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20
머릿수만 따지면 적들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들 대부분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돛대들에 불이 붙어서 정신이 없는 데다가, 불타고 있는 돛의 조각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우리 입장에서는 상대하기가 어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잘 싸우고 있다. 적의 머릿수가 빠르게 줄어드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절정고수 놈들에게 집중했다.
몇 놈이 멀찍한 곳에서 우리 쪽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등을 돌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놈들의 기척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멀어지는 방향을 보니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또 하나의 해적선 쪽이다.
밧줄 따위를 타고 내려가서 몸을 뺀 모양이다.
놈들도 이곳에서의 전투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놈들의 존재를 나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제갈수광과 세 노인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길초량 또한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놈들의 뒤를 쫓지 않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전력을 나누는 식으로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자, 남아 있는 다수의 해적들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리저리 도주하기 시작했다.
기동타격조는 적당한 선에서만 추격하며 최대한 해적들의 수를 줄였다. 배 위에서 바닷물 속으로 뛰어드는 적들도 많았는데, 굳이 그들까지 추격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한 성과니까.
그 와중에도 저쪽 옆에 있던 또 다른 해적선이 해안가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참고로 저 해적선은 이 해적선에 비해 크기가 작다.
이곳에서 난리가 난 걸 보고 저 배에 있던 해적들도 기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해적들이 저런 식이니 무림맹 측에서도 해적들과의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제갈수광이 화시 몇 발을 그 해적선 쪽으로 날렸다.
여지없이 돛에 불이 붙었고, 해적들이 그 불을 끄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제갈수광은 그 와중에도 화살을 날리며 돛대에 오르는 그쪽의 해적들 십여 명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인간이 활 쏘는 모습은 전율이 일 정도로 멋지다.
나는 애초에 궁술에는 관심이 없어서 배울 마음조차 들지 않았었는데, 이 인간 때문에 점점 그 마음이 변하고 있다.
이 인간이 궁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활이라는 무기도 상황에 따라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배우려고만 하면 여건도 좋다.
전생에는 이 정도 수준의 궁술 선생이 없었지만, 지금은 바로 옆에 있다. 항상 붙어 다니는 입장이라 틈틈이 계속 배울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게다가 내게는 최고의 활시위인 은룡삭도 있잖은가.
배가 조금 더 멀어지자 제갈수광이 이윽고 활을 내렸다.
이 해적선에서의 전투는 모두 마무리된 분위기다.
나와 함께 제갈수광의 옆에 있었던 길초량이 말했다.
“교관님. 저, 궁술 배우고 싶습니다.”
저 신룡대 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거지.
하긴 제갈수광의 궁술을 보고 있으면 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곧바로 말을 보탰다.
“저도.”
그러자 제갈수광이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길초량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화살도 무림맹의 재산이다. 낭비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 이보쇼! 가르쳐보지도 않고 그렇게까지 무시하기요?
“컥!”
길초량도 충격 받았다는 표정이다.
제갈수광이 특유의 사무적인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실전에서 화살을 낭비하지 않을 수준까지 배우겠다는 각오가 있다면 가르쳐 주지. 귀찮지만 내게는 배우겠다는 관도들을 가르쳐야할 책무가 있긴 하니까.”
교관으로서의 책무 핑계를 대고는 있으나, 이 인간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다. 마음이 없으면 애초에 저런 말도 안 할 사람이다.
길초량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담겨갈 때쯤,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어느 정도 가르쳐봤는데도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바로 손 뗄 거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저 가차 없는 발언은 진심일 것이다.
즉, 한 번 배울 때 최선을 다해서 배우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길초량이 말했다.
“일전에 조별 파견 임무 때 동부지맹의 궁술 수련장에 들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쪽 무사님들이 궁술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조원들을 보더니 재미삼아 쏴 보라고 하시더군요. 조원들 중에 한두 명은 나름 봐줄만한 수준이었는데, 대부분의 조원들은 초보 수준이라 웃음거리만 됐습니다.”
제갈수광이 안 봐도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요즘은 궁술을 제대로 배우려는 관도들이 거의 없으니 결과도 저럴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다.
길초량이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지막에 송유하 소저가 나섰는데, 송 소저도 처음 한 발은 과녁의 가장자리에 꽂았습니다. 무사님들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는데, 이후에 송 소저가 연이어서 화살을 날릴수록 궁술 수련장이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넓은 수련장 전체에 정적이 흐를 정도였습니다.”
송유하 얘기가 나오니 관심이 동한다.
얼른 그에게 물었다.
“누이가 뭘 어쨌기에······?”
“송 소저가 과녁의 중단에 화살로 한 일자[一]를 만들었던 것이오. 반듯한 일자였던 데다가 화살이 꽂힌 간격도 일정했소. 아직도 그때 송 소저가 보였던 위엄이 잊히지가 않소. 당시의 송 소저는 선녀 같았소. 물론 송 소저가 마지막 화살을 제대로 꽂아 넣은 순간에는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오오.”
송유하가 궁술을 제법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그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내 누이가 그런 대단한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를 들으니 왠지 내가 다 뿌듯하다.
제갈수광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길초량이 제갈수광에게 물었다.
“송 소저의 궁술을 교관님이 지도하고 계신다니 여쭙는 건데, 그 정도 실력이면 실전에서도 쓸 수 있겠지요?”
“당연히 실전에서도 통하는 수준이다. 현재 송유하는 움직이는 목표물도 칠 할 정도는 맞히고, 본인이 움직이면서 고정된 과녁을 맞힐 때도 비슷한 결과를 낸다. 둘 다 움직이는 경우의 적중도도 오 할 이상은 되고.”
길초량의 눈동자에 놀람이 담겼다. 당연히 나도 놀랐다.
“참고삼아 말해주자면 적어도 궁술에 한해서는, 송유하 걔는 그냥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보면 된다. 내가 지금껏 잠룡관에서 봐 왔던 그 어떤 궁술 재능과도 비교가 안 돼. 거기에 더해서 송유하는 노력까지 열심히 하지.”
제갈수광이 그 말을 남기더니 우리의 곁을 벗어났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재능과 노력과 좋은 스승.
송유하의 궁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데에는 그 삼박자가 잘 갖춰진 이유도 크겠지만,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성취가 상승하고 있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실력만으로도 제갈수광한테서 극찬을 듣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 두 무공의 성취도 올라갈 테니 더욱 기대가 된다.
커다란 해적선의 이곳저곳이 활활 불타고 있다.
해적들 대부분이 도주한 후, 우리가 선실 아래에 내려가서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우리도 해적선을 벗어나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불타는 해적선 옆에서 잠시의 휴식이 주어졌다.
제갈수광이 관도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잘 해주었다.”
제갈수광의 칭찬에 관도들이 미소를 짓자, 노인들 중에서 첫째인 원을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나도 칭찬하고 싶구나. 너희들 모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싸워줬다.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너희들이 괜히 이 조에 선발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두 노인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원을태와 탕유심의 시선은 단목강에게 조금 더 오래 머물렀고, 촉홍결의 시선은 추소륵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각각 선봉과 후미에서 같이 싸운 관도들이기에 실력을 볼 기회도 더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단목강과 추소륵은 실전에서도 주어진 역할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실력자들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대선배들에게서 칭찬을 들어서인지 관도들의 표정도 더욱 밝아졌다.
그냥 대선배들도 아니고 신룡대 출신의 대선배들이다. 그런 이들에게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뿌듯한 것이다.
물론 저 칭찬의 가장 큰 목적은 사기 진작에 있다.
애들은 원래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 더 열심히 하는 법이거든.
“알다시피 다른 해적선 한 척은 해안에서 멀어진 상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지상전을 지원한다. 아까도 말했듯 지상전이 펼쳐지고 있는 전장으로 합류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치를 것이다.”
관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우리가 손쉽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적들이 방심하고 있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이런 식의 작전이 한동안 펼쳐지지 않았기에 해적들도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거현 주둔지에서 진욱상을 통해 들었는데, 동부지맹 측에서도 초창기에는 정예 무인들을 동원하여 이런 식의 작전들을 펼쳤던 모양이다. 초창기에는 통했으나, 해적들이 대처를 하면서부터는 위험성 때문에 자제했었다고 한다.
“방금 전의 승리에 너무 도취되지는 말라는 뜻이다. 해적들의 주 전력은 어디까지나 지상을 공격하러 나간 전력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연히 그쪽의 숫자가 더 많고 기본적인 전투력도 강할 수밖에 없다. 강자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부터가 더 위험하고 어려운 싸움이다.”
관도들이 각오가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배가 불타는 것을 보고 적도들이 이쪽으로 복귀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갑자기 적과 마주칠 수도 있으며 자칫 방심하면 포위당할 수도 있다. 이동시에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한다.”
관도들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
육지 안쪽으로 달리는 와중에 일차적으로 백여 명의 해적 무리와 마주쳤다.
대부분이 이류 수준이었는데, 확실히 해적선에 남아 있던 적도들보다 강했다. 휘두르는 도에 담긴 힘 자체가 아까 상대했던 적도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관도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주지하고 있는 상태라, 큰 위험 상황 없이 대부분의 해적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소수의 해적들은 이리저리 도망쳤는데, 이미 멀어진 적도들까지 굳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전장을 향해 신법을 펼치던 중에 선두에서 달리던 세 노인과 제갈수광이 속도를 줄였다.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의 전방에서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척들이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갈수광의 양 눈썹 사이가 좁혀지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전에 마주쳤던 적들에 비해 기세가 훨씬 강력하다. 게다가 숫자도 많다.
백 명? 아니, 백오십 명은 충분히 될 것 같다.
일류고수의 기운들이 매우 많고, 절정고수로 여겨지는 기운들도 여럿 있다. 해적을 가장한 사파 놈들 다수가 섞여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갈수광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전원, 신속하게 나를 따른다.”
아무리 우리 조의 전력이 강하다 해도 총원이 열일곱 명뿐이다. 이 인원만으로 저런 실력자들 다수와 정면으로 맞서는 건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제갈수광이 매우 빠른 속도로 측방을 향해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고, 관도들도 신속하게 그 뒤를 따랐다.
이동 방향을 우측으로 튼 우리 조는 크게 돌며 또다시 내륙 쪽으로 향했다.
적들도 방향을 바꿔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우리 쪽의 인원이 많지 않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적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할 때쯤,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 쪽에서 또다시 적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대충 파악하기로도 백 명은 충분히 넘는 듯했다. 그들의 수준 또한 우리를 추격하는 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파 놈들 다수가 섞여 있는 것이다.
제갈수광의 눈동자에 고민이 담겨 있는 게 보인다.
고민의 이유도 알 것 같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피하려면 다시금 측면으로 방향을 틀어 멀리 돌아가야 한다. 한데 그 경우라고 해서 또 다른 적도들과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차피 이번에 출몰한 해적들이 배를 두 척만 동원했을 리는 없다. 근처의 다른 해안가에 상륙한 해적들도 있을 것이다.
정면의 적들마저 추격조로 합류한 상황에서 또 다른 적도들과 마주치면 일이 커질 게 빤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면의 적들을 돌파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저들을 돌파하는 동안 시간이 끌릴 테고, 그러면 우리를 추격해왔던 자들이 합류하게 될 테니까.
이윽고 제갈수광이 노인들에게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돌파합니다. 노선배님들이 선봉에서 길을 열어 주십시오.”
노인들이 각오가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수광이 이번에는 교관들을 향해 서둘러 말했다.
“장 교관과 이 교관이 중진, 차 교관이 후미를 맡아 주시오.”
“예!”
이어서 제갈수광이 관도들에게 말했다.
“돌파 시에는 후미도 매우 중요하다. 추소륵과 단목강이 차 교관을 도와 후미를 맡는다.”
“예!”
단목강과 추소륵이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이번에는 나와 길초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유겸과 길초량은 나와 함께 선봉의 후열에 선다. 너희 둘은 길이 더 빨리 뚫릴 수 있게끔 암기로 선배님들을 지원한다.”
“예!”
언급된 우리가 동시에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관도들 전체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긴장하지 마라. 너희들은 강하다. 차분하게 대처하면 충분히 뚫고도 남는다. 그럼 가지.”
제갈수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정면을 향해 나는 듯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