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81
우리는 모레 단목세가를 떠나기로 했다.
잠룡관으로 복귀해야 할 인원은 다섯 명으로, 제갈수광, 길초량, 나, 단목강, 단목지다.
새벽부터 개인 수련을 한 후, 신시 정(오후 4시)쯤부터는 단목지의 수련을 도와줬다.
그러다가 유시 정(오후 6시)무렵이 되어 슬슬 수련을 마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실내 수련장의 문밖에서 단목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아, 안에 있느냐?”
단목진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다 큰 딸이 폐쇄된 공간 안에 외간 남자와 같이 있는 상황이다. 모른 척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설 법도 한데, 밖에서 일단 본인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사람이 참, 경우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는 적이 없다.
일전에 떠났던 세 노인이 단목진에게 천목산의 군자라는 의미로 천목군자라는 별호를 지어줬었는데, 내 생각에도 딱 어울리는 별호 같다.
“예, 아버지.”
단목지가 대꾸하자 단목진이 실내 수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내가 예를 취하자 단목진이 말했다.
“틈틈이 내 딸아이 수련 도와주느라 그간 송 공자가 고생이 많았네. 이 아이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며 좋아하더군.”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단목 소저가 워낙 열심히 한 덕분입니다.”
내가 대꾸하자 단목진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아주 큰 도움이던데······. 어쨌거나 그간 도와준 고마움에 대한 보답도 겸해서, 오늘은 송 공자를 안채로 불러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네. 식사가 준비되고 있으니 같이 가서 들지.”
왠지 나만 데려가려는 눈치라서 확인차 물었다.
“아, 저만 가는 건지요?”
“제갈 교관님과 길 공자는 아까 점심에 안채로 불러서 따로 대접을 했네. 두 사람 다 방금까지 실컷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휘청휘청 거처로 돌아갔지.”
그렇지 않아도 점심때 접객당의 식당에 갔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다.
각자의 수련을 하다 보면 식사 시간은 조금씩 다를 수 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인간들이 실상은 내원에서 대접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하루 종일 수련하느라 땀을 흘렸으니 적당히 씻은 후에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안채에 이미 따뜻한 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놨다고 알고 있네. 아내가 특별히 그렇게 준비시켰다고 하더군. 그러니 바로 같이 가지.”
“가요, 송 공자님.”
부녀가 그렇게 재촉하기에 할 수 없이 두 사람과 같이 내원으로 향했다.
간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후, 안채의 객실로 이동하여 단목세가에서 미리 준비해둔 속옷과 옷을 입었다.
새 옷들인데, 속옷은 부드러운 재질이라 착용감이 좋았고, 겉옷은 고급스러운 재질의 백의였다. 무엇보다도 옷이 내 몸에 딱 맞는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옷을 입은 후 객실 밖으로 나서자 마당에 서 있는 단목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천천히 내 전신을 훑더니 말했다.
“옷이 딱 맞는구려. 어울리기도 정말 잘 어울리오. 뭐, 송 공자야 옷걸이가 워낙 좋기도 하고.”
“하하, 저도 옷이 몸에 딱 맞아서 놀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워낙 눈썰미가 좋으시오. 교관님과 길 공자와 송 공자에게는 특별히 더 고마워하는 의미로 옷을 한 벌씩 준비하셨다고 하오.”
“아······.”
“갑시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모양이오.”
식당으로 향하자 단목진과 교문혜가 이미 자리해 있었다.
우리도 얼른 다가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단목강이 왼쪽이고 내가 오른쪽이었다.
교문혜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에 물었다.
“한데 아기는 어쩌시고······.”
“여기 바로 옆 방에 있어요. 보모에게 돌보라 하고 잠시 나온 거예요. 송 공자와 함께하는 가족 식사 자리인데 내가 빠질 수야 있나요. 잠시라도 함께하면서 챙겨야지.”
“하하,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호홋,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가주 부인께서 이렇게 좋은 옷도 따로 챙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에 잘 맞기도 해서 더욱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그런 대화들을 나누고 있는데 단목지도 도착했다.
말끔하게 씻고 고운 옷을 입고 예쁘게 단장까지 한 모습이었는데, 어이구야, 기가 막히게 예쁘다.
평소에 딱히 꾸미지 않은 모습만으로도 예쁜데, 이렇듯 단장까지 한 상태이니 그 미모가 어떻겠는가. 눈이 부실 정도다.
이러니 송유하가 단목지의 단장한 모습을 보고 본인도 꾸미고 다니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단목지는 내 오른편 의자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요리들을 먹는 와중에 단목진은 우리에게 술도 권했다.
“어차피 모레 새벽부터 출발하려면 내일은 다들 푹 쉬어야 할 테니, 이왕 마실 거면 오늘 실컷 마시는 게 좋겠지.”
결국, 아직 몸조리 중인 교문혜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마셨다.
단목세가에 왔던 첫날 이후로는 술을 마시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이 가족들의 분위기도 맞춰줄 겸해서 마시는 것이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교문혜는 음식들을 내가 먹기 좋게끔 담아주거나 놓아주며 부지런히 나를 챙겼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그녀는 개의치 말고 맛있게 먹으라며 계속 나를 챙기는 모습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시던 중에 단목진이 말했다.
“송 공자가 여인에게 맞게 변형시켰다던 그 초식들 말일세. 엊그제 지아에게 펼쳐 보라고 해서 확인해 봤네.”
“아, 그건······ 참고하라는 의미의 예시 정도로······.”
내가 서둘러 그렇게 대꾸하자 단목진이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허허. 곤란하게 만들려고 꺼낸 말이 아닐세. 지아가 변형된 초식을 쭉 이어서 펼치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딱 봐도 너무 훌륭했네. 그래서 꺼낸 말일세.”
“아······.”
“보니까 약간씩의 변형을 준 것뿐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펼치기에 훨씬 수월한 형태가 되어 있더군. 그 와중에도 검법의 기세도 그대로 살아 있어서, 남자가 펼치는 것 못지않은 기세도 느낄 수 있었네. 실로 감탄스럽더군.”
첫날에 적절한 형태로 초식의 군데군데를 변형시켜 줬더니, 이후부터 단목지는 군데군데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변형시켜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었다.
부분적인 기준보다는 전체적인 기준이 생겨야 본인이 참고하기도 더 편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원하는 대로 해줬다.
그리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다.
정가장에서 했던 것처럼 면밀한 작업도 아니고, 원래 있던 초식을 여인이 펼치기에 알맞은 형태로 변형시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참고 용도로 각 부분마다 한두 가지의 예시를 보여주면 되는 식이었으니 더더욱 어려울 게 없었다.
내가 뭐라고 변명을 하려던 찰나, 단목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초식을 한두 차례 보고 나서 어렵지 않게 변형식들을 만들어냈다고 하더군. 내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송 공자는 천재인가?”
“헙! 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천재들이 들으면 비웃습니다.”
“눈썰미나 기억력도 범상치 않다는 뜻이겠지만, 그건 애초에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은 수준에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당연히 나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일 수밖에 없는데, 그 나이에 그런 수준이라는 건······.”
이 부분은 사실이기는 하다.
나는 무공 쪽의 서열은 몰라도 무학 이해도 쪽의 서열은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자신이 있다. 온전히 사부님 덕분이다.
“아하하, 제가 무학 연구가 취미라서 그쪽으로 약간의 잔재주가 있는 것뿐입니다. 아직은 어설픈 수준에 불과하기에 단목 소저에게도 참고만 하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인데······.”
빈약한 변명인 건 알지만 이 정도 변명은 해주자.
그러자 단목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강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송 공자는 일전에 정가장인가 하는 곳에서도 그 가문의 무공을 다듬어줬다는 것 같더군. 정가장 측에서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러자 옆에 앉은 단목강이 내게 말했다.
“송 공자가 지아에게 변형된 초식을 알려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에게 걱정 마시라는 의미로 말씀드렸던 것이오. 송 공자가 그쪽으로 대단한 역량이 있다는 걸 주지시켜 드리고자.”
결국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단목진이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한두 가지의 예시를 보여주고 끝내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그 검법의 초식을 여인용으로 정리해 보는 게 어떻겠나? 잠룡관에 간 후에도 지아와 함께 연구하며 가장 적합한 변형식을 만드는 걸세.”
“예에에?”
갑작스럽게 이런 제안을 해올 줄은 몰랐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사례는 결코 서운치 않은 수준으로 하겠네.”
“아, 아니, 사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신지라······.”
그러자 단목진이 천천히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잠시 후 술잔을 내려놓은 단목진이 말했다.
“송 공자도 지아한테서 들었다고 알고 있네만, 우리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인들 중에는 절정의 후반에 도달한 고수가 거의 없네. 실제로 자질이 뛰어났던 내 누님도 결국 그 수준을 넘지 못했고, 들어보니 내 고모님도 그랬었다고 하더군. 조부님과 부친께서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크셨다고 들었네. 물론 지금은 나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고.”
단목지에게도 얘기했지만 이건 단목세가의 검법이 기본적으로 매우 남성적인 성향의 검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송 공자가 변형시켜줬다던 그 형태의 초식들을 보게 된 걸세. 변형된 초식들을 본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네.”
단목진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송 공자처럼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세. 그중에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지. 내가 맹주님한테 가서 이런 부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잖나.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걸세. 분명히 말하지만 사례는 확실하게 할 것이고.”
나를 보는 단목진의 눈동자에서 진지한 열망이 느껴졌다.
저 열망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단목세가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고 싶은 것이다.
세가의 힘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세가 최고 고수의 실력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무력도 중요하다.
한데 단목세가의 경우, 현재로서는 그 부분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대로라면 도약하기에도 한계가 있다.
단목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저런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가 흔쾌히 수락하자 단목진이 환한 얼굴로 대꾸했다.
“고맙네, 송 공자. 정말 고맙네.”
교문혜도 나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뭔가 만족감 가득한 미소다.
“고맙소, 송 공자. 내, 앞으로도 송 공자에게 더 잘하리다.”
“감사해요, 송 공자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단목강과 단목지도 각각 그렇게 말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더 즐거운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교문혜는 중간에 한 번씩 가서 아기를 보고 다시 오는 방식으로, 최대한 오래 머무르며 나를 챙겨주다가 들어갔다.
나머지 인원들은 계속 남아서 술을 마셨는데, 교문혜가 방으로 들어가자 이후부터는 단목지가 눈치껏 나를 챙겼다. 안주를 먹기 좋게 놓아준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전체적으로 송가장의 식구들과 가족 모임을 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겹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이게 바로 가족적인 분위기인가 싶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런 분위기를 직접, 제대로 느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술자리는 자정 직전까지 이어졌다.
단목진은 안채의 객실에서 자고 가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그것만은 거절한 채 접객당의 거처로 돌아와서 잤다.
다음 날에는 휴식과 운기조식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 무렵에는 교문혜를 제외한 모두가 같이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다음 날 떠나야 하는 만큼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새벽, 우리는 단목세가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