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42
우리는 여드레 동안 부지런히 달려 복건의 장악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악현은 복건의 성도인 복주의 지현으로, 해안에 닿아 있는 현이다. 남쪽에는 복청현이 있고 그 남쪽에 포전현이 있다.
인근에 있는 복청현의 산지에도 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무림맹의 주둔지가 있는데, 우리는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우리가 앞두고 있는 작전이 최고 기밀에 해당하는 사안이기에, 아군에게마저 우리의 행적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모양이다.
아마도 장악현의 해안에서 출발한 후, 해로를 우회해서 해적들의 본거지로 향하려는 계획인 것 같다.
대놓고 포전현의 해안에서 출발하면 적들의 이목에 더 빨리 발각될 게 빤하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장악현의 얕은 산지 아래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은 폐허나 다름없었으며, 가옥들도 반 이상이 불에 탄 모습이었다.
해적들의 침략이 있었던 모양인데, 당연히 주민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해적들에게 죽었거나, 살아남았다 해도 피난을 갔을 것이다.
그나마도 주민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오면서 보니 뒷산 쪽에 봉분 여러 개가 있었다.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는 봉분들로 보였는데, 아마도 나중에 이곳에 들렀던 무인들 내지는 관인들이 사후 처리를 해둔 모양이다.
기동타격조는 이 마을에서 무림맹의 타격대를 기다린다고 한다.
때문에 조원들 몇 사람은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해 나갔고, 남은 인원들이 폐가 몇 개를 신속하게 정리했다.
오전에 도착했는데, 대강의 정리를 마치고 나니 신시 정(오후 4시)이었다.
정리를 마친 후 대문 앞 길가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잠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추소륵이 다가왔다.
그가 가볍게 도약하여 내가 앉아 있는 가지에 오르더니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았다.
말없이 먼 곳을 응시하던 추소륵이 여전히 시선을 먼 곳에 둔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정월 열이렛날이구려. 지금쯤이면 잠룡관에는 신입 관도들이 들어왔겠지요. 작년에 육 년 차였던 나 같은 관도들은 이미 졸업을 했을 것이고.”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구려. 그럼 추 공자는 이제 잠룡관도가 아니신 거네? 졸업생 선배시네?”
기동타격조에 육 년 차는 세 명이었다.
북부지맹의 추소륵과 남군호, 동부지맹의 종금무다.
“하하. 졸업생 선배라니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졸업장을 받은 게 아니니 아직은 잠룡관도요.”
추소륵의 표정과 어조에서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다.
“졸업할 생각 하니 아쉬우시오?”
내가 묻자 추소륵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재학 중일 때는 빨리 졸업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아쉬운 마음이 더 크구려. 한 일 년 정도만 더 관도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오.”
“추 공자는 소림 출신이시니 잠룡관 생활을 하는 중에도 관도들에게 여러모로 시달렸을 것 같은데. 그래서 빨리 졸업하고 싶었을 것 아니오. 그런데도 아쉽소?”
“물론 송 공자의 말마따나 관도들에게 시달리느라 여러모로 불편하긴 했었소. 귀찮아서 피해 다닌 적도 많았소. 한데 막상 이 시기가 되니 그 부분이 아쉽구려.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자유롭게 많은 관도들과 어울리며 추억을 쌓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드오.”
추소륵이 약간은 회한이 깃든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잠룡관에서는 오로지 문파와 집안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과, 통합 잠룡대전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소. 그 생각들만 하느라 너무 여유 없이 잠룡관 생활을 했소.”
저런 식의 정신적 압박감이라는 게 참,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한다.
나 또한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마음 정도는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정신적 압박감까지 느낄만한 환경에서 살진 않았다.
사부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그랬다.
나는 어차피 다섯째 제자였을 뿐이며, 천마의 무공을 전수받은 것도 아니었다. 같은 제자인데도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니, 성취에 대한 명확한 비교 대상도 없었다.
그저 사부님이 이끄는 대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수련했을 뿐이다. 내 성취가 상승하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면서.
하지만 대사형이었던 위지광 놈의 경우에는 상당한 압박감을 받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압박감은 특히 백도의 후기지수들이 많이들 느낄 수밖에 없다.
추소륵의 경우에는 더 많은 압박감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무려 백도를 상징하는 소림의 제자니까. 그냥 제자도 아니고 소림이 아끼는 제자니까.
추소륵이 말했다.
“그래서인지, 돌이켜 보니 육 년간이나 잠룡관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나눌 만한 친우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구려. 솔직히 말하면 같이 통합 잠룡대전에 참가했던 북부지맹의 관도들과도 크게 가깝지는 않았었소. 그나마도 기동타격조가 아니었으면 이런 관계들조차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추소륵이 워낙 재미없는 성격인 탓도 있다. 얘는 인세에 보기 드문 바른 생활 청년이다. 심지어는 농담 같은 것도 거의 하지 않는다. 늘 조용하고 진지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소림의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소림에서 한 일이라고는 불경 외우고 무공 수련한 게 전부였을 테니까.
먼 곳을 바라보며 말하던 추소륵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선지 송 공자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드오.”
“엥?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오?”
“송 공자에게는 편하게 지내는 친우들이 많잖소. 같이 수련하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조장님도 송 공자를 각별하게 여기는 것 같고, 길 공자와는 옥신각신하며 지낼 정도로 친하시고. 친우는 아니지만 제갈 교관님도 송 공자를 아끼시는 것 같더구려. 그분이 누군가를 타박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없으신데, 오직 송 공자에게만 그러시는 걸 보면.”
가족인 송유하를 제외하고 나와 가장 친한 사람들의 명단이 다 나왔다.
“그 외에 기동타격조의 다른 조원들도 모두 송 공자와 스스럼없이 어울리잖소. 내 경우에는 같은 북부 잠룡관 소속인데도 악 소저나 모용 소저 앞에서는 말도 잘 못 하겠던데, 송 공자는 그분들과도 아주 편하게 대화하시고.”
아, 그건 네가 걔들이 미인이라고 너무 긴장해서 그래.
다른 여자들 앞에서도 그러는 거면 네가 그쪽으로 지나치게 순진한 거고.
아무튼 얘가 왜 잠룡관 졸업을 아쉬워하는지는 잘 알겠다.
추소륵에게 말했다.
“사실 나도 인간관계 면에서 자신이 있거나 하지는 않소. 그냥 어찌어찌 엮이고 어울리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오. 아시다시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 애초에 인간관계에 대해 자신 있어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추소륵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친밀해지기까지의 시간이 짧게 걸리는 관계도 있고 오래 걸리는 관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짧게 걸리든 오래 걸리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소. 서로가 믿을 수 있는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면 결국 친해질 거고, 그렇지 않다면 적당한 간격에서 멈추게 되겠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추 공자가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이시라 다들 살갑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가 볼 때 우리 조원들은 다들 추 공자를 신뢰하고 있소. 때때로 말보다 행동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곤 하는데, 추 공자는 단체 생활 시에도 그렇고 전투 시에도 그렇고, 항상 말없이 더 많이 움직이며 조원들을 배려하잖소. 그걸 우리 조원들이 모를 리가 없소.”
다시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살갑게 지내는 관계에 대해서 너무 조바심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소. 인생 아직 많이 남았잖소. 물론 우리가 제 명에 죽을 수 있는 복을 누릴 경우에 한해서겠지만.”
내가 씩 웃으며 말을 마치자 추소륵이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에 추소륵이 말했다.
“조언 고맙소.”
“조언은 무슨. 나는 그런 거 해줄 주제가 못 되오. 그냥 참고하시라는 의미로 말씀드린 것뿐이오.”
“이렇듯 송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잠룡관을 졸업할 때보다 기동타격조의 임무가 끝날 때 더 아쉬워질 것 같구려. 임무가 끝나고 헤어지고 나면 만나기도 어려워질 테니까.”
“나는 집안의 차남이라 가문에서 독립할 준비를 이미 하고 있소. 잠룡관 졸업과 동시에 완전히 독립할 생각인데, 거처는 장강의 뱃길이 닿는 남창이나 포양호 인근으로 생각 중이오. 지인들이 편하게 와서 머물다 갈 수 있게끔. 무창의 무림맹과도 뱃길로 연결되니 나름 편리하기도 할 테고.”
의도를 갖고 말한 건데, 녀석이 반색하고 있다.
“오오! 그러면 나도 찾아가도 되오?”
“당연하지요. 추 공자는 지인을 넘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인데.”
내가 흔쾌히 대꾸했기 때문인지 녀석의 표정이 환해졌다.
“거처가 결정되면 내게도 꼭 알려주시오.”
“알겠소. 일단 기동타격조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동부지맹 잠룡관 쪽으로 종종 전서를 보내주시오. 조장님한테든, 나한테든. 그래야 내가 나중에 거처 알려드리기도 편하겠지요.”
“알겠소. 꼭 그리하리다.”
추소륵의 눈빛에 각오가 담겨 있었다.
녀석도 내 실력을 알고 있으니, 나와의 친분을 계속 이어가고 싶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도 추소륵은 중요한 인물이다.
언젠가 다가올 천마신교와의 일전을 위해서다.
나는 그간 명문세가 쪽과는 많은 관계들을 쌓았는데, 상대적으로 명문거파 쪽과는 그러지 못했다.
한데 추소륵은 소림의 제자다.
문파들 사이에서 소림이 차지하는 지위와 상징성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소림이 움직이면 다른 명문들도 움직일 공산이 높아진다. 그게 소림이 갖고 있는 힘이다.
추소륵은 속가제자라서 소림의 방장이 될 수는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소림 내의 다른 중요한 직책 정도는 맡게 될 것이다. 그는 실력이 뛰어난 만큼, 입김도 세게 내뱉을 수 있다.
문파든 세가든 원래 소속 고수의 말은 중시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 또한 추소륵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더 가깝게 가져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억지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한데 알아서 저렇게 다가와 주겠다고 한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내 입장에서는 좋지, 뭐.
* * *
마을 외곽의 경계 지점은 세 곳이며, 경계조도 세 조다.
일(一) 지점과 이(二) 지점은 마을 뒷산에 있고, 삼(三) 지점은 마을 어귀 쪽에 있다.
경계조는 한 조에 두 명씩으로, 어른 한 명과 관도 한 명으로 짝을 지어 교대로 경계 근무에 투입하기로 했다.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경계 근무를 교대해주기 위해 근무지로 향했다.
이번 근무에서 나와 한 조를 맡게 된 어른은 여교관 이세옥이며, 우리의 근무지는 마을 뒷산에 있는 이(二) 지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묘시 정(오전 6시)까지 경계를 서야 한다.
근무지를 향해 함께 달리는 와중에 이세옥이 전음을 보내왔다.
[유겸이, 잠은 잘 자뒀어?]
[예. 교관님도 푹 쉬셨죠?]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이세옥이 잠시 말없이 달리다가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음······ 뭔가, 나 스스로 정신을 좀 바짝 차려야겠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너랑 같이 근무를 선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모르게 안도감부터 들어서 말이야. 네가 워낙 알아서 잘 하는 아이라는 걸 아니까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거지. 그래도 내가 교관이고 보호잔데,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지. 이래선 안 되지.]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세옥은 다른 말을 더 붙이려는 느낌이었는데, 그냥 입을 닫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궁금하긴 한데, 굳이 묻지 말자.
우리는 곧 근무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탈 아래쪽의 시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다.
우리가 도착하자 두 사람이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원을태와 길초량이었다.
두 사람과 교대해준 후, 우리도 나무 위로 올라가서 근무를 서기 시작했다.
말없이 근무하며 일다경 정도가 흘렀을까?
고요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이세옥이 전음을 보내왔다.
[그때 말이야. 네가 그 곰 같은 사내에게서 초량이의 앞을 막아섰을 때, 그 앞을 막아선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어.]
내가 덩치 놈에게서 길초량을 막아섰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때 이세옥도 우리 쪽에서 같이 싸우고 있었다.
아까 오던 길에 꺼내려다 말았던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나 보다.
[내가 암기술을 익혔다 보니, 위험해지면 내 몸부터 빼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어. 어려서부터 계속 그렇게 수련을 해왔거든. 그래서 큰 위험을 느끼자마자 습관적으로 몸이 알아서 그렇게 반응을 했던 거지.]
이세옥의 전음이 이어졌다.
[반응을 한 후에 ‘아차’ 싶었어. 내가 교관인데.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내가 초량이의 앞을 막아서야 하는 건데. 하지만 그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어. 내가 다시 초량이의 앞을 막아서기에는······.]
자책이 담긴 어조였다.
물론 나는 당시의 이세옥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이해한다.
암기술을 익힌 사람들은 실제로도 위험에 그런 식으로 대처하게끔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이세옥이 아무리 교관이라도 실전 경험이 풍부할 리 없다. 때문에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가슴이 철렁한 순간에 네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오더니 초량이의 앞을 막아섰던 거야. 그리고 네가 나 대신 죽었지. 물론 너는 살아있지만, 적어도 나는 심정적으로, 네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이고 있어. 나 때문에 제자 하나가 죽은 거라고.]
이세옥의 전음이 바로 이어졌다.
[물론 그 일로 누구도 나를 탓하거나 나무란 사람은 없었어. 노선배님들도 다른 교관님들도······. 하지만 나는 그 후로 계속 스스로를 자책하며 지내야 했어. 이래서 무슨 교관이냐며. 교관 자격도 없다며······. 유겸이 너한테······ 너무 미안했거든.]
거기까지 말한 이세옥이 잠시 조용히 있더니, 이윽고 빙그레 웃으며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아, 푸념하려고 이런 말들을 하는 건 아니야. 이제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앞으로 다시는 제자들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를.]
과연 눈동자에도 각오가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애들한테는 몰라도, 적어도 너한테는 직접 이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이세옥이 말을 마쳤다.
그녀에게 대꾸했다.
[저는 그때, 안 죽을 자신이 있었기에 나섰던 겁니다. 교관님도 보셨겠지만 제가 좀 빠르거든요. 어느 정도 다치는 건 각오했는데, 실제로도 다치기는 했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저 또한 그 일로 교관님을 탓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교관님도 괜히 그 일 때문에 제게 미안한 감정 같은 거 안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세옥이 살짝 일렁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널 보면 종종 나보다 더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전생의 나이까지 합하면 실제로도 내가 이세옥보다 나이가 더 많긴 하다. 가뜩이나 전생의 나는 어른 중에서도 상 어른인 우리 사부님을 상대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하하. 제가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는 가끔 듣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말없이 근무를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절정에 오른 청력에 미세한 소리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발걸음이 산을 올라오고 있는데, 방향을 보니 고지를 넘어 마을 쪽으로 향하려는 듯했다. 게다가 경로가 마침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쳐가는 경로다.
이세옥이 빠르게 수신호를 보내왔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라는 수신호 이후에, 위험할 것 같으면 즉시 마을을 향해 달리자는 수신호가 이어졌다.
사실, 이 시기에 누군가가 이쪽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면, 웬만해서는 무림맹의 타격대로 소집된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닐 가능성도 있기에 이세옥이 저러한 수신호를 보낸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준 후, 다가오는 기척들에 집중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보니 전해지는 정보의 양도 많아지고 있다.
일단 인원은 열댓 명가량으로, 단체로 신법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매우 빨랐다. 저 인원들이 신법을 펼치고 있는데도 소음이 별로 없으며, 드러난 기척도 미세하다.
고수들인 것이다.
하나하나가 최소한 절정고수 이상이다.
최소한이 그러하니, 실제로는 더한 고수들이 존재할 가능성도 크다.
이후에는 기운의 종류에 집중했는데, 예상대로 백도인들의 기운이었다.
마을 쪽으로 도망갈 필요가 없어졌기에, 우리는 그대로 나무 위에 머물렀다.
이윽고 열댓 명의 인원들이 시야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열여섯 명이다.
모두가 흑의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도 검게 칠한 죽립을 쓰고 있었다. 야행을 위한 복장이다.
아, 우리도 흑의를 입고 죽립을 쓰고는 있는데, 저들처럼 검게 칠한 죽립이 아니라 평범한 죽립이다.
고지에 오른 열여섯 명의 인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우리가 숨어 있는 나무에서 다섯 장쯤 떨어진 거리였다.
그중에서 선두에 있던 자가 정확히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마도 그가 수장인 모양이다.
“낙천.”
그러자마자 이세옥이 대꾸했다.
“안강.”
암구어다.
대꾸한 이세옥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합양.”
그러자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대꾸했다.
“흥평.”
두 사람이 말한 네 개의 단어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말들은 아니고, 그저 섬서 땅에 있는 지명들이다. 오늘의 암구어는 섬서 땅에 있는 수많은 지명들 중에서 딱 저 네 개의 지명만을 제대로 주고받아야 한다.
서로 정확한 암구어를 댔으니 이세옥이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도 그녀의 옆에 착지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고생들이 많으시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세옥이 대꾸하자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일단 우리는 마을로 가서 그쪽 지휘관을 만나겠소. 인사는 나중에 나눕시다.”
“예.”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마을을 향해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머지 인원들도 즉시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이 사라져 간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아냈다.
‘태무엽······.’
그렇다.
내가 알고 있기로 신룡대 황룡조의 조장인, 바로 그 태무엽이다.
일 년여 전에 옥산의 무원객잔에 길초량과 함께 앉아 있었던, 바로 그다.
그때와는 다른 얼굴이지만, 체형과 골격 등은 딱 그 당시의 모습이었다. 당시에 눈여겨봐 놨기에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