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55
은신술을 이용하여 완전히 기척을 죽인 채로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회회심공은 이런 식으로 활동할 때에도 유리한 면이 많다.
정종 내공을 익힌 백도인들의 경우, 은신하려면 기척을 죽임과 동시에 내공이 띠고 있는 정기(正氣)를 지우는 과정도 병행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파인들은 사기(邪氣)를, 천마신교인들은 마기(魔氣)를 지워야 한다.
그러나 회회심공은 무속성이기에 내공이 띠고 있는 성질을 지울 필요가 없다. 무속성인 만큼, 내 기척은 사물이나 자연으로 인식되기도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회심공으로 절정에 오른 내가 마음먹고 제대로 기척을 죽일 경우, 웬만한 경지의 무인이 아니면 내 존재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지금처럼 어두운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식으로 잠시 숨어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 입구 방향으로 다가오는 두 개의 미세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이동하던 두 개의 기척이 그쪽 입구 근처에서 멈췄다.
약간 멀긴 하나, 익숙한 기척들이라서 정체도 파악할 수 있었다.
천무삼조의 조장인 서문걸과 황룡 태무엽이었다.
이쯤이면 두 사람도 이 안쪽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진법술에 걸려든 자들이 무림맹의 무인들이었다면, 저 두 사람이 저렇듯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저 안에 있는 이들은 확실히 비맹주 세력의 무인들인 모양이다.
잠시 후, 사파의 절정고수로 보이는 네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호흡을 극도로 미세하게 조절하며 현재의 위치에서 가만히 대기했다.
내가 지금 펼치고 있는 은신술에 스스로 자신이 있으나, 혹시라도 저들이 내 존재를 파악했다면 불시에 공격해 올 수가 있다. 때문에 언제든 반응할 수 있게끔 마음의 준비도 했다.
그런데 놈들은 내가 은신해 있는 곳의 바로 옆을 슬며시 지나갈 뿐이었다.
역시나 내 은신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놈들이 그냥 지나가게 두었다.
놈들이 진법술에 걸려 있는 비맹주 세력의 백도인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편 통로 쪽에 있는 서문걸과 태무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저 안에 있는 백도인들을 구해줄 생각이 없다.
구해줄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강호는 실전이라는 걸 저 등신들도 알아야지.
물론 알게 된 순간에 죽겠지만.
“크악!”
“으악!”
비명들이 연이어 들려오며, 그 많았던 백도인들의 기척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백도인들은 어차피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라, 사파 놈들의 입장에서는 일을 처리하기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이다.
참고로 서문걸과 태무엽 또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역시나 두 사람 또한 저들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백도인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들이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임무를 마친 사파의 절정고수 놈들이 철수하고 있다.
이번에도 내 바로 옆을 태연하게 지나가고 있다.
역시나 내 존재를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짜식들, 수고들이 많았다.
순간적으로 천섬무를 중하 단계로 운용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뒀던 독침 네 개를 가볍게 털어냈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다.
그런 만큼, 단 한 놈도 내 독침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에 즉시 먼 곳의 기척을 확인해 봤는데, 서문걸과 태무엽의 기척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도 서둘러 우리 인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와서 보니 아까의 혼란스러웠던 분위기가 대부분 수습된 모습들이었다.
그중에서 몇 명이 나를 흘겨보고 있다.
나한테 맞았던 사람들이다.
[우리 제자님의 기분이 무척이나 째져 보이는군. 선생을 패서 그런가 보지?]
제갈수광의 전음이었다.
비아냥거리는 어조다.
[헉! 패다니요? 기분이 째지다니요? 세상에,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까. 아까 그건 일종의 응급조치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교관님을 상대로 응급조치를 실행할 때는 공자님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했단 말입니다.]
[참회 같은 소리 한다. 나도 얼핏 봤을 때는 네놈이 그나마 표정 관리를 했던 것처럼 느꼈었지. 한데 이후에 기억이 나더군. 네놈의 눈이 분명히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 고매한 선의에 대한 모독이십니다. 일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 신조가 바로 군사부일체입니다. 평소에 교관님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 제자가 바로 접니다.]
[저 웬수는 진짜, 말이나 못해야지. 으휴.]
제갈수광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다른 사람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크윽, 송 혀어엉······.]
길초량의 목소리였다.
으르렁거리는 어조다.
[아, 길 형, 하하. 아까는 미안했소. 경황 중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은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는 급박함에······, 하하······.]
[마침 명분도 생겼겠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아주 그냥 신나게 주먹을 꽂아 넣으신 건 아니고?]
[허어!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소. 그때 나는 친우의 정신을 단번에, 확실하게 깨워줘야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응급조치를 취했던 것뿐이오.]
[정말이지 때린 것도 아주 기술적으로 때리셨더구려. 고통은 최고치로 주는데도 후유증은 안 남는 방식으로.]
[아, 그랬소? 나는 그냥 깨워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소.]
내가 끝까지 시치미를 떼자 길초량도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곧바로 내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송 형은 그 환영 속에서 어떻게 깨어나셨소? 들어보니 최초에 깨어난 분들은 제갈 교관님, 남궁묵 선배, 백룡조장님 등이었던 모양인데, 그분들 모두 송 형이 깨워줬다고 하던데.]
[후! 정신력의 경지가 높은 사람은 그깟 사술 따위에 쉽게 말려들지 않는 법이오. 길 형의 그 나약한 정신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큭! 내가 송 형한테서 정신력이 나약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닛! 이런 굴욕이······!]
그 직후에는 백룡의 전음이 들려왔다.
[유겸이, 이제는 알겠지? 백룡의 몸이라고 해서 딱히 무쇠 같은 거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기에 곧바로 대꾸해줬다.
[아하하······. 송구합니다. 제가 경황 중에 일단 더 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깨워야겠다는 생각만 앞섰나 봅니다.]
[주먹에 감정이 실려 있는 느낌이던데······. 혹시 나한테 악감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아하하,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면 그냥 애초에 여자한테도 가차 없는 성격일 뿐이다?]
[그, 그게 왜 그렇게 됩니······.]
대꾸하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백룡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방금 전에 내게 농담을 건넨 것임을 이제야 알아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백룡은 지금 나를 향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이 누님 좀 보게?
벌써부터 농담을 건네올 정도로 내게 친근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백룡이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어쨌든 아까 환영술 속에서 깨워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만에 하나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부드럽게 다뤄줘. 알겠지?]
농담조의 묘한 어조로 저 말을 하고 있다.
‘다뤄’달라는 저 표현도 일부러 쓴 것이다.
이 누님도 보통이 아닌데?
백룡조, 천무사조, 기동타격조가 다시금 어두운 통로 안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서너 명이 나란히 움직일 수 있는 넓이의 통로라, 어둡기는 해도 이동하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아가던 길에, 아까 내가 독침으로 처치했던 네 구의 시체와 마주쳤다. 그걸 발견했으니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진법술이 펼쳐졌던 공간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명의 인물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지휘관들조차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백룡조원들이 빠르게 다가가서 조사를 했고, 여기저기에서 낮은 목소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습니다. 죽은 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백도인들이지만 맹에 소속된 무인들은 아닙니다. 비맹주 세력 쪽의 무인들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저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흉수는 밖에 있는 사파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방금까지 겪었던 그 환영진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장을 확인해 보니 그 진법술은 이미 파훼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금세 많은 사실들을 파악해내고 있다.
역시 신룡대는 신룡대다.
참고로 이곳에 펼쳐져 있던 진법술을 파훼해 놓은 건 아마도 황룡조와 천무삼조의 인원들일 것이다.
백룡조원들의 말을 들은 기동타격조 관도들 몇 명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고 있다. 일이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본인들의 신세가 저렇게 되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식겁한 것이다.
애들뿐만 아니라 교관들과 노인들도 하나둘씩 내게 시선을 주고 있다.
나아가서는 천무사조 조원들과 백룡조원들도 한 차례씩 내게 시선을 주었다.
최초에 중요한 몇 사람을 환영술에서 깨웠던 게 나라는 사실을 다들 들어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다들 내 덕에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쑥스럽다.
모두가 다시금 전진하기 시작했는데,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황룡조와 천무삼조가 이미 앞서 나아간 모양이라, 우리는 그쪽에서 남긴 표식들을 보며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나는 통로나 공간의 세세한 모습들을 유심히 살폈다.
최초에 우리가 들어섰던 통로는 공사를 마무리한 지가 최소 몇 년 이상은 되어 보이는 통로였다.
한데 그 이후의 통로와 공간들은 모두가 최근에 공사를 한 모습들이었다. 우리가 환영진을 겪었던 공간도 그렇고, 당장 지금 이동하고 있는 통로도 그렇다.
적들이 이곳 절벽 고지의 내부를 비밀 통로로만 이용할 계획이었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통로를 넓게 뚫어 놓을 필요가 없었다. 이렇듯 이곳저곳에 널따란 공간들을 만들어 둘 필요도 없었다.
즉, 적들은 이곳을 통로가 아닌 은신처로 사용할 계획이었다고 봐야 한다.
서장의 임지현에 있었던 사파 놈들의 본거지는 최근에 초토화된 상황이다.
그런 만큼, 사파 세력의 수뇌부가 이곳에다가 다음 본거지를 마련하려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이유가 아니면 굳이 이곳에 이렇게 많은 공간들과 넓은 통로들을 조성해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에 조성한 공간들임을 상기하면, 논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아귀가 맞는다.
최근에 급하게 만든 공간들이기에 기관 장치를 제대로 설치하지 못했고, 그래서 급하게나마 진법술 같은 것을 펼쳐 놓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통로는 넓게 빙글 도는 형태로, 점점 상부로 이어지고 있다.
어둠 속이라 여러모로 복잡한 것 같지만 나는 내부의 구조를 유심히 살피며 이동하는 중이다. 그래서 이렇듯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통로를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묘한 기대감이 들고 있다.
여러 상황상, 사유 증운생 및 그의 똘마니들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 때문이다.
잠시 후, 통로의 먼 전방에서 전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룡조와 천무삼조가 사파 놈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사파 놈들의 기척이 매우 많다.
딱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백 명이 넘는 것 같다.
그 많은 사파 놈들 중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흘리고 있는 놈들이 상당히 많다.
매우 강력한 기운들도 몇 개나 있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사유 증운생이 저곳에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그의 핵심적인 똘마니들은 분명히 저곳에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