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44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보니 사시 정(오전 10시)쯤인 듯했다.
내가 잠들었던 시각이 진시 초(오전 7시)경이었으니, 겨우 한 시진 반 정도만 잠들었다가 일어난 것이다.
잠이 살짝 부족한 감은 있으나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절정에 오른 효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다음 근무는 오늘의 전반야 근무다. 자정 남짓에는 돌아와서 수면을 취하게 될 테니 그때 좀 더 푹 자는 게 낫다.
근무 시간이 들쑥날쑥한 이런 조건이라도 최대한 일과 시간에 맞춰서 깨어 있는 게 장기적으로도 좋다.
측간에 가는데 멀리로 길초량의 모습이 보였다.
밭두렁 옆에서 초식 수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측간에 다녀온 후, 흙담의 뒤에 서서 무너진 틈 사이로 길초량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초량이 수련하는 장소 자체가 큰 나무의 옆이다. 그리고 지난밤에 마침 신룡대의 황룡조가 합류한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정황적으로 의심되는 면이 있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길초량이 초식을 수련하고 있는 모습 정도로만 보이겠지만, 나는 그가 신룡대라고 믿고 있는 입장이기에 이런 의심도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내가 흑풍대원이었을 당시에도 수많은 방식으로 누군가와 접선했던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당시의 감 같은 게 작용한 것도 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내 감이 맞는지나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한동안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나무 위에서 미세한 기척의 움직임이 잡힌 순간, 나는 곧바로 천섬무를 운용하며 안법을 최대한으로 가동했다.
하나의 인영이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다.
그가 근처에 있는 덤불 속으로 착지하더니 즉시 밭두렁 아래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잠깐의 과정 중에도 기척이 매우 미세했을 뿐만 아니라, 속도마저도 바람처럼 빨랐다.
은신 기술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천섬무를 운용하여 안력을 돋웠던 상태다.
사라진 인영이 누군지도 당연히 봤다.
역시나 태무엽이었다.
웃음이 나온다.
길초량은 아마도 태무엽에게 기동타격조에 대해 보고했을 것이다.
노인들과 교관들에 대한 내용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도들에 대한 내용은 확실하게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관도들 중에서도 나에 관련된 사항은 특히 자세하게 물어봤을 가능성이 높다.
태무엽 정도 되면 내가 태화지부 사건과 장강 사건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 텐데, 마침 길초량이 기동타격조에서 나와 함께 싸웠기 때문이다.
길초량은 일개 대원의 입장이라, 상관인 태무엽에게 최대한 정확하게 보고할 수밖에 없다. 나도 같은 업계에 있었기에 그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태무엽이 떠난 후, 길초량은 나무에 기댄 채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짜식이 그래도 양심의 가책 비슷한 걸 느끼는 모양이네.
괜찮아, 인마. 형이 이해해줄게.
어차피 네가 본 게 전부가 아니기도 하고.
그즈음 뒤쪽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기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제갈수광이 눈매를 찡그린 채로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중이다.
“거기서 뭐 하나?”
“아하. 아하하. 명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뭐? 명상을 해? 굳이 무너진 담장의 틈 사이로 길초량을 보면서?”
“아하하하. 실은 길 형이 초식 수련하는 모습이 참 멋져 보여서요. 대놓고 보기는 좀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제갈수광은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어색한 미소를 보이자 제갈수광이 말했다.
“너는 이 자식아, 전령이라는 놈이 지휘관 방 정리 같은 건 아예 손 놓은 거야?”
다행히 더 이상 꼬치꼬치 묻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하하. 안 그래도 지금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곧바로 그렇게 대꾸해주며 제갈수광이 머무는 사랑채 쪽으로 향했다.
제갈수광이 내 뒤를 따라오며 투덜거렸다.
“이 자식이 빠져 가지고선.”
제갈수광의 방에 들어서자 그도 내 뒤를 따라 들어섰다.
빠르게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런데 교관님.”
“뭐.”
“지난밤에 도착한 인원들 말인데요. 신룡댑니까?”
“어.”
질문한 내 쪽에서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번 물어봤던 것뿐이다.
당연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거 묻는다는 식의 핀잔이나 들을 줄 알았는데, 저 인간이 저렇게 간단하게 대꾸해줄 줄이야.
“왜 인마. 물어본 거 대답해줬더니 왜 네 쪽에서 놀라?”
“아니······, 그래도 신룡대인데 정체를 그렇게 쉽게 확인해주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왠지 신룡대는 정체조차도 기밀 사항으로 취급되고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자 제갈수광이 특유의 사무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지금 우리가 참여한 작전 자체가 극비인데, 그런 작전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는 동료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싸워야 할 것 아냐?”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어차피 신룡대는 이번 작전이 끝나면 다른 신분으로 살아갈 테니 우리가 다시 볼 일도 없을걸?”
뭐, 그건 나도 잘 알고.
이왕 내친김이니 하나를 더 물었다.
“하면 저들은 청, 적, 황, 백, 묵 중에서 무슨 좁니까?”
황룡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확인을 겸해서 한번 물어본 것이다.
“지난밤에 물어봤더니 황룡조라고 하더군.”
“오, 그쪽에서 그런 것까지 순순히 알려줬나 보군요.”
“아니, 처음에는 안 알려주려고 하더군. 그래서 무슨 조인지 정도도 안 알려줄 거면 우리도 협조 안 하고 그냥 철수한다고 했지.”
아, 협박을 하셨다?
“그쯤 되니 알려주더군. 그것도 안 통하면 맹주님한테 전서 날린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 맹주한테 이를 생각까지 하셨다?
어쨌거나 신룡대를 상대로 협박 비슷한 것까지 하다니.
이 인간은 역시 보통이 아닌 인간이다.
그래서 든든한 거고.
정리를 하며 제갈수광에게 다시 물었다.
“이번 작전에는 무림맹 측에서 몇 명이나 투입되는 겁니까?”
“이 자식이 오늘따라 궁금한 게 왜 그렇게 많아?”
“이렇게 중요한 작전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는 동료가 몇 명인지 정도는 알고 싸워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갈수광이 했던 말을 인용해서 얘기하자, 그가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정예 무인들로 사오백 명쯤 될 거다.”
“대강 어떤 사람들이 함께하는 겁니까?”
“천지인대에서 일부가 올 거고, 이번 사안 때문에 결성된 정혼대에서도 올 거다.”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본맹에 소속된 일반 무인들은 대부분 백위단에 속한다. 동부지맹의 일반 무력편제인 동위단과 비슷한 개념이다.
동부지맹 동위단의 무인들이 실력을 키워서 정예 무력편제인 동검대에 속하고 싶어 하듯, 본맹 백위단의 무인들도 실력을 키워서 천지인대에 차출되고 싶어 한다. 무림맹을 대표하는 정예 무력편제가 바로 천지인대이기 때문이다.
삼재의 개념인 천지인을 적용하여 명칭을 붙였고, 각각의 명칭은 천무대, 지협대, 인의대다.
합쳐서 천지인대라고 부르는 건데, 당연히 천무대 쪽으로 갈수록 최정예다.
즉, 천무대는 무림맹을 상징하는 양지의 최정예 무력 조직이며, 신룡대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맹주 직속의 최정예 기밀 임무 수행 조직인 것이다.
제갈수광이 다음에 언급한 정혼대는 무림맹의 임시 무력 조직이다.
전력이 필요한 사안일 경우, 무림맹에서는 맹에 소속된 각 문파와 세가들에게 고수의 파견을 요청할 수 있다. 사안에 따라 요청하는 고수의 수도 달라진다.
그게 바로 정혼대다.
* * *
신룡대의 황룡조는 마을에 붙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어두울 때 조용히 마을을 벗어났다가 어느샌가 복귀해 있곤 했다.
기동타격조는 계속해서 경계 근무에 투입되었다. 이번 작전에서 우리의 주된 역할은 지원인데, 경계 근무도 그러한 지원 역할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나흘이 지났다.
제갈수광의 말마따나 그동안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정혼대가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우리 거주지에 찾아와서 관도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조원들이 속한 문파나 세가는 명문들이라, 그쪽에서도 고수들 몇 명씩을 정혼대에 파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불려가서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한 여파다.
기동타격조의 조원들은 전우이자 친우이기도 하니, 조원들의 지인들이 나를 보고 싶다고 하면 그냥 가서 인사해주었다.
우리 조원들은 내 입장에서도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럴 때 그들의 체면 정도는 살려줄 필요가 있다.
정혼대가 도착한 이후에는 천지인대 중에서 지협대와 인의대가 도착했다.
천무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여든 인원들의 수가 이미 사백 명에 달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의 저녁 무렵에는 천무대가 도착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저녁 식사 후에 간단하게 제갈수광의 방을 정리했다.
내가 정리하고 있는 동안 제갈수광은 침낭 위에 누워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나는 억지로 그의 의복 같은 것을 세게 팍팍 털어가며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먼지 나, 이 자식아.”
“제가 청소하는 동안에는 교관님이 참으셔야죠. 지금 청소하는 사람 따로 있고 노는 분이 따로 계시는 상황이니까.”
“에휴, 저 웬수.”
제갈수광이 옆으로 돌아누웠을 때쯤, 밖에서 장호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갈 교관님, 계십니까?”
“아, 들어오시오.”
곧 장호산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을 대동한 채였다.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사내다.
한데 내가 아는 인물들과 닮았다는 게 확 느껴진다.
게다가 그는 천마신교의 정보에 용모파기까지 아주 잘 나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제갈수광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갈 형님.”
제갈수광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이게 누구야? 묵이, 오랜만이네?”
제갈수광의 대꾸처럼 그의 이름은 ‘묵’이다.
그리고 그의 성은 남궁이다.
즉, 그는 남궁찬의 동생이자 남궁설의 오라비인 남궁묵이다.
남궁묵이 제갈수광에게 말했다.
“형님이 기동타격조의 지휘관이시라고 들어서 인사를 드리러 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요 앞에서 장 선배와 만나서 함께 온 겁니다.”
교관인 장호산을 장 선배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동부지맹 잠룡관에 다니던 시기에 서로 선후배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그랬군. 그렇지 않아도 천무대가 합류한다기에 묵이 너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했다. 그동안 네가 이쪽 해안에 파견되어 있었다고 들어서.”
“예. 천무대의 저희 조는 광동과 복건을 오가며 전투를 지원하는 중이었습니다.”
남궁묵이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이 자리에서 나름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 같은 관도가 들어도 되는 건지 염려하는 기색이다.
남궁묵의 기색을 눈치챈 제갈수광이 말했다.
“아,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자리겠군. 송유겸, 인사해라. 이쪽은 남궁묵 아우로, 남궁세가주님의 둘째 아들이다. 즉, 네가 아는 찬이의 친동생이지.”
이에 나는 남궁묵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남궁 선배님. 동부지맹 잠룡관의 후배인 송유겸이라 합니다.”
“송유겸? 그럼 얘가 바로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인 그······.”
남궁묵이 그렇게 말하며 장호산을 바라보자 장호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아. 우리 동부지맹 잠룡관의 보배지. 네 형과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말에 남궁묵이 반색하며 내게 말했다.
“오호! 그게 너였구나? 나는 남궁묵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동부지맹에서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가 나왔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동부지맹 잠룡관으로 따지면 내 다음 우승자가 너인 거거든. 그래서인지 더 반갑네?”
“선배님에 대한 말씀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남궁묵에게 말했다.
“얘는 내 전령이기도 해. 네 형과도 이미 친분이 있고, 아마 통합 잠룡대전 당시에 네 부친에게도 인사를 드렸을 거야.”
제갈수광이 장우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는 장호산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장호산은 장우혜가 남궁설이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 말을 들은 남궁묵이 더 환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호! 우리 형하고도 이미 친분이 있고 우리 아버지까지 뵀다고? 그 말까지 들으니 더 반갑네?”
당신 누이와는 더 친하다오.
“하핫. 저도 그렇습니다.”
“이 작전을 마칠 때까지는 계속 보게 될 텐데, 그 기간 동안 잘 지내보자.”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딱히 자리를 피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도 그냥 제갈수광의 방에 눌러앉았다.
남궁묵이 속한 조는 천무대의 사 조라고 한다.
그는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무대에서 역량을 크게 인정받고 있는 모양이다.
형인 남궁찬은 동부지맹의 요직에 있고, 동생인 남궁묵은 무림맹의 최정예 전투 조직에서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역시 천하제일세가의 혈통들답다.
들어보니 천무대에서는 세 개 조의 오십 명가량이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들까지 더하면 지금까지 모인 무림맹의 정예들은 사백오십 명에 달한다.
* * *
다음 날 낮에는 각 무력조직의 수뇌부들이 모여서 장시간 동안 회의를 했다. 수뇌부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휴식 지시가 떨어졌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각 조직들이 순차적으로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기동타격조도 정혼대와 함께 맨 마지막에 마을을 벗어났다.
드디어 해적들의 본거지를 치기 위한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