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94화 (94/416)

내 안에 마교있다 94

시합 개시가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송유겸이라고 했지.’

송가장이라는 작은 장원 출신에, 동부지맹 잠룡관의 예비 명단.

대진표의 같은 조에 속해 있는 그 이름을 봤을 때, 당연히 그가 삼십이강에서 탈락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저 송유겸의 상대는 다름 아닌 점창파의 두원웅이었으니까. 두원웅은 남부 예선에서 사 위로 올라온 실력자니까.

한데 의외로 저 송유겸이 두원웅을 꺾고 십육강에 올라온 것이다.

삼십이강에서는 동시간대에 시합을 펼쳤기에 송유겸의 경기를 직접 보진 못했다. 나중에 교관들한테서 정보만 들었다.

송유겸은 삼십이강에서 저 소비도를 단 한 자루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권법을 쓰다가 마지막에 금나수법으로 두원웅을 제압했다는데, 일단 권법은 어설펐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금나수법을 사용해서 잡아채기 수법으로 이겼는데, 약간은 운이 작용한 것 같다는 게 교관들의 분석이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는 방심하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여교관인 윤단영이 와서 의외의 말을 했다.

「평운아, 송유겸이라는 애 말인데, 의외로 대단한 실력일지도 몰라. 대신 출전한 예비 명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쪽의 세학이나 의림이와 대결한다는 생각으로 상대해. 신중하게 최선을 다해서 상대하라는 뜻이야.」

물론 각오와 마음가짐에 관한 주문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무당의 풍세학과 화산의 선의림은 서부지맹 최고의 실력자들로, 이번 통합 잠룡대전에서도 우승 후보로 꼽히는 관도들이다.

한데 동부지맹의 예비 명단인 송유겸을 그 두 사람처럼 여기며 상대하라니.

중요한 건 그 말을 한 사람이 윤단영이라는 점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인솔 책임 교관을 맡진 않았지만, 같이 온 인솔 교관들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바로 윤단영이다.

미모의 여교관인 윤단영은 평소 활달한 성격으로 농담도 종종 하지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날카롭기도 하고 감도 좋은 교관이다.

그녀가 주문한대로 신중하게 임해야 하리라.

관중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시합이 시작된 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송유겸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자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관중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후후, 언제까지 안 움직이는지 보자.’

계속 이런 식이면 주심이 양쪽을 다 불러서 주의를 주게 되어 있다.

주의 두 번이면 경고고, 경고 두 번이면 패배로 간주된다.

상대를 제압하고 말고를 떠나, 감점 방식으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둘이 같이 주의를 받아도 상대적으로 마음이 조급해지는 쪽은 첫 출전자인 송유겸일 수밖에 없다.

곁눈질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주심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주심이 가운데로 둘 다 불러서 주의를 줄 것이다.

이윽고 주심의 양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슉-

송유겸이 소비도 하나를 꺼내더니 자신을 향해 던졌다.

소비도가 대놓고 가슴 한 복판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데, 속도 자체는 전혀 빠르지 않다.

굳이 발을 옮길 필요도 없이, 상체의 움직임만으로도 피할 수 있을 만큼.

‘이잇!’

저 의도는 빤하다.

주심의 주의를 받지 않기 위한 행동이다.

어제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던 저 소비도를 이런 순간에 꺼내서 던질 줄이야.

이제 자신은 움직여야할 뿐만 아니라 공격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만 주심의 주의를 받게 될 테니까.

상대에게 속내를 들키고 수 싸움에서도 진 것 같아서 속내가 영 불편하다.

즉시 송유겸에게 달려들며 유룡오검의 삼 초를 떨쳐냈다.

슈슈슉-

상단 한 곳과 하단 두 방향을 거의 동시에 공략하는 수법.

경쾌하되 검로는 부드러워야 하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묘리대로 검이 잘 뻗어 나갔다.

삼십이강에서 송유겸은 이런 경우 신형을 뒤로 쭉 빼며 필요 이상으로 간격을 벌렸다던데, 이번에는 달랐다.

툭! 휙-

공격 하나를 권갑의 손등 부분으로 살짝 비껴내며 최소한으로만 피한 것이다.

더 의외였던 건, 그 후에 송유겸이 즉시 자신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주먹을 뻗었다는 점이다.

슈슉- 슉!

두 차례의 주먹질과 한 차례의 발차기가 제법 매섭게 날아왔다.

권법이 어설펐다고 하던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단, 상대가 권법을 펼치다가 갑자기 금나수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그 부분에는 유의해야 하리라.

차분하게 검을 찔러 견제함과 동시에 최소한으로만 회피했다.

한데 회피하자마자 상대가 또다시 달려들며 주먹을 찔러 넣고 있다.

속도는 아까와 비슷하다.

이번에도 적절히 대처했는데, 그 와중에도 묘한 게 있었다.

송유겸은 권각술을 펼쳐야 하니 초근접해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한데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공격해오는 방향과 박자가 미묘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속도에 비해 막거나 회피하기가 살짝 까다로웠다.

대처하기가 어려운 건 아닌데, 불편한 정도라고 할까?

상대가 투로 설정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결코 어설픈 수준의 권법이 아니다.

어제는 실력을 감췄었다는 거겠지.

이후에도 수차례 공방을 주고받으며 대처해봤는데, 역시나 양상은 비슷했다.

검술은 근접 간격이고 권장각술은 초근접 간격이다.

검술을 펼치기에 유리한 간격에서만 싸우려고 노력해 봤는데 역시나 그건 무리였다.

그때마다 송유겸이 반 박자 빠르게 회피함과 동시에 즉시 자신을 향해 파고들었던 것이다.

속도는 보통인데 반응 속도는 제법이라고 할까.

대처가 잘못 되거나 약간만 늦어도, 상대는 곧바로 금나수법을 사용하려 들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운신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언제 소비도를 던질지 모른다.

이렇듯 막상 송유겸을 상대해 보니 의외로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수비적인 입장이 되면 피로가 더 쌓이는 쪽도 자신 쪽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얽히며 공방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경신법하면 또 곤륜이니,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다.

* * *

상대인 상평운은 처음부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교관들로부터 그런 식의 주문을 받은 모양이다.

참고로 내 다음 상대도 서부지맹의 관도일 가능성이 구 할 구 푼 이상이다. 다음 상대는 그 정도로 강자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승부를 지루한 체력전으로 몰고 갈 생각이다.

승부를 빨리 매듭지으려면 나 또한 실력을 더 많이 드러내야 하며, 그러면 정보도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적당한 실력만 보이며 장기전을 펼쳐, 상대가 알아서 지쳐 떨어지게 만들 계획이다.

하지만 단순한 체력전으로만 가면 내 체력 소모 또한 적지 않다.

그렇기에 매 순간마다 상대가 대처하기 쉽지만은 않게끔 충분한 압박을 가했다. 틈만 나면 하박의 가죽 띠에 꽂혀 있는 소비도 쪽으로 손을 가져가기도 했다.

상대로 하여금 신경 쓸 게 많게 하여 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서다. 심력이 소모될수록 체력도 더 빨리 소모되기 때문이다.

나는 상평운이 쉴 틈 없이 대처할 수밖에 없게끔,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그래도 확실히 곤륜 제자는 곤륜 제자다.

어느 순간부터 평범한 검법을 버리고 곤륜을 대표하는 검법인 태청검법과 옥청검법을 적절히 섞어서 펼치고 있다.

수세 위주로 가다가는 결국 본인이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금세 인식하고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곤륜 제자답게 검술의 수준이 제법 높다.

검술보다 더 수준이 높은 건 역시, 상평운의 발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 경신술이다.

유명한 운룡대팔식이라, 신체의 중심이 흐트러질만한 순간에도 안정적으로 중심을 유지하고 있다.

상평운이 멋들어진 운룡대팔식을 펼쳐낼 때마다 관중들의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가 검법으로 절초를 펼쳐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를 향한 탄성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매우 평범한 권각술을 쓰며 대단치 않은 움직임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관중들이 내 모습을 보고 지루해하든 말든 상관없다.

나는 오로지 이런 모습만 끝날 때까지 계속 보여줄 생각이니까.

우리가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후로 한 식경(30분가량)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상평운은 몇 번이나 내게서 간격을 크게 벌리며 호흡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평운이 뒤로 몸을 쭉 빼는 와중에도 찰거머리처럼 계속 달려들었다.

덕분에 상평운은 호흡이 제법 거칠어진 상태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후로 삼 각(45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동안에도 나는 상평운에게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헉! 헉! 허억!”

상평운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이다.

“후우, 후우, 후우······.”

나도 어느 정도는 호흡이 거칠어진 상태인데, 일부러 입으로 호흡하며 숨이 더 많이 거칠어진 척했다.

내 체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식으로 비춰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적당히 뛰어난 정도로만 보여야 한다.

이쯤 되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관중들에게서는 거의 반응이 없었다.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음에도 처음과 비슷한 양상의 싸움만 반복되고 있으니 지루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후로 거의 반 시진(한 시간)이 지났다.

이쯤 되니 상평운은 발바닥에 아교라도 붙은 것처럼 느려진 상태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며, 호흡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이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할까.

나도 적당히 지친 척을 해주다가, 이내 틈을 봐서 상평운의 품속으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상평운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내가 그의 목에 목비도를 겨누는 것으로 이 지루한 시합도 끝났다.

주심이 시합 종료 선언과 함께 내 승리를 외쳤으나, 이번에도 나를 향한 관중들의 환호는 거의 없었다.

의도한대로 시합을 끌다가 마무리했으니,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승자 수속을 마치고 연무장 사무 구역을 벗어나려는데, 그 앞에 우리 교관들 두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송유겸! 잘했어!”

인솔 교관 중 셋째인 황염기가 희열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치자, 둘째 교관인 장호산이 내게로 빠르게 다가오며 나를 얼싸안았다.

“이런 복덩이 같은 녀석!”

“교, 교관님, 제가 땀이 좀 나서 지금 땀 냄새가······.”

“인마! 지금 땀 냄새가 문제야? 지금이면 네 방귀냄새라도 얼마든지 맡아줄 수 있어!”

“하하, 그, 그렇게까지는······.”

교관들이 이렇게나 기뻐할 만도 하다.

나까지 승리하여 우리 동부지맹에서 세 명이나 팔강에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래 우리 지맹에서는 팔강에 한 명 정도만 진출하는 게 고작이었다. 최소 삼사 년간은 그랬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 교관들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잠룡관으로 복귀했을 때 목에 힘깨나 줘도 될 만큼.

우리 인솔 교관들 중에서 장호산과 황염기는 전력 분석을 맡고 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은 내 시합과 동시 진행된 부연무장 쪽의 시합을 관전했을 것이다.

즉, 두 사람이 이곳에 와있다는 건 그쪽 시합이 끝났다는 뜻이다. 내 시합이 길었으니 당연히 그럴만하다.

조심스럽게 장호산에게 물었다.

“강하령 소저 쪽은······.”

“상대가 상대인 만큼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강하령도 생각보다 훨씬 오래 버티며 잘 싸워줬다. 관중들도 과연 검후의 제자답다며 칭찬도 많이 했고, 강하령 또한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 때문인지 표정도 좋아 보였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자 장호산이 말했다.

“송유겸, 상대에 대해 너무 의식하지 말고, 오늘은 일단 가서 잘 먹고 푹 쉬자. 같이 밥 먹으면서 풍세학에 대한 정보들을 알려주마.”

“알겠습니다.”

장호산의 말마따나 내 팔강전 상대는 강하령을 꺾고 올라온 풍세학이다.

풍세학은 무당파의 제자로, 서부지맹의 육 년차다.

서부 예선의 일 위로 통합 잠룡대전에 진출했으며, 그런 만큼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십육강까지는 몸 풀기 수준이었다면, 이제부터가 제대로라 하겠다.

그날 저녁부터 밤까지 나는 회회심공만 운기하다가 적절한 시각에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어제처럼 오전 내내 회회심공을 운기한 후, 이른 점심식사를 했다.

회회심공의 회복력 덕분에 체력에도 문제가 없고, 몸 상태도 가뿐했다.

팔강부터는 부연무장에서만 시합이 펼쳐진다.

오전에 두 시합, 오후에 두 시합이다.

내 시합은 역시나 오후의 마지막 시합이기에, 나는 푹 쉬다가 오후에 천천히 동부지맹의 천막으로 향했다.

오늘도 천막을 홀로 지키고 있는 이는 막내 교관인 양소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교관님.”

“송유겸, 어서와. 몸 상태는 어때?”

“평소와 비슷합니다.”

양소열의 표정이 밝은 편인 것으로 보아, 오전의 시합에서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음을 알 것 같았다.

“오전의 시합들은 어찌됐습니까?”

팔강쯤 되니 나로서도 다른 시합들의 결과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알만한 강자들이 붙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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