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12
“자, 작은 형, 정말로 독립할 생각이시오?”
송천광과 이청오를 배웅한 직후에 송유상이 내게 물은 말이다.
“어차피 귀하와 귀하의 형에게는 내가 눈엣가시일 테니 더 잘 된 일 아니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리고 작은 형은 무슨 작은 형이오? 귀하와 나는 형제 관계를 진즉에 정리한 걸로 아는데.”
“아니, 그, 그건······.”
송유상이 난감함 가득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땐 내가 철이 너무 없어서······.”
“그때는 무슨 그때. 귀하가 나 때문에 세상 쪽팔려서 못 살겠다고 했던 게, 화상도 이런 화상이 없다고 했던 게, 징글징글 하다고 했던 게, 그게 불과 일 년 전의 일이오. 또한 귀하의 형은 나를 천한 핏줄로 여기고 있소. 그리고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꼴찌반인 계반에 불과하고.”
놈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게 물들고 있다.
“아무 것도 바뀔 건 없소. 우리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각자의 삶을 살면 되오. 천한 핏줄인 나도 지금까지처럼 귀하와 귀하의 형에게 신경 쓰지 않고 살 테니, 고귀한 핏줄인 두 분도 두 분대로 잘 살면 되는 것이오. 이 정도면 정리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이만 가보겠소.”
그 말을 남긴 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놈에게서 벗어났다.
* * *
참으로 오랜만에 내 거처에 돌아왔다.
통합 잠룡대전을 위해 잠룡관에서 출발했던 게 팔월 이십구일의 일이었는데, 다시 잠룡관으로 복귀한 오늘은 시월 팔일이다. 한 달 하고도 열흘 만에 거처에 돌아온 셈이다.
마당에 들어선 것뿐인데도 마음이 너무 편안하다.
행장을 멘 채로 마룻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송유하가 조별 파견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웠으니 먼지가 쌓였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먼지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확인 차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쓸어 봤는데, 역시나 먼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열쇠를 꺼내어 방문의 자물쇠를 따고는 아예 방 안에 들어가서 전체적으로 상태를 확인해 봤다.
한데 역시나 먼지가 없었다.
이 정도면 누군가가 최근에 청소를 했다는 거다.
의아하다.
송유하가 없는데도 이런 상태라니.
내 방의 열쇠는 나를 제외하면 송유하만 갖고 있기에 더욱 의아하다.
벽장과 옷장 등을 열어보니 누군가가 뒤진 흔적은 없다.
누군가가 청소만 한 것이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매우 의아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약간 쉬다가 저녁 때 오랜만에 구보 경로를 돌고 온 후, 씻고 나서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를 탐독하다가 잠들었다.
* * *
다음날 새벽에도 동 틀 무렵에 거처를 나서서 구보를 했다.
내가 도는 구보 경로는 역시 새벽에 돌아야 운치가 있다.
경로의 중간쯤을 지나치는데 수련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단목세가의 사촌남매 중에 단목홍신은 현재 조별 파견에 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제 단상 위에서 봤을 때도 단목홍신은 보이지 않았고 단목지만 보였었다.
한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두 사람이 수련하고 있다는 거다.
의아하다.
확인해 보니 단목지와 단목강이었다.
오늘은 사촌남매끼리가 아니라 오누이끼리 수련을 하고 있는 거다.
나를 발견한 단목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송 공자니임!”
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다.
나도 멈춰서 손을 흔들어 주자, 두 사람이 서둘러 물 밖으로 벗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단목강은 상의를 탈의한 채 그대로 다가왔고, 단목지는 젖은 흑의 위에 기다란 피풍의를 두르며 뒤따르고 있었다.
“조장님을 이곳에서 다 뵙는군요. 단목 소저도 오랜만이오.”
단목강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일 때, 단목지가 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와아! 송 공자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까지 차지할 실력을 갖고도 여태 제 앞에서 감쪽같이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 저, 상처받았어요.”
짐짓 토라진 척을 하는데, 너무나도 귀엽고 예쁘다.
못 본 새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다.
“아하하.”
내가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자 단목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괘씸죄로 빚 추가예요.”
“푸하하하! 왠지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단목 소저에게 갚아야 할 부채만 계속 늘어나는 것 같구려.”
“후훗. 어쨌든 우승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드리오.”
내가 대꾸하자 단목지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맑은 느낌을 줘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후에도 근처의 바위에 앉아서 두 사람과 더불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에 실력이 급상승한 만큼, 단목강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단목지와 단목홍신의 수련을 최대한 도울 생각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에서 사파 놈들이 등장할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 차원이기도 하다는 모양이다.
단목강은 사파 놈들과 두 차례나 실전을 치러봤다. 어설픈 실전도 아니고 제대로 된 실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단목지와 단목홍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사촌남매의 실력도 충분히 상승하게 될 것 같다.
대강의 이야기를 마친 후, 다시 구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아, 참! 송 공자님 방 열쇠는 제가 갖고 있어요.”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
“아, 송 소저한테서 받았어요. 오라버니와 송 공자님이 통합 잠룡대전 때문에 떠난 직후에, 구보하던 송 소저와 얘기하다가 청소 얘기가 나왔거든요. 제가 오라버니 방 청소를 해줘야 하는데 곧 조별 임무에 투입돼야 해서 걱정이라고 했더니, 송 소저가 선뜻 본인이 해주겠다고 하더라구요. 하루는 송 공자님 방을 청소하고, 하루는 오라버니 방을 청소하면 된다면서.”
단목지가 바로 말을 이었다.
“송 소저도 중간에 조별 임무에 투입돼서, 이후에는 잠룡관에 먼저 복귀한 제가 맡은 거예요. 송 소저가 열쇠 두 개를 교관실에 맡겨놓고 갔거든요. 그래서 저도 하루는 오라버니 방 청소하고, 하루는 송 공자 방 청소하고 그랬죠.”
누군가 했더니 너였어?
“허······! 고, 고맙소, 단목 소저. 이 고마움을 어찌 갚는단 말이오?”
“안심하세요. 이건 빚으로 안 칠 거니까. 저도 송 소저에게 고마움을 갚은 것뿐이니까.”
특유의 빚 얘기를 하며 빙긋 웃어 보인 단목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늘 조별 임무 파견 때문에 또다시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계속 갖고 있다가 송 소저 오면 돌려줄게요.”
이후에도 내가 없는 동안 계속 청소해주겠다는 얘기다.
송유하와 단목지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애들이다.
옆에서 단목강이 내게 말했다.
“나도 나중에 송 소저 만나면 제대로 감사를 표할 생각이오.”
감사를 표하겠다는 인간이 설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자식이 마음은 콩밭에 있고만?
* * *
그 날 오후.
제갈수광, 단목강과 더불어 동부지맹으로 향했다.
제갈수광이 앞에서 달렸고, 나와 단목강은 나란히 그 뒤에서 달렸다.
단목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송 공자, 만찬 때 맹주님이 하셨던 말씀 말이오.]
자원을 받아서 잠룡관도들을 전투에 투입시키는 일에 대한 얘기다.
[송 공자는 참가할 생각이시오? 송 공자라면 왠지 참가할 것 같긴 한데.]
[그렇습니다.]
애초에 참가할 생각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불참할 수도 없는 문제다.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할 경우, 결코 좋은 소리 못 듣는다. 내게 호감을 갖고 있던 백도의 많은 인사들이 그 호감을 거둘 수밖에 없다.
이왕 우승한 거, 나중에 천마신교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나름의 명성 관리를 해둘 필요가 있다.
[조장님은 어찌하실 겁니까?]
[물론 나도 참가할 생각이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단목강의 전음이 이어졌다.
[조직 구성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도 송 공자와 같은 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안전도 안전이지만 송 공자와 싸우다 보면 배울 점도 많아서 말이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이렇듯 끝이 없는 것 같소. 하하.]
[저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조장님이 함께 있으면 든든하거든요. 서로 전투 방식을 잘 알고 있어서 합도 잘 맞고요.]
단목강은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우리는 이후에도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며 동부지맹을 향해 부지런히 경공을 펼쳤다.
동부지맹에 들어선 후에도 단목강과 나는 지나다니는 무인들로부터 큰 환영과 축하를 받았다.
이후에 사십사 조가 쓰는 막사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저녁때쯤 조원들이 복귀했다. 장우혜와 유은무도 함께였다.
단목강과 나는 조원들로부터도 더없는 축하를 받았다.
특히 묘옥련과 청여홍이 매우 기뻐했다. 두 여인의 경우에는 다른 관도들에 비해 나와 친분이 더 깊은 탓이다.
마침 청여홍을 만난 김에 그녀를 따로 불러내어, 얼마 전에 내가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에 들렀던 일에 대해 얘기해줬다.
이후에는 정가장 쪽에서의 공사를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에 맡기겠다는 뜻도 전했다.
“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송 공자님. 제가 최대한 힘 써드릴게요.”
“하하, 너무 그러실 건 없소. 그냥 적정한 액수에 연주상단도 좋고 저도 좋은 정도면 되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죠. 송 공자님이 제게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데. 송 공자님의 지인께서 만족하셔야 송 공자님도 좋은 거잖아요?”
“신경 써주신다니 고맙소. 아무튼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오.”
“맡겨주세요.”
청여홍은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중이다.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에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에 혼자 방문해보고 느낀 건데, 청 소저에 대한 관 지점장님과 양 총관님의 애정이 매우 깊다는 걸 알겠더구려. 단순히 상단주의 영애라서 그러는 분위기가 아니던데, 평소에 청 소저께서 그 두 분을 잘 대해주셨나 보오?”
일전에 관대평과 양운필의 분위기 속에서 느낀 게 있으니 슬쩍 한 번 떠 본 것이다.
“아, 그 두 분은 제가 어렸을 때 본점에서 일하셨는데, 그때부터 저와 사이가 가까웠어요. 그러다가 두 분이 남창지점으로 발령 받아 떠나셨던 건데, 제가 본가를 떠나서 잠룡관에 입관한 이유도 그 두 분이 강서에 계시기 때문이었죠.”
“아하.”
“한데 장차 남창지점에서 저와 그 두 분이 함께 일하게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 두 분이 매우 기뻐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청 소저와 그 두 분이 일을 함께 하신다는 얘기는······.”
“우리 상단의 미래 구상에 있어 남창지점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태거든요. 마침 장녀인 제가 이곳 강서에 있는 데다가 두 분과도 사이가 가까우니, 상단주인 아버지께서 제게 이쪽을 맡길 생각이세요. 어차피 혼사를 피해서 떠난 거면, 일을 해서라도 상단에 도움이 되라는 뜻이시죠. 관 지점장님과 양 총관님으로 하여금 저를 보좌하게 하는 쪽으로 해서.”
얘야, 나는 그냥 한 번 떠 본 것에 불과한데 이런 식으로 줄줄 얘기해주는 거야?
어쨌거나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허어, 이거 앞으로는 청 소저를 높은 분으로 모셔야겠구려?”
내가 농담조로 묻자 청여홍도 웃으며 대꾸했다.
“무려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한테서 그런 대접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데요?”
청여홍도 농담조로 대꾸했다.
내가 미소를 보이자 그녀가 말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건 대외비예요.”
“아니, 대외비면 감추시지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밝힌 것이오?”
내가 놀란 기색을 보이며 묻자 청여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글쎄요? 상인이 그러는 게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내 질문이 딱히 우문 같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그녀의 입에서는 현답이 나왔다.
대외비라도 내게는 말해주는 것이 본인한테 이득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하······! 얘도 이런 쪽으로는 보통이 아니네?
어쨌거나 잘 된 일이다.
청여홍이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을 맡게 되면, 나로서도 매우 편리할 일들이 많아질 테니까.
* * *
제갈수광과 나와 단목강이 합류한 후로 이 주가 지난 시점에 사십사 조의 조별 파견 임무도 끝났다.
해산식을 마치고 거처에 돌아와서 행장을 정리한 후 빨래를 하고 있는데, 마당으로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길초량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길초량이라 너무도 반가웠다.
길초량이 나를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어! 계반의 역대급 사기꾼이신 우리 송 형! 오랜만이오!”
이 자식이 내 방식의 인사로 먼저 선수를 치다니.
“사, 사기꾼이라닛······!”
내가 즉시 대꾸하자 길초량이 웃으며 말했다.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할 실력임에도 그걸 다 감추고 계반에 계셨잖소? 그거야말로 역대급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오?”
야, 인마, 그런 거면 너도 충분한 사기꾼이잖아!
아직은 그걸 대놓고 말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길초량이 말했다.
“가만 있자. 이거, 이거, 나 같은 쭈구리 계반 관도가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인 계반 관도님 앞에서 감이 빳빳이 서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구려. 하하.”
아, 젠장. 이 자식을 내가 놀려줘야 하는 건데, 이 상황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