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66
“다친 데는 없나요?”
“잔부상들 정도는 있으나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문숙경이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미공자로군요.”
“아하하, 그 또한 과찬이십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미공자가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졌을까. 가뜩이나 우리 동부지맹 잠룡관 출신의 우승자인데, 그 모습을 직접 못 봤다는 게 이렇게나 아쉬울 수가 없군요.”
통합 잠룡대전 당시에 검후 문숙경은 본맹에 오지 못했다.
절강 동부 해안에 출몰한 해적들 때문이었다.
검각이 있는 보타산도 절강 동부 해안의 섬 지역인 주산군도에 위치해 있다.
문숙경은 검각주인 만큼 구성원들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그곳을 지키며 해적에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쉬워하는 문숙경을 향해 대꾸해줬다.
“꾸역꾸역 운 좋게 우승한 정도라서, 직접 보셨으면 오히려 실망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호호홋. 그럴 리가요. 나도 직접 관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어요.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송 공자가 나를 배려해서 해 준 말이라는 건 알겠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약간 의아한 점이 있었다.
나를 보는 문숙경의 눈에 담긴 기색 때문이다.
검후 정도 되는 존재가 일개 잠룡관도에 불과한 나를 대하는 상황일 뿐인데, 오히려 그녀 쪽에서 대단한 누군가를 보는 느낌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
계속되는 놀람을 속으로 열심히 감추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왜 저러는 걸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검후께서는 왜 저를 보고 자꾸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시는지요? 혹여 제가 검후님의 지인과 많이 닮았다거나······.”
못 물어볼 것도 아니니 그냥 물어보자.
“아······! 미안해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그게 잘 안 되네요. 실은 저 안에서 송 공자가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정말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고······.”
“아, 아······.”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느끼는 송 공자는 별로 강해 보이지가 않거든요. 게다가 어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젊잖아요. 이런 송 공자가 그렇게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는 게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내가 아까 사파의 초고수들을 상대로 펼쳤던 활약에 대해 누군가한테서 들은 모양이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몇 번이나 본신의 실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젠장, 누가 그렇게 입이 싼 거야?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숙경이 말했다.
“장강 사건 때부터 기동타격조의 임무에 이르기까지, 송 공자가 하령이 이 아이를 여러모로 도와줬다고 들었어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강 소저가 워낙 알아서 잘 하는 성향이라 제가 딱히 돕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강 소저한테서 도움받은 일도 많습니다.”
“후훗. 겸손하군요. 어쨌든 앞으로도 이 아이와 사이좋게 지내줘요.”
“물론입니다.”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문숙경이 말했다.
“엊저녁부터 쉬지도 못하고 계속 싸웠다고 들었어요. 많이 피곤할 테니 얼른 가서 쉬도록 해요. 더 나누고 싶은 얘기들은 다음에 해도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문숙경이 강하령에게 말했다.
“너도 이만 가서 쉬려무나. 쌓인 이야기들은 깨어난 후에 나누자꾸나.”
“예, 스승님.”
문숙경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조용히 멀어져갔다.
멀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향한 문숙경의 눈빛에는 이채가 담겨 있었다.
막사 구역으로 돌아와서 제갈수광과 길초량이 있는 중상자 막사로 들어섰다.
두 사람 모두 침낭 안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다.
피로가 제대로 풀리려면 회회심공을 운기한 후에 잠드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고 있는 제갈수광과 길초량에게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냥 누웠다.
침낭 안에 들어가서 뒤통수를 대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유시 정(오후 6시) 무렵, 제갈수광과 길초량이 머무는 막사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들어선 이가 곧바로 제갈수광을 향해 묵례하며 말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남궁 아우, 어서 와.”
간이 침상에 누워 있던 제갈수광이 상체를 일으키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의 대꾸에서도 알 수 있듯, 방금 막사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남궁찬이었다.
“내상을 제법 입으셨다고 들어서, 인사와 병문안을 겸해서 온 길입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큰일 하느라 바쁜 사람이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뭘 또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래?”
“아유,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이 다치셨는데 당연히 찾아와야죠. 원래는 아까 낮에 찾아올까 했는데 주무실 것 같아서 지금 온 겁니다. 엊저녁부터 싸웠던 분들은 워낙 피로가 많이 쌓인 상태라고 들어서. 그나저나 제대로 쉬긴 하셨습니까?”
“낮이라 일단은 적당히 자고 일어났지. 이따가 밤에 제대로 자는 게 좋을 테니.”
“하긴 그렇겠네요.”
그렇게 대꾸한 남궁찬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 간이 침상에는 길초량이 상체를 일으킨 채로 앉아 있었다.
제갈수광이 곧바로 남궁찬에게 물었다.
“아, 두 사람은 초면인가?”
“예. 초면이긴 한데 이 아이가 누군지는 알 것 같습니다. 동부지맹의 길초량이겠죠?”
남궁찬의 대꾸에 제갈수광과 길초량의 눈동자가 동시에 살짝 커졌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어? 어······.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아, 이 작전에 후발대로 투입되면서 우리의 전력에 대해서도 보고를 받았거든요. 기동타격조에 속한 관도들의 명단은 특히 유심히 봤습니다. 그 명단 중에서 제가 모르는 관도는 한 명뿐이더군요.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통합 잠룡대전 때 봤던 이름들이고, 얼굴들도 아니까요.”
“아하.”
제갈수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찬이 길초량을 향해 말했다.
“초량이 반갑다. 나는 남궁찬이라고 해.”
길초량이 남궁찬을 향해 포권했다.
“남궁 부당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동부지맹의 계반 오 년 차······ 아니 이제 육 년 차 관도인 길초량이라 합니다.”
그러자 남궁찬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보이며 길초량에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요즘은 그게 문제란 말이지. 듣자 하니 네 실력도 상당한 모양이던데, 그런 너도 계반이라는 거잖아.”
“하하. 하하. 야, 약간의 사정이 있었던지라······.”
“응. 그래, 뭐. 이해는 해. 계반 관도들 중에는 사정이 있는 아이들이 간혹 있지.”
남궁찬이 여전히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채로 그렇게 말하자 제갈수광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송유겸이랑 단짝이야. 작년 이맘때쯤까지만 해도 저 단짝이 우리 잠룡관에서 가장 한심한 관도들 두 명으로 꼽혔지.”
“역시나 실력 감추고 지내기 좋아하는 음흉한 녀석들끼리 단짝이었군요.”
그러자마자 길초량이 말했다.
“하하. 하하. 단짝이라고 하기보다는 제 쪽이 송 형의 일방적인 놀림감이자 희생양입니다요, 넵.”
그러자 남궁찬이 제갈수광에게 말했다.
“능구렁이 같은 저 대처를 보니 유겸이 단짝 맞네요.”
“푸후후후!”
제갈수광이 웃음을 보이자 남궁찬이 물었다.
“듣자 하니 이 막사에 유겸이도 함께 있다고 하던데, 그 녀석은 어디 간 모양이네요?”
“어. 우리 치료 물품들 준비해 오고, 아예 식사까지 가져오겠다는 모양이야. 죽이라서 좀 오래 걸리는 모양이군. 보다시피 우리가 당분간 죽으로 때워야 하는 신세라.”
“하늘 같은 스승님 수발하랴, 단짝 수발하랴, 유겸이가 고생이 많네요.”
“아니. 그 자식은 절대로 나를 하늘같이 여길 놈이 아니야.”
“송 형은 결코 저를 단짝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노예 정도로 여깁니다.”
제갈수광과 길초량이 연달아 그렇게 대꾸하자 남궁찬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곧 남궁찬이 제갈수광을 향해 말했다.
“형님께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잠시 산책, 가능하십니까?”
“어. 그러지. 어차피 이따가 치료받고 나면 계속 이 안에 있어야 하니, 이 기회에 바람 좀 쐬지.”
제갈수광이 대꾸하자마자 길초량이 말했다.
“아닙니다, 교관님. 제가 나가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야말로 바람 좀 쐬고 싶었던 참입니다. 멀리 안 가고 이 근처에 있다가, 송 형 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에, 길초량은 벌써 막사의 입구를 젖히는 중이었다.
제갈수광과 남궁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초량이 밖으로 나가자 남궁찬이 내공을 퍼트려 막사 안의 음파를 차단시켰다.
“형님은 기동타격조의 지휘관이니 알고 계시죠? 초량이 쟤, 신룡대라는 거.”
그 말에 제갈수광이 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대꾸했다.
“내심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체를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이번 기동타격조 건 때문이었지. 한데 아우는 어떻게 알아?”
“이래 봬도 제가 동부지맹의 고위직이잖습니까. 동부지맹 쪽의 정보만큼은 빠삭합니다. 가뜩이나 동협당의 실질적인 업무처리도 제가 다 하고 있는 마당이라.”
그 말에 제갈수광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찬이 물었다.
“참고나 할 목적으로 여쭙는 건데, 형님이 직접 확인한 초량이 실력은 어땠습니까?”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 보니 어찌나 믿음직하던지, 역시 신룡대는 신룡대라는 생각이 들더군. 아직 어린데도 실력이 매우 출중해. 자질도 뛰어나고, 노력도 열심히 하고. 거기에 오성마저 뛰어나니 발전 가능성도 여전히 높고. 무엇보다도 녀석은 성격이 최대 장점이야. 정신의 중심도 잘 잡혀 있는데 아주 유연하기까지 하지.”
“오호. 그런 식이면 앞으로도 빠르게 성장해가겠군요.”
“길초량이라면 그 날고 기는 신룡대 안에서도 걸출한 인재가 될 거야. 이후에는 백도 차원의 대단한 인재가 되겠지.”
“출신이나 무공 연원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짐작되는 바가 있으십니까?”
“출신은 모르겠고. 무공 연원은 음······ 불가의 느낌이 제법 짙다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그런 경우는 뭐, 워낙 많으니.”
수많은 백도 무학들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소림사와 닿는 경우가 매우 많다.
반대로 말하면 소림의 무학에서 파생되어 변형된 무학들이 매우 많은 건데, 개중에는 불가의 느낌이 비교적 짙게 남아 있는 무학들도 많다.
그렇기에 제갈수광이 인지한 정도로는 무공의 연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잠시 동안 길초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제갈수광이 남궁찬에게 물었다.
“그래,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아, 예. 아까 사유 증운생이 마지막 순간에 풀어놨던 정보들에 대해서 몇 가지 전해드리려고요. 형님이야말로 들을 자격이 되는 분이기도 하시고.”
제갈수광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보이자 남궁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증운생은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물론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제 느낌에는 그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습니다. 듣기에 타당한 부분들도 많았고요.”
“증운생의 입장에서는 굳이 거짓말이나 늘어놓을 상황이 아니긴 했지. 어쨌든 궁금하군.”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모두 마친 증운생이 우리를 향해 조소를 지으며 말하더군요. 실상 본인들을 패퇴시킨 장본인은 따로 있으니, 애먼 우리가 어설픈 승리감에 도취될 필요 없다고······.”
“장본인?”
“예. 그래서 그 장본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증운생이 유겸이 얘기를 하더군요.”
제갈수광의 눈매가 살짝 커졌다가 좁혀질 때쯤 남궁찬이 말을 이었다.
“유겸이가 없었다면 우리 후발대가 도착하기 전에 그 공간 안에 있던 백도인들은 모두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랬다면 본인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 정도는 더 있었을 거라고. 그러더니 황룡조장과 백룡조장을 보며 두 사람이라면 무슨 얘긴지 알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물론 황룡조장과 백룡조장은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즉, 증운생의 말을 인정한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