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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마교있다-169화 (169/416)

내 안에 마교있다 169

다짐이라는 표현도 표현이지만, 눈빛에서도 모종의 각오가 느껴지고 있다.

사실, 전투를 치르다 보면 아군이나 동료들에 의해 구명되는 상황은 자주 벌어진다. 그걸 다 구명지은이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은혜 갚다가 볼 장 다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누님의 분위기가 이토록 진지하다는 건, 방금 말했던 그 위기의 순간이 본인에게는 매우 큰 의미였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내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발언이긴 하다.

신룡대의 조장이 진심으로 저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나한테도 무조건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으니 일단은 적당히 겸손한 척을 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생각으로 백룡에게 말했다.

[아군끼리 서로 돕는 게 당연한 일인데 조장님이 너무 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저처럼 했을 겁니다.]

[아니.]

백룡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더니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신하는데, 당시의 그 순간만큼은 네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야. 그때 우리와 같이 있었던 인의대의 무인들도, 심지어는 신룡대인 내 부하들도 못했던 일이야. 너만이 그 무음시를 알아챘기에 너만이 그걸 막아줄 수 있었던 거지. 기동타격조에도 몇 명의 고수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너만이 움직였다는 거고. 내 말이 틀려?]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 시점에 백룡은 무음시에 무조건 당했을 것이며, 이후에 그녀는 퍼져가는 독 기운을 다스리지 못한 채로 죽었을 것이다.

키 큰 놈과 왜소한 놈이 계속 그녀를 노렸을 테니까.

[수준 높은 무음시를 막아준 만큼 상당한 고수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 후 정체를 확인한 순간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세상에, 그 무음시를 막아준 게 잠룡관도였다니. 그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어?]

내가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이자 백룡이 말했다.

[엄밀히 말해서 네가 훨씬 더 대단한 활약을 펼쳤던 건 동굴 안에서였지.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때의 무음시를 막아줬던 네 모습이 훨씬 더 깊게 각인되어 있다는 뜻이야.]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백룡이 술병의 마개를 닫더니 내 쪽으로 내밀며 물었다.

[마실래?]

마시고 싶은 생각은 있다.

어제부터 이어졌던 전투는 내 입장에서도 매우 치열했다. 그런 전투를 마친 날에는 술 생각이 난다.

약간 마시고 나면 이따가 잘 때 잠도 잘 올 것 같고.

잘 마시겠다고 대꾸하려던 찰나, 술병이 이미 내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술병을 낚아채자 백룡의 전음이 들려왔다.

[고민 길게 하느니 차라리 마셔, 이런 날에는.]

[하하, 예.]

마개를 열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 좋다.

이런 날에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평범한 술인데도 명주 같다.

백룡의 전음이 들렸다.

[한 모금 더 해도 돼.]

어차피 술도 제법 남아 있겠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술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너, 졸업하면 신룡대 들어와라. 우리 조에.]

“푸확!”

술을 들이켠 순간에 백룡의 전음이 들렸기에, 나는 입안에 넣었던 술을 그대로 뿜을 수밖에 없었다.

컥! 이보쇼, 누님! 이렇게 교묘한 순간에 그런 말씀 하시기요?

고개를 돌려보니 백룡이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술을 뿜은 모습을 보고 저러는 것이다.

그녀에게 대꾸했다.

[아하하하, 딱히 제 적성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지 말고 신중하게 한번 고려해 봐. 물론 신룡대 생활이 다소 빡센 부분들도 있긴 한데, 좋은 점도 정말 많다니까?]

싫소! 미안하지만 그 바닥 생활은 이미 경험할 만큼 경험했단 말이오!

[하하,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 생각이라서요.]

[훈련받는 게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우리 조에 들어오면 내가 그런 거, 싹 다 열외시켜 줄게. 힘든 훈련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편한 외부 임무에 파견해주면 알아서 열외되거든. 네 실력이면 그런 대우 받을 자격도 충분하고.]

이에 나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후에 백룡에게 말했다.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역시나 제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저보다는 차라리 길초량 관도가 신룡대에 훨씬 잘 어울릴 겁니다. 그러니 길초량 관도에게 제의해 보십시오. 강력히 추천합니다.]

[초, 초량이? 그, 그래. 초량이도 훌륭하더라······.]

백룡은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

후후후.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빤하다.

이미 신룡대원인 놈을 영입하라고 하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당황할 수밖에.

나는 천천히 술병의 마개를 닫은 후, 다시 그녀를 향해 던져 주었다.

백룡이 술병을 받아서 한 모금을 마시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실은 네가 거절할 줄 알면서도 농담 삼아 제의해 본 거야. 솔직히 내가 네 입장이었대도 신룡대 같은 조직에는 안 들어갔을 거거든. 그 어린 나이에 그 대단한 실력을 갖췄는데, 뭐 하러 굳이 빡센 데 들어가서 사서 고생을 하겠어?]

[하하, 고생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적성에 안 맞을 뿐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실력이라니······, 조장님께서 너무 좋게 봐주시는 듯합니다.]

[대단한 실력인 건 맞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가 살짝 민망하긴 한데, 사실 나도 무공 쪽으로는 천재 소리를 엄청 많이 들으면서 살았거든. 그런데 너는 그런 나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천재라는 거잖아. 그 어린 나이에 그 실력이면.]

[아하하. 천재라기보다, 저는 그냥 운이 좋아서······.]

[굳이 부인할 필요 없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사유 증운생마저도 죽기 전에 너를 언급하면서 대단한 실력이라고 인정했는데 뭘.]

잠깐만요. 사유 증운생이 뭘 어쨌다고요?

[예? 그게 무슨 말씀······.]

곧 백룡이 그 일에 대해서 전음으로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백룡이 해주는 말을 전부 전해 들은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옘병, 증운생 그 미친 늙은이 같으니!

뒈지려면 곱게 뒈질 것이지, 뒈지기 직전에 뭐 하러 개소리는 덧붙여서 나를 곤란하게 만든단 말인가.

나를 보던 검후 문숙경과 단목세가주 단목진의 표정이 왜 그랬었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누가 나에 대해 발설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어이없게도 범인이 증운생이었던 것이다.

백룡이 한동안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동안 여러모로 고마웠어, 유겸아. 실은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어서 아까 너를 붙들어뒀던 거야.]

왠지 작별 인사를 하려는 듯한 어조였다.

[아, 떠나시는 겁니까?]

[응. 복귀해. 전사자들 시신 수습해서, 내일 새벽에.]

[아······.]

하긴, 그녀는 신룡대다. 신룡대의 조장이다.

우리가 아무리 무림맹에 소속된 무인들이라 해도, 신룡대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에게 신분이 노출되어서 좋을 게 없다.

그나마도 이곳이 섬이라서 여태 남아 있는 것이지, 육지였다면 저들은 증운생이 죽은 시점에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떠난다는 소리를 들으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백룡이 말했다.

[희한하지? 실제로 같이 움직인 일정은 짧았는데도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처럼 아쉬운 마음이 들잖아. 그 와중에 우리가 생사의 고비를 수도 없이 함께 넘었기 때문이겠지.]

그녀의 말대로다.

짧은 시간이었을지언정 깊은 전우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미소를 띤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신룡대의 백룡조장님과 같이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조장님과 백룡조원들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나야말로 백도 최고의 후기지수와 같이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지. 그런데······ 유겸이 넌 왜 그렇게 영영 못 볼 사이인 것처럼 인사하는 거야?]

[예? 조장님은 신룡대시니 아무래도 앞으로는 뵐 일이······.]

[아니지. 우리는 계속 봐야지. 그래야 내가 너한테 진 빚을 갚으면서 살 수 있을 거 아냐.]

[계속 본다고 하시면······.]

[어차피 네 쪽에서 나를 찾을 수는 없을 테니 내 쪽에서 너를 찾아갈 거야. 이래 봬도 내가 신룡대의 조장이거든. 꼭 동부지맹 잠룡관이 아니어도, 설령 네가 강서 땅에 없다고 해도, 나는 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뜻이지.]

[왠지 무섭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하하.]

내 말에 백룡이 씩 웃더니 말했다.

[상황에 따라 전서 같은 것으로 연락이 갈 수도 있으니까 그리 알고 있어.]

[전서의 발신인 이름에 백룡이라고 적혀 있지는 않겠지요?]

[당연하지. 내 이름이 적혀 있겠지. 도예주. 기억해 둬.]

성은 도씨에 이름은 예주.

당연히 가명일 것이다.

신룡대의 조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본명을 댈 리가 없다.

그래도 예쁜 이름이다.

백룡, 아니, 도예주가 말했다.

[이다음에 만나게 되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일 테니 그리 알고.]

신룡대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는 조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누나라고 불러. 괜한 의심 사지 않게끔.]

[누님이 아니고요?]

내 말에 도예주가 말없이 나를 째려보았다.

우리의 나이 차이면 ‘누나’가 아니라 ‘누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니냐는 뜻의 농담이었는데,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

곧바로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하하. 누나죠. 그렇죠. 누나가 맞죠. 누나일 수밖에 없죠.]

[그렇지?]

눈동자에 힘을 준 채로 저렇게 묻고 있다.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줬다.

[암요.]

그러자 도예주가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이제 가서 쉬어야겠다. 또 보자, 유겸아.]

[예, 조장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장님 말고, 다음에 만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연습하는 셈 치고 ‘예주 누나’ 해 봐.]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니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그냥 해주자.

[예주······, 누나.]

[붙여서.]

이쯤 되니 뭔가 훈련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든다.

게다가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감은 여전하다.

어쨌든 상대는 신룡대의 백룡이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그냥 해주자.

[예주 누나.]

그 순간, 도예주의 표정이 엄청나게 환해졌다.

뭘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거야?

참 내, 신룡대의 백룡씩이나 되는 사람이, 누나 소리 듣는 게 저렇게나 좋은 건가?

그래도 처음에 슬퍼하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저 표정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예주는 그 표정 그대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래에 있는 가지들을 밟으며 땅바닥에 도달한 그녀가 나를 한 차례 올려다보더니 곧바로 신법을 펼치며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역시나 신룡대는 떠나고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쳤을 즈음, 무림맹의 무인 한 명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집법당주께서 찾으시네. 참모 막사로 가보게.”

무인이 알려준 참모 막사로 들어섰다.

혼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선우훤이 고개를 들어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빙그레 웃는다.

일단은 포권하며 예를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집법당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어이쿠! 우리 유명 인사 오셨구먼.”

선우훤이 농담조로 그렇게 대꾸하는데, 유명 인사라는 표현을 왜 썼는지는 딱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내가 살짝 한숨을 내쉬자 선우훤이 내게 물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너도 들은 모양이로구나?”

“예. 증운생 그자가 죽기 전에 제 이름을 언급하며 이상한 소릴 했다고······.”

“허허. 이상한 소리라고 하기보다는 엄청난 칭찬이었지.”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선우훤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좋은 소식 알려줄까? 너와 함께 싸웠던 천무대 삼 조와 사 조의 무인들은 다들 너를 송 소협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더구나. 기동타격조의 다른 관도들에게는 ‘공자’, ‘소저’ 등의 호칭을 쓰는데, 너한테는 ‘소협’이라는 호칭이 나오는 게지. 허허허.”

하아······.

한숨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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