 모용리한테 져서 삼십이강에서 탈락했고, 서문세가의 서문규는 십육강에서 탈락했다.
이걸 알게 된 남궁벽이 속으로 얼마나 고소해하고 있을까 싶다.
잠시 후, 천막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제갈수광이었다.
양소열이 곧바로 물었다.
“아, 제갈 교관님. 오 조와 육 조의 결과, 나왔습니까?”
“예상대로였소. 우승후보들이 나란히 진출했소.”
“하면 화산파의 선의림과 당가의 당효광이······.”
“그렇소. 육 조는 당효광의 진출이 확실시 됐기에 오 조의 시합을 봤는데, 좀 의외였소. 아무리 화산의 선의림이 우승후보라 해도, 상대가 황보충이었잖소. 황보충도 잘하긴 했는데, 중반을 넘어가니 실력차가 보이더구려. 요새 화산파가 잘 나가서 그러는지, 그 저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소.”
황보충의 시합이었구나.
선의림은 서부 예선에서 이 위, 황보충은 북부 예선에서 이 위였다. 두 사람 다 오 년차다.
예선 성적만 보면 얼핏 박빙일 것처럼 보이는데, 제갈수광의 얘기를 들어보니 황보충이 생각보다 많이 밀린 모양이다.
일전에 봤을 때 황보충의 권법도 제법 수준이 높았다.
그런 황보충을 이겼다면 선의림이라는 화산 제자가 뛰어나긴 뛰어난 모양이다.
황보충과의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아쉬운 마음도 든다.
시간이 되어, 내가 시합을 펼쳐야 할 보조연무장으로 향했다.
칠 조인 강하령의 시합은 부연무장에서, 팔 조인 내 시합은 보조연무장에서 동시에 펼쳐진다.
삼십이강전 때와 똑같이 준비를 마치고 각종 검사도 받은 후, 약간 대기하다가 이윽고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반대편에서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올라왔다.
그가 바로 곤륜 제자인 상평운일 것이다.
청해의 곤륜파 또한 구파일방의 한 축이다. 말이 필요 없는 백도 무림의 명문이다.
상평운은 육 년차로, 서부 예선에서 오 위를 차지해서 본선에 진출했다. 삼십이강에서는 북부 예선에서 삼 위를 차지했던 진주언가의 언상요를 꺾고 올라왔다.
강인한 인상에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졌다.
한데 도가의 제자답게 눈빛이나 기도는 차분하다.
우리가 상호 인사를 나눈 후 시작 지점으로 물러서자, 주심이 시합 개시를 외쳤다.
“시합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