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76
사레가 들린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인데 심지어 심하게 들렸다. 기침이 쉽사리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추소륵의 목소리가 들렸다.
“송유겸 공자가 회주를 맡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이 있는 분들은 거수해 주시오.”
“콜록······! 켁! 켁! 콜록!”
나는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나 외에는 손을 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추소륵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면 송유겸 공자가 회주를 맡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분들, 거수해 주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손을 들었다. 다들 그냥 든 것도 아니고 번쩍 들고 있다.
“콜록! 크흠! 자, 잠시만, 콜록······!”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제지하려 했지만 추소륵은 내게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본인의 할 말만 할 뿐이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송유겸 공자가 가칭 ‘기타회’의 회주로 추대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이오.”
추소륵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신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짝!
야! 야, 이것들아! 사람이 지금 사레들려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콜록······! 이런 날치기를 인정할 수는······! 켁! 켁! 콜록!”
“아이고오! 우리 회주님께서 온몸으로 감격하신 모양이오!”
길초량 놈의 말이었다.
야, 이 자식아! 네놈의 눈에는 이게 지금 감격한 것으로 보여? 기침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한데 놈의 말에 연놈들이 좋다고 웃고 있다.
가만 보니 저 칠 년 차의 세 놈은 모임 얘기가 통과되자마자 회주 역할을 신속하게 나에게 맡기기로 사전에 말을 맞췄던 모양이다.
나를 회주로 추대했을 경우, 어차피 모두가 격하게 호응할 거라는 사실쯤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을 테니까.
겨우 기침을 멈춘 후에 조원들에게 말했다.
“아니, 여러분. 잘 생각해 봅시다. 조장님과 부조장님만 해도 지금껏 우리를 매우 잘 이끌어주셨소. 경험도 있는 만큼 그 두 분 중에서 한 분이 회주를 맡는 게 훨씬 낫지 않겠소?”
그러자마자 단목강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알다시피 당시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조장을 맡았었소. 그리고 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만족하오. 아울러 송 공자에 대해 알 만큼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송 공자만큼 회주 역할에 적합한 분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오.”
그러자 황보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나 또한 조장님과 똑같은 심정이오. 그러니 그냥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시구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기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후에는 추소륵을 비롯한 칠 년 차들에게 말했다.
“하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남들을 이끌 만한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오. 그러니 이번에 졸업하는 세 분 중에서 한 분이 맡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소.”
그러자 추소륵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만하시오, 송 공자. 추하오.”
“추, 추하다닛······!”
“회주는 우리를 대표하는 얼굴인 만큼 무공 실력과 전투 역량이 매우 중요하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소. 송 공자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고차원의 영역에 홀로 들어가 있음을.”
그 말에 조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전투들을 함께 치러왔기에 얘들 앞에서는 대충 둘러댈 수도 없는 입장이다.
추소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송 공자 본인은 제대로 못 느끼고 계신 모양인데, 송 공자는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한, 우리의 정신적 지주요. 우리는 그런 사람을 회주로 삼아 우리를 대표하게 하고 싶은 것이고.”
다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내가 포기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쉴 때쯤, 내 옆에 있던 길초량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우리의 가칭 기타회와 회주를 위하여!”
“위하여!”
다 함께 술잔을 부딪친 후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나는 남들을 이끄는 역할은 부담스러워서 매우 꺼려 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거절하려 했던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거대한 적에 맞서 싸우게 될 텐데, 그때에 이들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우리는 가칭 기타회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며 계속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술자리는 정말로 동이 터올 무렵에야 끝났다.
* * *
“으으······.”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두통이 밀려왔다.
간밤에는 거의 폭음 수준이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조원들 열 명 모두가 그렇게 마셨다.
머리통을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으으······.”
신음을 흘리며 창문 쪽을 확인해 보니 일단은 낮이다. 아마도 오후인 것 같다.
머리맡에 있는 사발을 들어 물을 두어 모금 들이켰다. 그러던 중에 나는 급격하게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쓰고 있는 객실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정면이 막혀 있고, 측면으로 현관이 이어진다.
그 길쭉한 현관에서 방으로 연결되는 형태인데, 현관과 방은 길고 촘촘한 주렴으로 구분되어 있다. 주렴으로 구분된 형태이니 어차피 같은 공간이긴 하다.
한데 그 주렴 너머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상당히 익숙한 기척이다.
누구인지를 떠올리려던 찰나,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어나셨어요, 송 공자님?”
어? 이 목소리는······.
“단모옥······ 소저어······?”
그랬다. 단목지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후훗. 제 목소리인 걸 금방 알아채시네요? 보아하니 숙취도 제법 심하신 것 같은데.”
“다, 단목 소저께서 어떻게 이곳에······.”
“지금 탈의하고 계시거나 그렇진 않죠?”
“그, 그렇기야 한데······.”
“그럼 잠시 들어갈게요.”
“헛! 자, 잠깐, 내 몰골이 지금 아마도······.”
하지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렴이 걷히더니 단목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단목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봬요, 송 공자님. 건강한 모습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 오, 오랜만이오.”
역시나 예쁘다.
항상 예뻤는데 오랜만에 보니 더 예뻐 보이는 것 같다.
청초하고 단아한 저 모습이 마치 아침이슬을 머금은 하얀 난화(蘭花)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단목지는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더니 쟁반 위에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
“꿀물이에요. 많이 달지 않고 적당히 달게 했어요.”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소저에게 황송하기도 해서 이거 얹히지나 않을지······.”
“푸흡! 그냥 마시면 되는 건데 얹힐 일이 뭐가 있겠어요. 부담 갖지 말고 쭉 드세요.”
마시라니 일단 마셨다.
숙취 때문에 간절히 필요하기도 했다.
마시고 나서 그릇을 다시금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 좀 살 것 같구려. 고맙소. 한데 이거, 소저에게 빚이 더 추가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려.”
그녀와는 빚 얘기로 통하는 게 있으니 농담을 한 것이다.
“이건 빚과 상관없으니 염려 마세요. 저는 주인의 입장이고 송 공자님은 손님의 입장이니 원래 제가 대접해야 하는 거잖아요.”
단목지가 그렇게 대꾸하더니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홀할 정도로 예쁜 미소다.
나는 곧바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한데 단목 소저가 어떻게 지금 세가에 계시오? 원래대로라면 잠룡관에 계셔야 하잖소.”
“아, 총관님께서 잠룡관 측에다가 제 휴가를 요청하셨더라구요. 세가의 중요 행사와 가정사를 이유로요. 전서를 읽어봤더니 중요한 손님들이 세가에 대거 방문한다는 내용과 어머니의 출산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서둘러 온 거예요. 아까 오전에 도착했어요.”
“아.”
아마도 동갑도에 있던 우리가 단목세가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의 총관이 조치를 취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단목세가의 입장에서 중요한 손님들이기는 하다.
일단 천하제일세가의 두 형제만 해도 특급 귀빈들이다.
게다가 추소륵은 소림이 애지중지하는 제자고, 강하령은 검후의 제자이며, 황보충과 모용리는 오대세가의 직계들이다. 대강 이런 이들이 동시에 세가에 방문한 것이다.
가뜩이나 모친의 출산까지 예정되어 있으니 잠룡관에서 휴가를 받을 만한 사유도 충분해 보인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한데 이 방에는 왜······.”
“송 공자님 깨어나자마자 꿀물 챙겨드리고 싶어서였죠.”
“왠지 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음, 특별 대우라고는 해도 이곳에 오신 분들 중에 제가 이렇게 챙겨드릴 만큼 친분이 깊은 분이 송 공자님뿐이라서요. 게다가 제가 송 공자님을 이런 식으로 챙겨드릴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하면 언제부터 계셨소?”
“한 시진쯤 전부터요.”
“헛! 그렇게 오래 계셨단 말이오? 그 시간 내내 지루하고 심심하셨을 것 아니오. 가뜩이나 먼 길 오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이러면 내가 미안하잖소.”
그러자 단목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독서하고 있었던 거라 심심하지도 않았어요.”
“······어쨌든 여러모로 챙겨주셔서 고맙소.”
단목지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단목지가 뭔가를 떠올렸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참! 송 공자님, 그거 아세요? 유하가 지난 승반 심사에서 엄청난 결과를 냈는데.”
“아, 그 소식은 들었소. 듣고 나서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세 단계나 승반해서 병반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소.”
실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남들 앞에서는 놀란 척을 해줘야 한다.
“한데 방금 누이를 유하라고······.”
“아! 친해지다 보니 어느새 언니 동생으로 부르게 돼서요.”
“하하, 그렇구려.”
“병반 생활에도 잘 적응한 것 같아요. 새로운 거처가 마침 제 거처에서 가까워서 더 좋구요.”
그러고 보니 거처도 옮겼겠구나.
여관도들은 갑을병정 반이 같은 거주 구역을 쓰니, 반이 달라도 거주 구역이 가까울 수 있다.
내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단목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하랑 언니 동생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은무나 우혜와도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됐어요. 그 애들은 우리 오라버니와도 친분이 제법 깊은 모양이라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구요.”
“하하, 그렇구려.”
알아서 친해져서 서로 잘들 지낸 모양이다.
이렇듯 얘기를 듣고 나니 그 세 명도 보고 싶다.
단목지가 쟁반을 챙기며 말했다.
“꿀물도 드렸고 얼굴도 뵙고 했으니 이제 가볼게요. 조금 더 누워서 쉬세요. 이따가 저녁 식사 시간에 봬요.”
“알겠소. 고마웠소.”
내 대답을 들은 단목지가 생긋 웃더니 내 방을 벗어났다.
* * *
이른 저녁 식사를 위해 다들 모였는데, 교관들이고 관도들이고 할 것 없이 다들 너덜너덜한 모습들이었다.
우리도 밤새도록 마셨지만 네 명의 교관들도 따로 모여서 밤새도록 마셨다는 모양이다.
실상 기동타격조에서 가장 고생한 이들이 바로 교관들이기도 하다. 술 마시면서 나눌 이야기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네 사람이 단목세가를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궁찬은 오전에, 세 노인은 점심 식사 후에 조용히 떠났다는 모양이다.
어제 세 노인한테서 들은 이야기들이 있어서인지, 다들 아쉬움을 어느 정도는 달래는 모습들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에는 북부지맹 측의 인원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산동까지 가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뱃길을 이용하며 편하게 이동할 계획이라고 한다.
같이 많은 일들을 겪은 만큼, 막상 그들이 떠난다니 너무 아쉬웠다.
그나마도 가칭 ‘기타회’를 결성해뒀기에 약간이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참고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장호산과 이세옥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둘이 기어이 눈이 맞은 모양이다.
다만 장호산은 동부지맹의 교관이고 이세옥은 북부지맹의 교관이라, 앞으로 어찌 될지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그날 사시 정(오전 10시) 무렵, 제갈수광이 동부지맹의 인원들을 집합시켰다.
“어으, 죽겄다. 어으······ 다들 주목.”
저 술꾼은 어젯밤에도 또 술을 적잖게 마셨다. 그래서 저 모양인 것이다.
“송구합니다만 교관님, 주목을 했다가도 교관님의 풀린 눈동자를 보면 저절로 주목도 풀리는데요.”
내 말에 관도들은 키득거렸고 제갈수광은 눈매를 찡그린 채로 나를 바라봤다. 눈빛으로 ‘저 웬수’라고 말하고 있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관주님의 답신이 왔다. 엊그제 내가 요청했던, 우리의 방학 겸 휴가에 대한 건이다.”
그 말에 관도들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가득해졌다.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으, 골이야······. 관주님께서 청을 받아들이셨다. 휴가는 어제를 시작으로 꼬박 사 주간이다.”
“우오오오오옷!”
관도들뿐만 아니라 교관인 장호산도 환호했다.
그날 오후에는 남궁묵과 종금무, 장호산이 떠났다.
세 사람은 안휘 출신인 만큼, 남궁묵이 떠나는 길에 동행한 것이다.
다음 날 새벽에는 강하령이 떠났다.
어차피 검각이 있는 보타산은 그리 멀지 않기에, 단목진이 검풍대의 무인들 몇 명을 데리고 직접 호위하며 갔다. 중간에 검각의 해천대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자 단목세가의 식구들을 제외하고 남은 인원은 제갈수광과 길초량, 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