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11
송천광과 이청오의 눈동자가 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내 옆에 앉은 송유상 또한 놀란 표정일 것이다.
“독립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오늘 송천광의 표정이 굳은 건 처음이다.
그를 향해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시겠지만 두세 달만 지나면 저도 스무 살입니다. 장부의 나이 스무 살이면 더 큰 세상을 보며 홀로서기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천광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눈빛이었다.
그는 그 눈빛을 하고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이 애비나 우리 가문에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예에?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불만 같은 거 없습니다.”
불만은 없지만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있는 정도다. 엮이기 싫은.
“하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느냐?”
“갑자기 생각한 게 아닙니다.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뵙게 되어 말씀드린 겁니다.”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가문에서든 차남이라면 언젠가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입장들이잖습니까. 그래서 제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가끔씩 했던 것뿐입니다.”
나를 보는 송천광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오늘 그의 동공은 여러 차례 흔들렸는데, 이번의 흔들림은 의미하는 바가 좀 달랐다.
“그래서······, 어딘가에 네 집이라도 얻어서 그곳에서 혼자 살겠다는 뜻이냐?”
“그러합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송천광이 과장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하. 아버지,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것만 독립해서 살 뿐이지, 가문에 일이 있으면 종종 찾아뵙곤 할 겁니다.”
별로 찾아갈 생각은 없다. 안심시키기 위해 던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송천광과 이청오의 눈동자가 그나마 조금은 안정되고 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송천광이 이청오와 송유상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잠시만 나가 있게.”
이청오와 송유상이 일어나더니 대기실의 문을 벗어났다.
송천광이 물었다.
“너는 왜 독립부터 계획하고 있는 것이냐? 네가 우리 가문을 이끌어갈 생각은 아예 없는 것이냐?”
이건 내 입장에서도 의외의 질문이었다.
“예? 제가 왜······. 장남인 형이 있고, 형이 가문을 이어가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나는 장자가 모든 것을 물려받는 구조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안정적인 대물림의 방식인 건 맞다. 그래서 다들 그리 하는 것이고.
다만 내 경우에는 송가장 따위에 욕심이 전혀 없을 뿐이다. 애초에 귀찮아서 엮이고 싶지가 않다고 할까.
“애비는 우리 송가장을 무가로 키우는 게 목적이다. 후계도 그 목적 하에서 정할 것이다.”
아, 이 양반 또 시작하셨네.
내가 무려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다보니, 갑자기 욕심이 나는 거다. 나를 내세워서 송가장을 확실한 무가로 발돋움시키고 싶은 거다.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계산일 테니, 이대로 내보내기가 너무 아깝다는 거겠지.
나쁜 아버지는 분명히 아닌데, 이런 면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송구합니다만 아버지, 저는 송가장을 이어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즉, 송가장의 후계 구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송천광의 눈이 커졌다.
“과, 관심이 없어······?”
“예.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제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생각입니다. 괜한 후계 싸움 구도를 조성하여 평화롭던 가문에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비록 형과 친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반목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우리 가문을 이어받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단 말이냐?”
이런 경우에는 확실하게 내 의사를 전달해둘 필요가 있다.
“예. 전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내 대꾸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인지, 송천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송천광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표정의 변화를 보니 대강의 분위기를 알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뜻을 바꾸지 않을 기세라, 나를 송가장의 후계로 삼기는 어렵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후계 구도에 끼어들면 송가장에 풍파가 일어날 게 빤하다는 사실을 송천광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송유백이 큰 하자가 있는 장남인 것도 아니라서, 애초에 아까 그가 던진 얘기는 무리수이기도 했다. 그 점 또한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에는 다른 생각도 하는 표정이었는데, 내가 그것까지 짐작할 수는 없다.
곧, 송천광이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일단 네가 독립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부터 묻고 싶구나. 어차피 잠룡관에 다니는 시기에는 독립이 큰 의미가 없을 테니, 졸업 후를 생각하고 있겠지?”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요. 졸업하기 전에 부지런히 알아보고, 졸업한 후에는 실질적으로 독립할 생각입니다.”
“하면 삼 년 남짓 후로 생각하고 있었겠구나?”
내가 당연히 육 년차까지 다닐 거라는 전제하에서 묻는 말이다.
“저는 사 년차까지만 다니고 졸업할 겁니다.”
“뭐어어어어?”
“아까 제 삶을 스스로 개척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제가, 젊음의 이 년을 의미 없이 잠룡관에서 소모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사 년차에 졸업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합니다.”
“그, 그래도 이 녀석아······.”
내가 잠룡관에 더 오래 머물면서, 통합 잠룡대전에서도 계속 우승을 차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그럴수록 송가장의 위상도 계속 올라갈 테니까.
꿈 깨쇼. 그런 거, 더 이상 참가할 생각 없소.
“아버지, 잠룡관은 본격적으로 강호에 나가기 전의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더 넓은 세상이 있는데, 작은 잠룡관에서 허송세월이나 보내고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겨우 이 정도에 안주하길 바라십니까?”
송천광의 눈이 커졌다.
내가 ‘겨우 이 정도’라는 말을 할 때 커진 것이다.
“그래서······, 독립을 한다면 거처는 어디를 생각하고 있느냐?”
“일단은 남창 내지는 포양호 인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수로를 통해 중원의 여러 지역에 편하게 닿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송천광은 약간이나마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강서 땅을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집은 애비가 구해주겠다.”
“아닙니다. 제가 살기 편할 곳이 어디일지를 잘 알아본 후, 거처도 스스로 구하겠습니다.”
“뭐어어?”
“지금까지 키워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라, 이제부터는 가문의 도움 없이 홀로 헤쳐 나갈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가문의 도움조차······, 안 받겠다고?”
송천광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에 나는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당당하게 독립하겠다는 놈이 그 독립을 도와달라며 가문에 손을 벌릴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 모습이 어른 입장에서 믿음이 갈 리도 없고요.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각오는 높이 산다. 그러나 이놈아, 우리가 무슨 남이더냐? 자식이 수십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넷 중 하나가 독립한다는데, 아비가 돈이 없지도 않은데, 그걸 그냥 빈손으로 내보내라고?”
분위기가 완고하다.
이 부분만큼은 내 의지를 관철하기 어렵겠다.
조심스러워하는 척하며 대꾸했다.
“다른 의도를 갖고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일어서며 여러 경험들을 하다 보면 그만큼 배울 것도 많겠다는 생각으로 임하려 했던 겁니다. 저는 젊잖습니까. 가뜩이나 우승 상금도 적지 않아서, 그거면 작은 집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고요.”
“네 말대로 네가 살 곳을 스스로 정하는 것까지는 인정하겠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집이나 터가 있다면, 그것만큼은 반드시 애비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아, 진짜, 귀찮게.
“왜 대답이 없어?”
“아, 알겠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강서 땅이라고 하니, 네가 일러주면 내가 직접 가서 상태를 살펴볼 것이다. 거처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허물고서라도 집채를 다시 올릴 것이며, 터가 좁다면 주변을 매입해서라도 터를 넓혀줄 것이다. 알겠느냐?”
나는 엮이고 싶지 않은데, 송천광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엮어 두고 싶은 거다.
남도 아니고 자식이 강호에서 주목받는 후기지수로 급부상한 마당이니, 어떻게든 엮어서 앞으로도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거지.
뭐, 일단은 대꾸해줄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예.”
뭐, 나쁠 것도 없고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이렇게 된 거, 정가장 주변이나 더 잘 알아봐서 송천광에게 말해줘야겠다.
겉으로는 송천광이 마련해준 집에서 생활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 옆에 있는 정가장, 즉 비룡장에서 지내면 되는 거거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그 둘을 합쳐버리는 거고.
잠시 후, 송천광이 일어서더니 말했다.
“그래. 긴 여정으로 너도 노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구나.”
“아, 예. 정문까지 모시겠습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대꾸하자, 송천광이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다시금 우승에 대한 칭찬이다.
나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공손히 고개만 숙여 보인 후, 송천광과 이청오를 잠룡관의 정문까지 배웅했다.
송유상도 함께였지만, 어른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대화는 섞지 않았다.
* * *
나란히 말을 몰며 천천히 이동하면서도 이청오는 송천광의 옆 얼굴을 꾸준히 확인하는 중이었다.
잠룡관을 벗어난 후로 반각이 넘었음에도, 송천광은 깊은 생각에 잠겨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송유겸의 독립 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눈치를 보아하니 기분이 상해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방해하지 않을 생각으로 이청오가 묵묵히 말을 몰고 있을 때쯤, 드디어 송천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 지난겨울 가족 모임이 끝난 후에 내가 말했었지? 그 아이, 당돌해졌다고. 내가 알던 내 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공석에서는 장주와 총관이나, 사석에서는 형과 아우로 지내는 두 사람이다.
“좋은 의미로 그 말씀을 하셨죠. 저도 형님 말씀에 크게 동의했던 바였고요.”
“아까 얘기를 나눠보니 당돌한 걸 넘어, 내 품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
“예에?”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낸 아이가 아닌가. 한데 그 아이가 아까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이 겨우 그 정도에 안주할 것으로 보이냐고 내게 묻더군.”
이청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송천광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자세히 봤네. 한데 결코 젊은 혈기로, 허세로 한 말이 아니었네. 그 대단한 결과를 내고도,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그러했네.”
“하긴, 돌이켜 보면 유겸이는 우리의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 웃기만 했을 뿐, 스스로 자랑 한 마디를 안 했습니다. 뿌듯해 하는 느낌조차 없었습니다.”
송천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송천광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아이가 내 후대를 이었으면 하네. 물론 그렇게 되면 장원이 난리가 나겠지. 그래서 그 욕심은 접었네. 그 아이도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고.”
“유겸이에 대한 제 마음도 형님과 같습니다. 그러나 집안에 미칠 파장을 생각하면 잘 결정하신 일입니다. 유겸이도 대단하군요. 전혀 관심이 없다니.”
이청오의 말에 송천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해서 그 아이의 독립을 허락했네. 들어보니 남창이나 포양호 인근을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아, 그러셨군요. 그래도 강서 안에 있으니 다행한 일 아니겠습니까.”
“독립할 때 장원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더군.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헤쳐 나가겠다나?”
“허······! 상황을 다 떠나서, 유겸이 그 아이가 정말 남다르긴 남다르군요. 그 나이에 그런 생각까지······.”
“그러게 말일세.”
대꾸한 송천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비 입장에서 어찌 그냥 빈손으로 내보내겠는가. 터는 그 아이가 잡되, 거처는 내가 마련해주겠다고 했네.”
“당연한 말씀이시지요.”
“참고로 나는 이게 기회라는 생각을 하고 있네.”
“예?”
이청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보니 송천광의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계속 광풍현 촌구석에서만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도 슬슬 남창 쪽으로 진출해야지. 그 아이를 보유한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기회이기도 하고.”
“그 말씀은······.”
“허허. 대대로 이어져온 토호 가문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은 재산도 어느 정도는 있는 법일세. 애들은커녕 부인도 모르고, 심지어는 어머님도 모르시네. 오로지 가주만이 알고 있는 재산이지.”
이청오의 눈매가 좁아졌다.
드러나지 않은 재산이 어느 정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훨씬 큰 재산일 수도 있다. 송가장이 광풍현에 뿌리박고 산 세월이 깊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 몰래 투자를 하는 거지.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켜 세울 떡잎에게 말이야. 그러면 어차피 장원 자체는 장남에게 물려주는 셈이니 별 문제도 없을 테지.”
“그렇겠군요. 유겸이에 대한 투자라면 뭐, 우리 입장에서는 누가 말려도 무조건 해야 할 일이지요.”
“앞으로는 장원의 드러난 재산들도 적당히 정리해 가세. 내가 탕진해서 어쩔 수 없이 처분해야 한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도 좋겠지. 욕은 내가 먹겠네.”
송유백에게 물려줄 재산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다.
지금의 송천광은 그 정도로 송유겸에게 모든 것을 걸 작정이다.
이청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름아닌 유겸이인데다가, 장소가 남창이나 포양호 인근이면 투자 가치도 매우 크지요.”
그러자 송천광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둘 다 슬슬 바빠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