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60
멀다는 느낌과 느리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속에 답답함이 계속 쌓여가던 어느 순간.
갑자기 제갈수광과 나 사이의 공간이 살짝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굴 안은 어둠 속일 뿐이니, 이건 분명히 내 착각일 수밖에 없다.
한데 이상한 건, 그와 나 사이의 공간에 밤하늘의 별들 같은 빛의 알갱이들마저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이게 대체 뭐야?
가뜩이나 아까 내 눈동자의 색이 변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마당에, 지금은 이상한 환각까지 보이고 있으니 두려움마저 피어오른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금방 가셨다.
그 순간부터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더니, 속도가 빨라졌다는 게 확실하게 체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간 사이에 있는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긴 꼬리를 남기며 내 옆을 스쳐 뒤로 지나가고 있다.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제갈수광의 퇴로를 잡고 있던 유령사왕도 사라졌다.
유령사왕의 경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갈수광의 퇴로를 봉쇄하는 형태로 공격을 가한 후, 거대한 기운을 피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에야 벗어난 것이다.
놈은 최절정고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니까.
혼자 남은 제갈수광의 모습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그는 거대한 기운을 향해 신형을 틀며, 쌍검의 아랫부분을 가위 모양으로 교차시키는 모습이었다.
본인이 저 기운의 범위에서 제대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어떻게든 충격을 비껴내는 형태로나마 방어하려는 것이다.
그즈음의 나는 이미 제갈수광의 오른쪽 측면에 다다른 상태다.
마지막 순간에는 허공을 날아, 왼쪽 발바닥을 이용해 제갈수광의 골반을 강하게 밀쳐내듯 찼다.
강하게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제갈수광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보쇼, 교관님. 그러다 눈알 튀어나오시겠소.
나는 제갈수광을 밀쳐낸 반발력을 이용하여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아무리 반발력을 이용한다 해도 온전한 반발력이 작용할 리 없다. 방금의 나는 인간의 몸을 디뎠던 것이지, 단단한 땅바닥 같은 곳을 디뎠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 경우에는 이 거대한 기운의 범위에서 제대로 벗어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제법 휘말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몸을 잔뜩 웅크리며 방어하는 형태로 쌍장을 내밀었다.
나를 향해 짓쳐 들고 있는 거대한 기운의 충격을 최소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손에 비룡수투를 차고 있으니 그 도움을 받기 위함이기도 하다.
[송유······!]
마지막 순간에 제갈수광의 전음이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기운이 내게 짓쳐 들었다.
퍼억-!
거대한 기운에 강타당한 내 몸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기운의 중심부에 당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느껴진다.
“컥!”
신음을 참으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튕겨난 충격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튕겨진 내 몸이 측면 쪽의 벽에 그대로 박혔다.
“커흑!”
이번에도 역시나 신음을 참으려고 했던 거다. 하지만 벽에 부딪친 충격도 너무도 강했기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나를 튕겨낸 거대한 기운은 후방 입구 근처의 벽면을 향해 그대로 날아갔다.
콰과광-!
거대한 기운이 벽면에 격돌하며 우레 소리가 났다.
와르르르-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며 뿌연 먼지가 비산했다.
방금 벽면에 부딪히며 신체 내부에 갑작스럽게 강한 충격을 받은 탓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옘병, 고통 또한 장난이 아니다.
그 와중에도 내 몸이 상체 쪽부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낙하 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낙법을 펼쳐야 했다.
낙법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내부에 상당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큭!’
다행히 신음은 삼킬 수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인상을 찡그린 상태에서도 속으로는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후방을 가득 채웠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전방의 전선 쪽에서도 전투가 멈춘 상태라, 이 넓은 공간에 침묵이 흐르고 있다.
기운의 여파가 그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옆으로 쓰러진 상태에서 보니, 우리가 통과해서 들어왔던 입구 쪽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저런 기운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소름마저 돋는다.
어쨌거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퇴로가 막혀버린 셈인데, 이대로 괜찮을까 싶다.
그즈음, 적들의 진영 뒤쪽에서 강력한 기척 하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에 거대한 기운을 날렸던 당사자일 것이다.
사유 증운생일 가능성이 높으니,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 기척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을 향해 최대한 몸을 틀었다.
전방의 전선 쪽에 있던 적측 정예들이 양옆으로 쫙 갈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신룡대도, 천무대도, 비맹주 세력의 무인들도, 모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다.
곧,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뒷짐을 진 채 편안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평범한 체구의 노인이다. 육십 대 중반쯤으로 보인다.
머리에 문사건을 쓰고 있다.
첫인상은 인자한 노학자 같은 느낌이다.
용모에서 전체적으로 호감형의 중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멋지게 늙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인상이 좋다.
그래서인지 노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뢰감이 절로 우러나는 것 같다. 학자 느낌의 분위기 때문에 더욱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이왕 늙을 거라면, 나중에 저런 모습으로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만큼은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 완전히 다르다.
전생에 사부님한테서도 느꼈었고, 현생에는 맹주 운천흠한테서도 느꼈던 종류의 존재감이다. 거대한 세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들만이 풍기는, 절대자 특유의 존재감이다.
물론 저 노인의 경우에는 같은 종류의 존재감이라도 사부님이나 운천흠에 비해 작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같은 종류의 존재감이라는 점이다.
즉, 저 노인이 바로 증운생인 것이다.
증운생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와중에도, 무림맹 측의 고수들 몇 명이 후방의 중앙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각 조의 조장인 서문걸, 단리웅, 태무엽, 백룡 등이 중앙으로 모이자, 남궁묵 등의 뛰어난 고수들 몇 명도 모여들었다. 우리 조의 세 노인도 그쪽으로 합류했다.
나선 이들 모두의 눈빛에서 모종의 각오가 느껴지고 있다.
저들도 방금 나타난 학사풍의 노인이 증운생임을 알 것이다. 방금 전에 거대한 기운을 날렸던 초고수가 그였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위험할 것을 빤히 알면서도 저렇듯 나선 이유는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즈음, 두 사람이 조용히 내 뒤로 다가왔다.
[유겸이, 괜찮아?]
[유겸아, 괜찮니?]
장호산과 이세옥의 전음이었다.
옆으로 쓰러진 채로 고개를 돌리자 그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에 염려가 가득하다.
몸통 전체가 여전히 고통스럽기는 하나, 나는 그 와중에도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장호산이 쓰러져 있는 내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켰고 이세옥이 옆에서 도왔다.
곧 장호산이 나를 살짝 둘러업고는 자세를 낮춘 채로 이동하며 후방의 외곽으로 향했다.
업혀서 이동하는 와중에 제갈수광의 전음도 들려왔다.
[괜찮나?]
장호산의 등에 업힌 채로 고개를 돌리자 몇 보 떨어진 곳에 제갈수광의 모습이 보였다.
쌍검을 쥔 채 서 있는 모습으로 보아,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만, 나를 보는 그의 표정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마자 제갈수광이 눈매를 좁히더니 다시금 전음을 보내왔다.
[괜찮지 않은 거군. 지나치게 활발한 그 입으로도 대꾸를 못 하는 걸 보니······.]
이, 이보쇼! 지나치게 활발한 입이라니요!
어쨌거나 저 사람은 역시 못 속이겠다.
그의 말대로다.
나도 전음을 보내어 대꾸할 만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 내부의 상황이 온전치 않다. 장기들이 갑작스러운 큰 충격으로 인해 놀란 상태인 것 같다.
제갈수광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구석에서 몸조리······ 잘하고 있도록.]
이를 악문 채로 말을 내뱉는 느낌이었다.
말하면서 모종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전음을 마친 그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다.
그때쯤, 한 줄기의 음성이 공간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후후, 백도에서 혹여 이곳을 알아내게 되더라도 그건 먼 훗날의 일일 것이라 여겼었다. 한데 이렇게 빨리 알아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구나.”
증운생의 목소리다.
약간 묵직한 듯하나, 너무 무겁게 깔리는 저음은 아니다.
좋은 음성에 좋은 발음이기도 하다.
“빨리 알아낸 것도 놀라운데, 지난밤부터 너희들이 벌인 일은 더욱 놀랍구나. 비밀리에 이곳을 타격하러 온 데다가 해상 봉쇄까지 하다니.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운천흠이가 기르는 강아지들이 똘똘하기는 똘똘하단 말이야.”
그가 말한 ‘운천흠이가 기르는 강아지들’이란 신룡대를 뜻하는 말이다. 그쪽 바닥에서 신룡대는 맹주의 사냥개라고 불린다.
증운생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한데 아무리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해도 그렇지, 운천흠이가 이 증 아무개를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구나. 아무리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해도 그렇지, 이 몸을 끝장내고자 하면서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전력을 보냈더란 말이냐? 심지어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까지 전력에 끼워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이란 우리 잠룡관도들을 뜻하는 말이다.
“귀하는 사파의 학자를 자처하는 분이시잖소. 배울 만큼 배웠다는 분께서 말끝마다 ‘운천흠이, 운천흠이.’라니, 그게 뭐요.”
태무엽의 목소리였다.
그가 증운생을 향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다못해 ‘운 맹주’ 정도의 호칭은 써주시는 게 어떻겠소? 아무리 적이라도 상대방의 격을 올려줘야 본인의 격도 올라가는 법 아니겠소? 배울 만큼 배운 분이시니 잘 아시잖소.”
오호? 잘하는데?
과연 신룡대의 조장다운 기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누구라도 증운생 정도의 고수를 바로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식의 발언은 먼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푸허허허허허!”
증운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증운생이 여전히 미소를 띤 표정으로 태무엽을 향해 말했다.
“네가 신룡대의 황룡이겠구나.”
“배운 분이라 그런지 확실히 다르긴 다르시구려. 이 몸을 그렇듯 간단하게 알아봐 주는 이는 이 넓은 강호를 열심히 뒤져도 아예 없다시피 한데.”
태무엽은 ‘배운 분’이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증운생의 별호가 사유(邪儒)라서 그러는 건데, 우회해서 약간이나마 빈정거리는 의도도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