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67
남궁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증운생이 죽고 나서 모두가 동굴을 벗어나자마자, 무상님과 집법당주님이 따로 황룡과 백룡을 데리고 가시더군요. 증운생이 유겸이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따로 보고받기 위해서 데려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도 궁금했는데 거기에 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중에 형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형님이라면 두 조장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남궁찬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제갈수광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실, 송유겸이 동굴 안에서 펼쳤던 활약을 목격한 이들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격한 송유겸의 활약상은 순간순간의 단편적인 모습들일 뿐이다. 전체적인 면에서 송유겸이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송유겸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송유겸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직전에 기척이 매우 은밀해진다.
때문에 웬만한 이들은 그 순간 송유겸의 기척을 놓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송유겸이 목표 지점까지 다다르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이도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자신에게는 송유겸의 기척이 익숙하기에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송유겸은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렇기에 웬만한 안법 경지로는 송유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기가 어렵다.
안법 경지가 낮은 이들에게는 송유겸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른 곳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고수인 자신도 집중을 해야만 궤적을 쫓을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장소가 어두운 동굴 안이었다.
투입되었던 무림맹의 무인들 모두가 정예 고수들이었다 해도, 그런 어둠 속에서는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시야는 급속도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어둠 속에서, 그토록 은밀하고 빠른 송유겸의 움직임을 파악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은 송유겸의 저러한 특성들을 잘 알고 있는 만큼 항상 각오를 한 채로 그 움직임을 살핀다.
때문에 아까 동굴 속에서 송유겸이 펼친 활약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많은 걸 봤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도 아닌 남궁찬이 궁금해한다면 어느 정도의 내용은 밝혀줄 필요가 있다. 누구보다 송유겸을 아끼는 게 남궁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부지맹의 요직에 있는 남궁찬이다.
그런 만큼 맹의 수뇌부가 알고 있는 정보라면 남궁찬도 알고 있는 편이 송유겸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증운생의 말대로야.”
제갈수광이 특유의 사무적인 어조로 운을 뗐다.
남궁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실제로 송유겸이 없었다면 아까의 그 공간에서 유령사왕한테 많은 이들이 죽었을 거야. 유령사왕은 등장하자마자 특유의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금세 몇 사람을 처치한 참이었거든.”
“역시 유령사왕이군요.”
“그러던 중에 하필 후방의 구석 쪽에 있던 우리 관도들 쪽을 노리려다가 송유겸한테 걸린 거지. 송유겸이 유령사왕을 상대로 약간의 시간을 벌어줬고, 그 덕분에 우리가 유령사왕을 포위할 수 있었어. 그 후로 유령사왕은 한동안 그쪽 구석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고.”
“아······.”
“그렇듯 유령사왕을 봉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 송유겸은 서천혈부와 망산겸노의 급습에서도 아군을 지켰어. 심지어는 서천혈부를 마무리 짓기까지 했지. 물론 그 상황에서는 묵 아우의 도움도 매우 컸고.”
남궁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갈수광이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송유겸이 없었으면 애초에 유령사왕의 발을 묶어둘 수가 없었다는 점이겠지. 그때 유령사왕을 묶어두지 못했다면 상황이 어찌 되었을까. 그 정도 시간이었으면 아마도 수많은 아군들이 유령사왕에게 당했을 거야.”
“그랬겠죠.”
“그런 식으로 유령사왕이 마음껏 날뛰는 상황에서 망산겸노와 서천혈부까지 합류했다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증운생까지 맞이해야 했다면?”
“결국 증운생이 말했던 대로 될 수밖에 없었겠군요.”
“어. 게다가 사파의 초고수들을 지원하는 사파 측 정예무인들의 실력들도 수준급이었거든.”
남궁찬은 진지한 눈동자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말없이 남궁찬을 바라보던 제갈수광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실, 송유겸의 활약은 그 전의 과정에서 더 빛났었다.
처음에 동굴에 들어섰던 직후에, 송유겸이 없었으면 시간이 훨씬 오래 끌렸을 것이다. 적들이 던졌던 독탄 때문이다. 시간만 끌린 게 아니라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결과론적으로 그 상황을 아무 피해 없이 돌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송유겸이 빠르게 계단형 통로를 돌파해서 그 위쪽 공간을 정리해 준 덕분이었다.
이후에 환영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송유겸 덕분이었다.
모두가 환영진에 빠졌었고, 심지어는 자신도 환영진에 당했었다. 그때도 송유겸이 없었다면 그 시점에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증운생의 얼굴도 못 보고 죽었을 것이다.
즉, 송유겸 덕분에 모두가 피해 없이 마지막 공간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사실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
제갈수광이 속으로 그 생각을 할 때쯤 남궁찬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원래 이야기하려고 했던 증운생의 정보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후부터는 남궁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 * *
제갈수광과 길초량의 식사가 끝난 후, 나는 두 사람의 내상약 복용과 침술 치료까지 열심히 도왔다.
치료가 끝나자 두 사람은 간이 침상에 몸을 눕히며 안정을 취했고, 나는 두 사람의 식기 및 치료에 쓴 물품들을 정리하여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치료에 걸린 시간이 제법 길었기 때문인지 저녁 시간이 금세 지나간 느낌이다.
거의 해시 초(오후 9시) 무렵은 된 듯하다.
우물가에 가서 식기들을 세척한 후, 우리의 막사 구역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막사로 가는 길의 바위 위에 하나의 익숙한 인영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단목강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송 공자.”
“사색 중이셨습니까?”
“하하. 무슨 사색씩이나. 그냥 멍하니 있었소.”
단목강의 앞에 있는 바위에 가서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 조장님이 발출했던 그 검환, 대단했습니다.”
망산겸노를 향해 발출해냈던 단목강의 검환을 말한 것이다.
“하하, 민망하오. 결과적으로 그 검환이 딱히 큰 도움이 되지도 못했었고······.”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건 상대와의 경지 차이가 너무 심했던 탓입니다. 당시에 조장님이 적재적소에 훌륭한 한 수를 펼쳤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단목강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보이더니 말했다.
“송 공자야말로 엄청나더구려. 내가 오래전부터 송 공자와 함께 여러 전투들을 치러 온 사람이잖소. 송 공자의 실전 실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야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모습이더구려. 누가 송 공자를 일개 잠룡관도라고 하겠소.”
“아하하, 순간적으로 쾌자결을 활용할 기회들이 많았을 뿐입니다. 그마저도 공력이 부족해서 나중에는 별로 힘도 못 썼······.”
내가 적당히 둘러대며 그런 말을 할 때쯤, 단목강의 시선이 내 후방 멀리로 향했다.
아닌 게 아니라 누군가가 뒤쪽에서 누군가가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단목강의 부친인 단목진이었다.
단목강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도 얼른 일어섰다.
단목강이 목례하며 말했다.
“아버지, 오셨어요.”
“어, 그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식사 후의 지휘부 회의가 살짝 길어져서 말이다.”
단목강은 사색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본인의 부친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목진은 외모와 인상에서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중년인이다. 언젠가 나도 중년이 된다면 저런 느낌을 풍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목소리는 딱 듣기 좋은 수준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말하는 속도도 적당하고 발음도 좋았으며, 어조에서는 온화함이 느껴졌다.
이렇듯 직접 보고 나니 단목강이 부친을 쏙 빼닮았다는 걸 확실히 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목구비의 곳곳에 단목지의 느낌도 많이 담겨 있다.
참고로 단목진 또한 통합 잠룡대전 때 본맹에 오지 못했었다.
단목세가도 절강을 대표하는 강호 세력인 만큼, 해적들에게 대응하고 있었던 탓이다.
단목강이 대꾸했다.
“친우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에 단목진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단목강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시오.”
이에 나는 단목진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단목세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동부지맹 잠룡관의 관도인······.”
“송유겸 공자겠지.”
“······아, 알아봐 주실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대꾸하며 포권을 풀자 빙그레 웃고 있는 단목진의 표정이 보였다.
외모도 멋지지만 미소도 참 멋지다.
중년 남성의 미소가 저렇게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내가 직접 본 중년들 중에서 가장 멋진 중년인인 것 같다.
그 와중에 단목진의 눈빛에 담긴 기색 또한 아까 검후 문숙경이 보였던 기색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유도 뭐, 문숙경이 그랬던 이유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지.
젠장, 누군지는 몰라도 내 활약에 대해 대체 얼마나 열심히 떠들어댄 거야? 얼마나 열심히 밝혔으면 처음 보는 명숙들이 하나같이 이런 표정인 거냐고!
단목진이 말했다.
“송 공자가 지나친 미남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거든.”
지나친 미남이라니.
이분, 재미있는 표현을 쓰시네?
“아하하······, 과찬이십니다.”
내가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대꾸하자 단목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허, 표현이 좀 이상했는가? 딸아이가 송 공자를 표현하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써본 것뿐이니 오해하지 마시게.”
“아, 단목 소저께서 그런 표현을······.”
“물론 딸아이도 나쁜 의도로 쓴 표현이 아니라 좋은 의미로 썼던 표현일세.”
“하하······. 평소에도 단목 소저는 재치가 있으시지요.”
“어쨌거나 만나서 반갑네, 송 공자.”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대꾸하자 단목진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 아들, 딸, 조카와도 두루두루 친분이 깊다고 들었네. 우리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네.”
“헛······! 고맙다니요.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제가 세 분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입장입니다.”
“앞으로도 친하게 잘 지내주게.”
“그 또한 오히려 제 쪽에서 부탁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내 대꾸에 단목진은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송구하오나 저는 이만 막사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가던 길에 조장님과 마주쳐서 잠시 대화를 나누던 참이라······.”
두 부자가 오랜만에 만난 분위기이니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단목진이 대꾸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네, 송 공자. 다음에 또 보세.”
“예, 가주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럼.”
말을 마친 나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포권해 보인 후 두 사람의 곁을 벗어났다.
* * *
부친은 멀어져가는 송유겸의 뒷모습에 아예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그런 부친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단목강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부친의 저 표정만으로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송유겸이 매우 마음에 드는 것이다.
송유겸이 먼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부친이 고개를 돌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위 삼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