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62
방금 전에 유령사왕 저심홍은 제갈수광과의 짧은 두 차례 격돌에서 딱히 우위를 점하지 못했었다.
사유 증운생도 그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유령사왕 정도 되는 대단한 고수가 누군가에게 막히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령사왕을 지원하기 위해 온 게 아닐까 싶다.
유령사왕을 고전하게 만들고 있는 상대를 먼저 손봐주려는 목적으로.
하지만 증운생이 언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전혀 모르겠다.
처음에 가까이서 제갈수광의 얼굴을 확인한 증운생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감정은 흥미였다. 유령사왕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상대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 정도의 느낌이었다.
한데 바로 그다음 순간, 증운생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짙은 미소를 지은 채로 희번덕거리는데, 그 눈빛과 표정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제갈수광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사실, 증운생이라면 제갈수광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긴 했다.
삼청산 산장 사건, 태화지부 사건, 장강 사건 등에서 항상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던 인물이 바로 제갈수광이었다.
이후에 제갈수광은 기동타격조를 이끌고 해적들을 상대로도 큰 활약을 펼쳤었다.
그때마다 적들 중에 도망친 자들이 있었으니, 증운생에게도 제갈수광에 대한 보고가 매번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 제갈수광을 증운생이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증운생은 황룡과 백룡의 정체를 특정했으며, 비맹주 세력의 무인들마저 구분해낼 정도의 안목을 갖고 있는 인물이니까.
제갈수광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내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 또한 전투 때마다 제갈수광과 함께 여러모로 활약을 펼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수광에 이어 내 모습까지 확인한 증운생의 입술이 더 큰 호선을 그리고 있다.
역시나 내 정체도 알아본 것이다.
옘병, 걸려도 하필 이런 순간에 걸릴 게 뭐냐?
공력도 별로 없는 데다가 아직 상체의 고통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마당인데.
우리가 들어온 방향의 통로는 무너져 내렸고, 또 다른 통로인 반대편 통로 쪽에는 복면의 남녀가 여전히 대기 중이다.
복면 남녀도 상당한 고수들일 테니, 결국 우리는 이 안에 완전히 갇혀버린 셈이다.
이거, 이래서 괜찮은 걸까 싶다.
유령사왕의 옆으로 살짝 벗어난 증운생의 쌍장에서 장력이 발출되었다.
슈슝-
기운을 끌어 올려서 장심에 모으고, 장심에 모은 기운을 발출하기까지의 과정이 찰나간에 이뤄지고 있다.
적이지만, 정말이지 차원이 다른 고수이긴 하다.
매우 강력하고 빠른 장력이 두 줄기나 발출되었는데, 내 바로 앞에 있는 제갈수광은 피하지 않고 있다. 피할 생각이 아예 없어 보인다.
제갈수광이 왜 피하지 않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뒤쪽에 종금무, 남군호, 모용리 등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제갈수광과 나는 저 장력을 피할 수 있지만, 저 뒤에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피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
이렇듯 뒤에 있는 관도들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제갈수광은 설령 본인의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피하지 않을 사람이다.
애초에 증운생이 이러한 각도를 노리고 쌍장을 날린 것이기도 하다.
저렇게나 강하면서, 이런 순간에도 참 치밀하다.
제갈수광이 쌍검을 교차하며 방어 자세를 취해갔다.
한데 그 순간, 유령사왕 또한 제갈수광을 향해 쌍장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증운생의 장력이 너무 엄청나서 그렇지, 애초에 유령사왕의 장력 또한 실력이 대단했었다.
제갈수광이 피하지 않고 막아서는 모습까지 확인한 마당이니, 유령사왕도 마음껏 장력을 날리겠다는 계산이다.
확실히 둘 다 노련한 고수들이라, 드러난 약점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제갈수광은 증운생의 두 줄기 장력을 막아내기도 버겁다.
행여 막아낸다 하더라도 몸은 만신창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상황에서 유령사왕의 장력까지 짓쳐 들면 아무리 대단한 제갈수광이라 해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이러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설령 이번의 움직임으로 공력이 완전히 바닥난다 해도, 나는 무조건 최고 속도를 내야 한다.
제갈수광의 뒤에 몸을 감춘 채로 한 손에 세 자루씩, 양손에 총 여섯 자루의 소비도를 빼 들었다. 동시에 남아 있는 모든 공력을 강하게 휘돌리며 천섬무를 최대 단계로 운용했다.
유령사왕이 장력을 제대로 발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최대한의 속도로 움직여서, 최대한의 속도로 소비도를 날려야 한다.
다행히 유령사왕과 나 사이의 거리는 다섯 걸음에서 살짝 모자라다.
천섬무를 최대한으로 운용했을 때의 속도라면 놈의 장력 발출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다.
제갈수광의 옆을 스치며 전방으로 나서던 순간, 나는 내심으로 놀람을 삼켜야 했다.
또다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더니, 내 눈에 다시금 빛의 알갱이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까 제갈수광을 구하기 위해 달릴 때도 봤던, 밤하늘의 별들 같은 그 빛 알갱이들이다.
은백색 빛의 알갱이들이 이번에는 유령사왕과 나 사이의 공간을 수놓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공간을 지남에 따라, 빛의 알갱이들이 긴 꼬리를 남기며 뒤로 사라져갔다.
이쯤 되니 구분이 된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질감은 아까 내 한쪽 눈동자가 적색으로 변했을 때의 이질감과는 다른 종류다.
지금은 내 한쪽 눈동자가 왠지 다른 색으로 변해 있을 것 같다.
무슨 색일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 와중에도 내 가슴 높이로 누런색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저건 증운생이 날린 장력이다.
실은 저 색깔을 아까도 봤었다.
처음에 증운생이 등장하면서 우리를 향해 날렸던 거대한 기운도 저런 색이었다. 그때도 내가 빛의 알갱이들 사이를 달리고 있었기에 같은 색을 봤었던 것이다.
단, 그 직후에 신체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기에 색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나 빠르게 느껴졌던 증운생의 장력이, 이 순간에는 그다지 빠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섬무를 최대한으로 운용했을 때보다 상대의 움직임이 더 잘게 쪼개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눈에도 더 느려 보이는 거다.
장력의 기운이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보니 장력의 영향 범위를 피하기도 더 수월했다.
나는 자세를 낮추며 누런색의 장력을 최소한의 회피 동작으로만 피했다. 그러면서 속도를 유지하며 빛의 알갱이들 사이로 계속 나아갔다.
유령사왕과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다.
유령사왕의 좌측 뒤편에 있는 증운생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바로 소비도 여섯 자루를 한꺼번에 털어냈다.
소비도들의 궤도가 미묘하게 교차되며, 세 자루는 유령사왕에게, 다른 세 자루는 증운생에게 향했다.
날아가고 있는 소비도들은 빠른데 유령사왕은 느리다.
증운생은 유령사왕보다 약간 더 빠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눈에는 그러한 상대적 차이가 명확하게 보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유령사왕에게는 두 자루쯤이 박힐 것 같은데, 증운생 쪽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증운생 쪽이 상대적으로 더 멀기도 하고, 훨씬 고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묘한 이질감이 사라지며 원래의 시야로 돌아왔다.
단전에 공력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적색 눈동자의 이질감일 때에는 공력 소모가 별로 없었는데, 빛의 알갱이가 보이는 방금의 이질감일 때는 공력 소모가 원래와 비슷한 것 같다.
공력 소모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원래의 최대 속도보다 더 빨라진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니 내 눈에도 상대의 움직임들이 더 느려 보인 것이다.
퍼벙!
제갈수광이 증운생의 장력을 막으면서 난 소리다.
“커흡······!”
이건 제갈수광의 입에서 나온 신음이다.
저 사람이 신음을 속으로 삼키지 못했을 정도면, 장력의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수광의 입 쪽에서 검붉은 액체가 전방으로 튀어나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정도면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던 것이다.
게다가 제갈수광의 양발도 결국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나고 있다.
푸북!
그 직후에 들려온 소리는 내 소비도 두 자루가 유령사왕에게 꽂히는 소리다.
하나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꽂혔고, 하나는 그의 왼쪽 넓적다리에 박혔다.
“크윽!”
유령사왕의 입에서 나온 신음이다.
결국 유령사왕은 장력을 발출해내지 못했다.
참고로 그는 현재 찢어져라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샥-
이 소리는 증운생 쪽에서 난 소리다.
세 자루의 소비도 중에서 한 자루가 그의 한쪽 엉덩이 옆을 훑고 지나가면서 난 소리다.
“헙!”
증운생이 헛바람을 들이켜고 있다.
엉덩이 옆쪽을 보니 상처가 깊지는 않은 듯한데, 그래도 피가 제법 날 것 같은 수준은 된다.
증운생 또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증운생이 나를 향해 쌍장을 뻗고 있다.
유령사왕도 나를 향해 좌장을 뻗고 있다. 유령사왕의 경우에는 오른쪽 어깨를 다쳤기에 왼손만 쓰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뻗은 세 개의 장심에 기운이 매우 빠르게 모여들고 있다.
두 사람 공히, 나를 향한 눈동자에 살의가 가득하다.
참고로, 뒤로 밀려났던 제갈수광은 이미 나와 몇 걸음이나 떨어진 상태다.
아군 측 다른 고수들의 위치는 내게서 멀다.
즉, 이 시점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는 공력이 단 한 방울도 없다.
나는 이제 죽었다.
어떻게든 손바닥을 펼치며 전방을 향해 내밀었다.
공력이 전혀 없으니, 그나마도 내가 기댈 건 비룡수투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비룡수투가 있다고 해서 이 순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어차피 곤죽이 될 텐데,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상체를 보호하기 위함일 뿐이다.
세 가닥의 장력이 발출된다 싶었을 때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을 막아선 뒷모습이 다름 아닌 길초량의 등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기인 곤을 검과 검집으로 분리한 상태였는데, 전방을 향해 검과 검집을 야무지게 교차시킨 모습이었다.
저 형태로 방어 태세를 취한 것이다.
야, 이 자식아! 미쳤어?
대체 어쩌려고 저 괴물 같은 인간들의 장력을 막아서는 거냐고······!
물론 놈의 마음만큼은 고맙다.
눈물 나게 고마운데, 이건 무모해도 너무 무모하다.
이건 나를 대신해서 중상 입을 걸 각오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퍼버벙!
길초량의 정면에서 기운의 강력한 폭발음이 들렸다.
인근의 대기가 몸서리를 치는 가운데, 길초량 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놈도 당연히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 직후.
퍼억!
길초량의 등판이 내 정면에 강하게 부딪쳐왔다.
충돌하는 힘을 완화시키기 위해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결국 우리 둘의 몸이 포개어져 뒤로 날아갔다.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 근처의 벽면을 향해서다.
미친놈! 이 미친놈!
날아가는 와중에도 속으로 길초량을 욕했다.
미워해서 하는 욕이 아니다.
미안해서 하는 욕이다.
그 순간이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너져 내린 입구의 벽면 너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즉, 무너진 입구의 바깥쪽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저 어마어마한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