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84
“푸하하! 그럴 리가. 나조차도 기동타격조에서 길 형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었는데.”
그렇게 대꾸해 준 후에 씩 웃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절친끼리 짜고서 실력을 감춘 채로 계반 생활을 하는 관도들은 따로 있다던데.”
내 말에 두 소녀가 움찔했다.
어차피 송유하도 얘들의 빼어난 실력을 빤히 아는 마당이라 이런 말 정도는 상관없다.
잠시 후에 송유하가 말했다.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동부지맹과 북부지맹에서 각각 다섯 명씩, 양 지맹에서 최고의 관도들 열 명이 모였던 게 바로 잠룡대의 기동타격조잖아요. 그런데 그런 인재들 중에서도 오라버니와 길 공자님이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는 거잖아요. 이 잠룡관에서 저와 가장 가깝게 지내온 두 분이······.”
송유하가 바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야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시니 그렇다 쳐도, 길 공자님이 그런 실력자였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오라버니 덕분에 저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길 공자님을 알고 지내왔잖아요. 그 와중에도 저는 속으로 길 공자님을 떠올리며 안타깝다는 생각도 종종 했었거든요. 정말 좋은 분이신데 무공에 대한 재능은 별로 없으신가 보다 하구요.”
사실상 송유하의 수준에서 길초량의 경지를 알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길초량이 워낙 철저하게 무공을 숨기고 다닌 덕분이기도 했다.
“그런 길 공자님이 그렇게나 대단한 실력자였다는 거잖아요. 그래서인지 더더욱 놀랍고, 신기하고, 또 기뻐요.”
길초량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송유하야말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들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송유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강호에서는 어디에서든 항상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못 알아보는 것일 뿐, 근처에 있는 이들 중 누구든 고수일 수 있다는 거니까요.”
그래. 그런 자세는 견지하고 있을수록 좋은 거야.
유은무가 물었다.
“길초량 선배님도 암기술을 잘한다면서요? 철비정술이 대단하시다고······.”
장우혜도 빠르게 한마디를 보탰다.
“주 무공은 곤술이라고도 들었어요.”
“응. 맞아. 주로 철비정을 날리며 아군을 지원하다가 본인이 직접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서만 곤술을 펼치곤 했어. 은밀하고 빠르고 정확한 철비정술에, 곤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보이더라고.”
내 대답을 들은 두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곧 유은무가 말했다.
“음······, 송 오라버니도 쇠구슬이나 소비도를 날리다가 한 번씩만 검을 쓰시던데, 길 선배님도 철비정을 날리다가 한 번씩만 곤을 쓰시는구나.”
그건 나와 길초량이 흑풍대와 신룡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훈련은 오로지 실전에 특화된 훈련이며, 기본적으로 단체전을 염두에 둔 훈련이다.
단체전은 조직력이 중요하기에 진형을 갖추며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암기 등의 원거리 무기 하나씩은 무조건 익혀야만 하는 환경인 것이다.
장우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보조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암기술을 통해 원거리에서 아군을 지원하다가, 필요한 순간에만 주 무공을 사용하는 거지. 초반에 원거리에서 암기술을 펼치다 보면 비교적 안전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전황을 파악하기에도 용이할 거야. 전에 송 오라버니가 그런 식으로 싸우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단체로 싸울 때 여러모로 효율적인 전투 방식인 것만큼은 분명해.”
장우혜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역시 수준급의 암기술 실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지.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은 거거든.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때 기초 정도만 배우다가 때려치웠던 거고.”
유은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도 그랬었어. 그래도 우리는 아직 어린 데다가, 우리의 곁에는 암기술의 고수도 있잖아? 언제든 가르쳐달라고 조르기도 편한, 실전에서 증명된 암기술의 고수가.”
곧 두 소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하하······ 우리 누이들이 암기술에 꽂혔구나? 아하하······.”
내 말에 두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 기술로 암기술을 익히고자 하는 건 매우 좋은 결정이기는 하다.
해적들과 전투를 치를 당시, 기동타격조의 여러 관도들도 갑자기 암기술을 수련하기 시작했었다.
그들이 괜히 그랬던 게 아니다.
그만큼 유용하다는 걸 몸소 보고 느꼈기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유은무와 장우혜를 내가 예뻐한다고 해도, 암기술을 기초부터 지도하려면 내 시간도 너무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에는 차라리 얘들의 암기술 수준이 일정 이상 올라왔을 때 실전 형식으로 수련을 도와주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그편이 내 성향과 장점을 훨씬 더 잘 살려서 도와줄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슬기롭게 넘길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나 제갈수광이다.
계반 담당 교관이기까지 하니 여러모로 최적격이긴 한데, 문제는 그 인간이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얘들이 교습을 부탁하러 가면 오히려 나한테 되돌려 보내서 기초와 기본 단계를 지도하게끔 지시할 수도 있다.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내 쪽으로 미루고도 남는다.
이 경우,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얘들의 암기술 교습을 기초 단계부터 맡아야 한다.
아무래도 제갈수광 쪽은 위험 부담이 커 보인다.
그렇다면 역시 차선을 쓸 수밖에 없겠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후 곧바로 두 소녀를 향해 말했다.
“나야 뭐, 누이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지. 암.”
두 소녀의 얼굴에 만족감 가득한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녀들을 보며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 기동타격조에 마침 암기술 담당 교관님이 계셨거든. 북부지맹의 이세옥 교관님이라고, 여교관님인데 여러 암기술에 능통한 분이시지. 이 교관님과 더불어 암기술에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고.”
두 소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교관님이 말씀하시길, 본인이 여러 종류의 암기를 다 익히고 보니, 보조 기술로서 여인이 익히기에는 철비정술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 무엇보다도 휴대가 간편한 게 가장 큰 장점이라며.”
“아, 그래요?”
“응. 누이들도 알다시피 나 같은 경우에는 소비도를 암기로 쓰잖아? 한데 소비도는 양팔, 양다리, 허리에 전용 가죽 띠를 착용해도 최대 수십 개를 소지하는 게 한계야. 그래서 내가 암기의 절대적인 개수를 늘리기 위해 쇠구슬까지 쓰는 거고.”
“아하.”
“문제가 뭐냐면, 몸의 이곳저곳에 가죽 띠를 착용하고 있으면 움직일 때마다 거치적거린다는 거야. 어느 정도 적응되기 전까지는 그게 참 거슬려. 게다가 다 꽂혀 있을 때는 심지어 무겁기까지 하지. 내 경우에는 쇠구슬까지 챙겨야 하니 더더욱 무거워지는 거고.”
내 말을 들은 장우혜가 말했다.
“소비도에 비해 철비정이 확실히 개당 부피도 작고 무게도 가볍죠. 백 개, 아니 이백 개를 챙긴다 해도 무게가 그리 부담되는 수준도 아니구요.”
“그렇지. 철비정이 소비도보다 기본적인 사거리는 짧지만, 사거리야 경지가 올라갈수록 늘릴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우리에게는 마침 계반에서 놀고 있는 철비정술의 대가도 있고.”
내 말에 두 소녀가 좋은 생각이라는 표정으로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열심히 납득시킨 보람이 있다.
이 아이들과 길초량은 어차피 내 방에 드나들며 서로 친근해진 사이다.
길초량이 유은무와 장우혜의 정확한 정체까지는 모르겠지만, 얘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길초량도 상당한 경지의 무인이니까.
놈의 입장에서도 두 소녀는 흥미로운 존재들일 테니, 교습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다.
혹여 그러다가 길초량이 두 소녀의 정체를 눈치채게 된다고 해도 딱히 문제 될 일은 없다.
상대가 천하제일세가의 금지옥엽과 현 무림맹 집법당주의 맏손녀임을 알게 된다면, 신룡대원인 놈의 입장에서도 알아서 입조심을 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이 정보를 관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자 유은무가 말했다.
“참! 송 오라버니, 그거 모르시죠? 송 언니 요새 완전 인기인이에요!”
“아, 그 그게······.”
송유하가 민망하다는 듯 반응하자 이번에는 장우혜가 말했다.
“원래부터 잠룡삼화였던 미모에, 송 오라버니의 여동생에, 이번에 세 단계 승반한 일까지 더해져서 그렇게 된 거죠. 상위 반 쪽 남관도들이 어떻게든 송 언니와 대화 한마디 섞어보려고 난리도 아니래요. 연서(戀書, 연애편지)도 많이 전달받고 있다고 들었구요.”
“오오오.”
내가 추켜세우듯 반응하자 송유하가 난감함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너무 부담스러워요. 게다가 저는 무공 수련만으로도 일과가 빠듯해서 그런 부분들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요. 그저,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무공을 익히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은 그게 제일 재미있기도 하구요.”
얘가 연애를 하든 사교를 하든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아직은 그쪽으로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정말로 무공 수련에만 열중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기특해.
이후에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유은무와 장우혜가 내 거처를 벗어났다.
내가 기동타격조로서 참여했던 여러 전투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차차 듣겠다는 모양이다. 그러한 실전 상황들에 대해 자세히 들어 놓는 편이 본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나?
좋은 자세다. 걔들이 필요하다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자세히 들려줄 수 있다.
늦은 오후 무렵에는 송유하와 함께 오랜만에 구보를 했다.
거처에 돌아온 후, 씻고 운기조식을 취하다가 잠들었다.
* * *
다음 날, 사시 초(오전 9시) 무렵.
어제 통보받은 게 있기에 아침부터 총교관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총교관 노양홍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오! 유겸이 왔구나! 오랜만이구나!”
“총교관님을 뵈옵니다.”
노양홍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한 후 그와 더불어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하고 왔을 때보다 훨씬 더 반갑게 대하는 것으로 보아, 노양홍도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노양홍은 총교관인 만큼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이후에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먼저 도착하여 앉아 있었다.
종금무, 단목강, 강하령, 길초량, 장호산 등이었다.
기동타격조의 인원들인데, 제갈수광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본 장호산, 종금무, 강하령과 차를 마시며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일각쯤 후에 제갈수광이 관주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제갈수광이 들어서자마자 주향이 진동을 했다.
어제 또 엄청나게 달린 모양이다.
“허허, 우리 제갈 교관께서는 아주 그냥 술독에 들어갔다 오셨구먼.”
노양홍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우리를 향해 말했다.
“어쨌든 모두 도착했군. 어제 통보했듯 오늘은 이곳에 있는 인원들에 대한 표창장 수여식이 진행될 걸세. 기동타격조로서 큰 공을 세운 데 대해 맹주님이 내리는 표창일세. 어제도 통보했지만 동부지맹주께서 대신 수여하실 걸세. 동부지맹주께서는 현재 관주실에 관주님과 같이 계시고.”
웬만하면 잠룡관주과 수여해도 될 텐데도 동부지맹주가 수여한다는 건, 이 표창의 권위를 최대한 세워주겠다는 의미다.
노양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금무는 졸업인데, 금무 한 명만을 위해서 졸업식 행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기에 금무에게는 졸업을 기념하여 재학생들 앞에서 고별사를 할 기회를 주기로 했네. 박수받으며 졸업할 수 있도록. 어제부터 준비시켰고.”
그러자 종금무가 말했다.
“하하······. 갑작스럽게 그 지시를 받고는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습니다. 어찌어찌 연설문을 써보긴 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걸 읽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떨립니다.”
모두가 웃어 보이자 노양홍이 말했다.
“슬슬 행사 준비가 끝날 시간이니 모두 이동하세.”
동부지맹 잠룡관 중앙의 대연무장에는 수백 명의 인원들이 운집하여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상태였다. 동부지맹 잠룡관의 모든 교관들과 관도들이 모인 것이다.
곧 동부지맹주 관필만과 잠룡관주 육남춘이 도착하여 단상 위에 올랐고, 육남춘의 호출에 따라 우리도 단상 위로 올랐다.
이후에는 육남춘의 진행으로 표창장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관필만으로부터 차례로 표창장이 수여될 때마다 관도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표창장을 받은 우리가 단상 위에서 관도들 쪽을 향해 뒤돌아서자 동부지맹주 관필만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도열해 있는 관도들 중에 내가 아는 얼굴들을 살폈다.
나와 눈을 맞추며 눈빛으로 축하해주는 얼굴들도 많지만, 속이 편치 않아 보이는 얼굴들도 몇 놈 있었다. 그놈들이 불편해하는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은 편해졌다.
그즈음, 연무장 외곽의 멀리로 익숙한 하나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룡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 누님이 왜 이곳에 있는 거야?